「歷史是聞」

을파소 진대법

砅涓 2003. 1. 2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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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의 후손이다.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191년(고국천왕 13) 왕이 국정을 맡길 인물을 구할 때 안류에 의해 추천되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공손한 말과 예로 불러 중외대부와 우태라는 품계와 관직을 주었다. 을파소는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뜻을 이루기에는 직위가 낮다고 생각하여 사양했다. 왕이 그 뜻을 알고 국상으로 임명해 국사를 맡게 했다. 이때 귀족들이 을파소를 시기하고 미워하자, 왕은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족을 멸하겠다고 했다. 이후 을파소는 나라에 봉사하여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삼가했다.

194년에는 매년 3~7월에 백성의 호구 크기에 따라 차등있게 정부의 곡식을 빌려주고,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했다. 고국천왕이 죽은 후 산상왕 때도 국상으로 지내다가, 203년 8월에 죽었다. 고국천왕 때는 고구려 왕권 확립에 획기적인 때로서 을파소는 왕권을 중심으로 고구려 사회의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 샐애
을파소는 고구려 사람이다. 고국천왕 때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의 무리가 모두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러 불의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히 여겼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잡아 목베려 하자 좌가려 등은 모반을 일으켰다. 왕이 그 일당을 잡아 죽이기도 하고 일부는 내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령하길, “근자에 벼슬이 총애로써 내려지고 덕없는 이가 자리에 오르니, 그 독이 백성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우리 왕실은 흔들리게 되었다. 이것은 과인이 밝지 못한 탓이다. 그대들 사부에서는 각자 부족의 어질고 착한 이를 추천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추천해서 왕이 국정을 맡기기 위해 그를 불렀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길, “하찮은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큰 정치를 다룰 수 없습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의 을파소라는 자가 유리왕 때 대신 을소의 후손인데, 성격이 강직하고 굳세며, 슬기와 지혜가 연못처럼 깊습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기에 혼자 밭을 갈며 살고 있는데,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바로 이 사람이 없이는 아니되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초빙해 중외대부에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었다. 왕이 말하길, “내 감히 선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신민들의 위에 있게 되었으나 덕이 야박하고 재능이 짧아 다스림이 모자라오.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궁벽한 풀밭 늪지에 처한 지 오래이나, 지금 나를 저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 이리 와 주니 이것은 나 혼자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들의 복이올시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마음을 다해 주오.”
파소는 비록 나라에 몸을 바치려 하였으나, 내려진 벼슬자리가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대답하길, “신은 둔하고 굼뜨어, 엄한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대왕께서 현량한 자를 고관으로 삼아 대업을 이루시기를 바라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이에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때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 인척들이 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신하들을 차별한다고 말하며 그를 흠잡았다. 왕이 하교하길, 
“진실로 국상에게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일족을 멸하리라!”라고 하였다. 
파소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로서 떳떳한 일이다. 
금상께서 나를 두텁게 대우하시는데 어찌 다시 숨는 것을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치를 밝히며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했다. 왕이 안류를 불러 말하길, “만약 그대의 말이 없었다면 내 파소를 능히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루어진 모든 것은 다 그대의 공이다.” 라고 하고 이에 대사자에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을파소가 죽으니 백성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곡을 했다.

《삼국사기》 권 45 을파소 열전

3.
을파소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명왕 시기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으로 혈통으로 놓고 보자면 상당히 귀한 출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가문이 몰락했는지 도성 밖으로 밀려나 서압록곡(西鴨淥谷)의 좌물촌(左勿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고 있었다.
후에 고국천왕이 외척인 좌가려, 어비류 등이 횡포를 부리고 모반을 꾀하자 이를 평정한 후에 모든 부(部)에 명을 내려 나라를 이끌어 갈만한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고구려 4부가 모두 함께 안류를 추천하였다.
하지만 안류는 자기 대신 을파소를 천거하며 강직하고 지혜가 있다고 평하였다.
191년, 이 말을 들은 고국천왕에 의해 을파소가 초빙되어 중외대부(中畏大夫)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거기에다가 관작을 더해 우태(于台)가 되었다.
그러나 을파소는 "신은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으니 대왕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 큰 뜻을 이루소서"라는 식으로 '더 높은 자리를 줘야 내 뜻대로 정치를 해 볼 만하다'는 입장을 에둘러 말했다.
이에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배짱과 기상을 높이 샀는지 대뜸 을파소를 국상으로 파격 채용하였다. 국상은 오늘날 국무총리 급의 직위로 관직 중에서도 최고위직이다.
그러자 아연실색한 신하들은 고국천왕에게 "웬 듣보잡을 재상 시킵니까?"라는 식으로 을파소 험담을 하였다.
그러나 고국천왕은 "을파소 말을 안 들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일족을 멸하겠다."고 못을 박으며 을파소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신임을 나타냈다. 게다가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에게도 공이 있다고 하면서 대사자 벼슬을 주었다.

국상이 된 을파소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고 높은 직위를 내려 준 고국천왕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선정을 펼쳤다.
이후 고국천왕이 죽은 후에도 국상을 지내다가 산상왕 7년(203) 8월에 삶을 마감했는데 이 때 만백성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전한다.
을파소가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고우루가 국상이 되었디

4. 평가
을파소가 죽었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슬피 통곡했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보아 백성들로부터도 존경받았던 뛰어난 명재상이었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의 저자인김부식은 을파소 열전에서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라며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기록상으로 보면 고구려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불러도 될만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을파소의 유명한 업적으로 진대법이 거론되지만, 사실 을파소가 직접 진대법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을파소가 한창 내정을 이끌 때 진대법이 시행되어 진대법의 시행자가 을파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널리 퍼져서 오늘날 마치 진대법을 직접 시행한 인물이 을파소인 것처럼 알려진 것이다. 물론 을파소가 당시에 국상을 지내며 국정을 보살피는 등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에 진대법을 먼저 주창했느냐 여부를 떠나서, 진대법이 실행되는 과정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확률은 높다. 을파소는 관직에 오르기 전 직접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문제점 역시 잘 알고 있어 이런 부분에 세심한 컨트롤이 가능했을 개연성이 높다.


*** 진대법
서기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은 사냥을 나갔다 길에서 슬피 우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왕이 사연을 묻자 답하기를, "흉년이 들어 품을 팔 데도 없고 곡식도 구할 수 없어 나이 드신 어머니를 더 이상 모실 길이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왕은 이 자를 불쌍히 여겨 곡식을 나눠주며 위로하고 국상인 을파소를 불러 "백성의 부모 되어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으니 내 죄다. 널리 조사하여 홀아비, 과부, 노인, 병자, 가난한 자를 도우라"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때 만들어진 법이 우리민족 최초의 사회보장제도인 '진대법'이라고 합니다. 진대법은 흉년이나 보릿고개 때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 주고 수확기에 갚도록 하는 민생구휼제도였습니다. 진대법은 가난한 평민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의 집 노비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제도는 후대에도 이어져 고려와 조선시대의 빈민구제 제도인 '의창'의 근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나라가 나서서 살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법. 진대법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선조들의 애민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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