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 설재 정가신

정가신(鄭可臣)은 자가 헌지(獻之)고 처음 이름은 정흥(鄭興)이며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사람으로, 부친 정송수(鄭松壽)는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정가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책을 읽고 글을 지으니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았다.
일찍이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개경으로 왔으나 빈궁하여 의지할 곳이 없었으므로 천기의 집에서 기식했다. 천기가 그를 불쌍히 여겨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가 사위로 받아들이기로 허락한 후 뒤늦게 “내가 비록 가난하지만 사족(士族)인데 어찌 향공(鄕貢)1)의 자식을 받아들이겠는가?”라고 후회했는데 얼마 후에 안홍우가 죽고 집안 형편이 하루하루 쪼들리자 그제야 허혼했다. 천기가 정가신의 손을 잡고 걸어서 그 집을 찾아 갔더니 한 노파가 문에서 맞이하는데 장작불로 비춰보니 몇 간뿐인 초가집이었다. 천기가 돌아오면서 “아아! 정생(鄭生)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통곡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여러 차례 요직을 역임2)했으며, 충렬왕 3년(1277)에는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임명되었다. 당시 어떤 나주 사람이, “금성산신(錦城山神)이 무당에게 강림해 ‘진도(珍島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와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의 정벌 당시 사실은 내가 애를 썼는데,3)장졸들에게는 상을 주면서 막상 나에게는 녹봉을 주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반드시 나를 정령공(定寧公)으로 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 꾀었다. 정가신이 그 말에 속아 넘어가 왕에게 몰래 귀띔해 그 산신을 정령공으로 봉했고 덧붙여 그 읍에서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지급하는 쌀 다섯 석을 따로 떼어 해마다 그 사당으로 보냈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승진하자, 마침 이분희(李汾禧)5)형제가 홍다구(洪茶丘) 편에 붙어 김방경(金方慶)의 죄를 날조해 모함하였다. 정가신은 그런 자들과 조정에 같이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겨 사직하고 귀향해 모친을 봉양하겠다고 재삼 간청하자 왕이 잘 위로해 보내주니 여론이 그를 칭송하였다. 곧 다시 소환되어 비서윤(秘書尹)으로서 비칙치[必闍赤]가 되었고 승지(承旨)로 임명되었다. 당시 감찰사(監察司)에서 이런 건의를 올렸다.
“각 도에 파견된 안렴사(按廉使)와 별감(別監)은 관리들의 행정을 감찰하고 민폐를 파악하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들 주상께 바친다는 핑계로 백성들로부터 명주·저피폐(楮皮幣)6)·육포·과일·명표지(名表紙)7) 등의 물건을 거두어 권귀들에게 뇌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르지 못한 터에 어찌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모두 죄로 다스리소서.”
왕이 정가신더러 “닥나무는 땅에서 그냥 나는데, 종이를 바치는 것이 무슨 민폐가 되겠는가?” 하고 물었다. 정가신이,
“제가 전주(全州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관기(管記)를 맡았을 때 종이 만드는 것이 매우 고된 일8)임을 그때 알았습니다. 지금 제가 관직이 높아 사용하는 종이도 많으니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왕이 명표지(名表紙)만 공물에서 제외하도록 조치했다. 원나라가 고려에 일본 정벌을 명령하자, 왕이 윤수(尹秀)의 말을 좇아 유생들을 종군시키려 하니 정가신이 반대했다.
“선왕들께서 사람을 쓸 때 각자 지닌 재능에 따랐는데, 그것을 몸에 비하자면 왼손과 오른손의 차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원나라의 법에서는 유생(儒生)들을 군무에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지금 유생들로 하여금 무장을 시켜 원정길에 나서게 한다면 그것은 주상의 큰 덕을 훼손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왕이 옳은 말이라 여겼다. 당시 천재지변이 나타나자 오윤부(伍允孚)가 소재도량(消災道場)9)을 열어 재변을 물리치자고 주청했다. 정가신이 염승익(廉承益)에게, “천재지변을 어떻게 불법(佛法)으로 물리칠 수 있겠소? 왜 주상께 덕을 닦으시라고 청하지 않는거요?”라고 힐문하자 염승익은, “내가 어찌 그 이치를 모르겠소? 다만 간언하기가 어려울 뿐이요.” 라고 변명했다.
뒤에 정가신은 밀직학사(密直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다. 충렬왕 16년(1290),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정가신은 민지(閔漬) 등과 함께 호종했다. 어느 날 황제가 세자를 편전으로 부르더니 안석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지금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세자가, “고려의 유학자10)정가신과 민지가 마침 이곳에 있으므로 숙위(宿衛)하는 여가에 때때로 『효경(孝經)』·『논어(論語)』·『맹자(孟子)』를 묻곤 합니다.”고 대답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면서 “어디 한번 정가신을 불러 오라.”고 하여 세자가 인도해 함께 들어갔는데, 황제가 급히 일어나 관을 쓰면서, “네가 비록 세자라도 내 외손자이며 저 사람이 비록 고려의 신하라도 유학자인데, 어찌 나에게 관을 쓰지도 않은 채 만나게 하느냐?” 고 꾸짖었다. 이어 자리를 권한 후 고려의 풍속, 왕위가 계승되어온 내력, 정치의 상황 등을 물었는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해서 진지하게 경청했다. 뒤에 공경(公卿)들에게 교지(交趾 : 지금의 베트남 북부 통킹·하노이)정벌 문제를 의논하도록 한 후 이어 고려 세자의 스승 두 명과도 함께 의논하라고 분부하자 정가신 등이 건의했다.
