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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공 휘 길파 선조의 약력. 행장(少尹公 諱 佶派 先祖의 略歷, 行狀)

五世 子 길(佶)(1277~1325)49
문과 봉상대부 행 개성소윤(文科奉常大夫行開城少尹) 증자헌대부 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로 소윤공파(少尹公派) 문중을 이루며 나주의 금안동을 위주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자손들이 살고 있다. 
충렬왕 3년 정축에 낳고 충숙왕 을축 9월19일에 졸하다. 묘는 나주의 남쪽 장사(長沙) 고산동(高山洞) 안산(案山) 유좌(酉坐)에 비석 있음.
배(配)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안동인(安東人) 권씨(權氏)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 길창부원군(吉昌府阮君) 윤명(允明)의 여(女)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제(濟)의 손자 상서(尙書) 득공(得公)의 증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외손이다. 
충렬왕 7년 신사생 충숙왕 12년 을축 정월초하루에 졸하다. 향년 45세 묘는 광산구 삼도동 양동 곰실 계좌(癸坐) 
유갈(有碣).

六世 문진(文振)(1317~1367)51
공은 설재공의 손자요 소윤공의 아드님이다.
문과조산대부행보성군사(文科朝散大夫行寶城郡事) 증자헌대부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 충숙왕 4년 정사생 공민왕 16년 정미 졸(卒) 묘(墓) 나주시 노안면 계림리 덕림(羅州市 老安面 桂林里 德林) 상촌후록(上村後麓) 묘좌(卯坐) 유갈(有碣). 
배(配)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도강김씨(道康金氏) 판전객시(判典客寺) 현(顯)의 여(女) 사인(舍人) 화성(華成)의 손자이며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익지(益之)의 증손이다. 
충숙왕 7년 경신생 공민왕 16년 정미 졸 향년(享年)48세이다. 
묘는 광산구 본양동 월청 북록임좌(光山區 本良洞 月淸 北麓壬坐) 유갈(有碣).

 七世 정 초(初)(1345~1423)79
문정공의 증손이며 소윤공의 손자이다.
공의 휘는 초(初) 자는 천왕(天王) 호는 삼불의(三不義)이다. 고(考)는 지보성군사(知寶城郡事) 
증자헌대부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 휘는 문진(文振)이며 비()는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도강김씨(道康金氏) 판전객시(判典客寺) 사현(事顯)의 여(女)이며 사인(舍人) 혁성(革成)의 손이다. 고려 충목왕 원년(1345)에 나주의 금안동 수각마을에서 태어나니 천품이 준수하고 성품이 활달하며 도량이 크시었다. 
어려서 구룡재(九龍齋)에서 공부를 했는데