“교지는 원방의 오랑캐이므로 애써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는 것보다는 사신을 보내 스스로 귀부하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만일 그들이 환상에 사로잡힌 채 복속하지 않을 경우 그 죄상을 널리 밝힌 후 정벌한다면 단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책이 황제의 뜻과 일치했기 때문에 정가신을 한림학사(翰林學士)·가의대부(嘉議大夫)로 임명하자 당시 사람들이 영예로 여겼다. 그 후 황제가 더욱 후대해 자신의 수라상에서 맛난 반찬을 거두어 하사했으며 날씨가 추우면 담비 가죽옷을 내려주기도 했다. 황제가 한림학사 살라만(撤刺蠻)을 시켜 정가신에게 고려가 언제 원나라에 귀부했던가를 물어보게 하자 정가신이 이렇게 대답했다.
“태조(太祖) 황제께서 처음 북방에서 나라를 세우셨을 때 요나라의 서자 출신인 금산왕자(金山王子)란 자가 나라를 세워 대요(大遼)라고 자칭하면서 중도(中都)의 남녀백성들과 재물을 약탈한 다음 동쪽 강동성(江東城)으로 달아나 웅거했습니다. 상국 조정에서는 카치운[哈眞]과 차라[扎刺]를 보내 토벌하게 했는데 마침 눈이 많이 쌓이고 길이 험하여 군량의 조달이 끊어졌습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를 파견해 상국 군사들에게 군량을 제공해 구원했으며 더러운 오랑캐를 섬멸한 후 표문을 올려 상국의 동쪽 울타리를 자청했습니다. 태조께서는 사신을 보내어 은혜가 넘치는 조서로 답장을 보내고 또한 ‘너희 나라 사람들은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므로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니 그 바치는 방물(方物)은 짐이 다른 사람을 시켜 받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무인(戊寅)년에 있었으니 지금으로부터 76년 전 일입니다.”
황제가 다시 세자를 자단전(紫檀殿)으로 부르자 정가신이 따라갔다. 황제가 나이를 묻고는 갓을 벗으라 명한 후, “수재(秀才)는 반드시 편발(編髮)을 할 필요는 없고 건(巾)을 써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황제의 책상 앞에 어떤 물건이 있었는데 큰 쪽은 둥글고 작은 쪽은 뾰족하며 색깔이 정결한데다 높이는 1척 5촌 가량으로 그 안에 술 몇 말을 담을 수 있었는데 마하발국(摩訶鉢國)에서 바친 낙타(駱駝)의 알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세자에게 구경시킨 후 세자와 따라온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고 정가신에게 시를 짓게 했다. 정가신이 즉석에서 지어 올린 시는 이러하다.
항아리만큼이나 커다란 알 있어
그 속엔 늙지 않는 불로주 담겨 있네.
부디 앞으로도 천 년을 누리시어
좋은 향취 해동에도 미치게 해주소서.
시를 본 황제가 가상히 여겨 수라상에 놓인 국을 내려 주었다. 그 뒤로 세자는 황제를 알현할 때마다 반드시 정가신으로 하여금 시종하게 했다.
한때 황제가 요동수정도(遼東水程圖)를 보고 수역(水驛)을 설치하려고 정가신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다.
“너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은 쌀과 베뿐인데 만약 육로로 수송한다면 길이 멀고 물건이 무거우므로 가져와 봤자 수송 비용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너를 강남행성좌승사(江南行省左丞使)로 임명해 해운(海運)을 관리하게 한다면 해마다 얼마간의 쌀과 베를 운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원나라의 쓰임새에 도움도 될 것이고, 고려 사람들이 연경(燕京)에서 지내면서 쓸 물자로도 공급될 것이다.”
이에 정가신이,
“고려의 지리적 조건은 10분의 7이 숲 덤불이라 아무리 농사와 길쌈에 애를 써도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바닷길에 익숙하지 못하니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더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고 대답하니 황제가 그렇게 여겼다. 곧이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임명되었고 충렬왕 22년(1296)에는 중찬(中贊)으로 올랐다. 당시 부지밀직(副知密直) 최충소(崔冲紹)11)가 세자의 명령으로 공주의 궁로(穹盧 : 몽고식 천막)를 설치하려고 수창궁(壽昌宮)12)터에 다단(壇)을 쌓고 담을 둘러 큰 공사를 시작했다. 마침 땅이 얼어붙어 흙을 가져 올 곳이 없자 구멍 하나를 팔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가 압사(壓死)한 사람이 많이 생겼다. 또한 길가에 있는 담장과 집을 모두 기와로 덮게 하면서 최충소·정가신·이지저(李之氐)·최유엄·박의(朴義) 등이 일을 마구 닦달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24년(1298)에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닷새에 한 번씩 조회하라고 하였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으로 올려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죽으니13)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곧고 근엄했으며 치밀하게 일을 처리했다. 정방(政房)에 근무할 때는 전고(典故)에 익숙했기 때문에 관리의 고과와 선발이 모두 여론과 부합했다. 또 당시 반포된 왕 명의의 공문 가운데 그가 작성한 것이 많았으며 『금경록(金鏡錄)』14)을 편찬하기도 했다. 거처에 설재(雪齋)라는 편액을 달고 매일 학식있는 사대부들과 함께 고금의 역사를 토론했으며 높은 관직에 있을 때도 서생(書生)처럼 행동했다. 그가 수상이 되자 사람들은 태평성대를 기대했는데 갑자기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놀라고 슬퍼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왕이 원나라에 양위를 요청하는 표문을 정가신이 지었는데, 사람들이 표문에 있는 말 가운데 왕의 뜻과 다른 것이 있다면서 나중에 책임을 추궁할 경우 그것을 지은 자가 반드시 문책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들 수군대자 정가신이 고민 끝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뒤에 충선왕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들은 정탁(鄭倬)15)·정전(鄭佺)·정길(鄭佶)·정억(鄭億)·정엄(鄭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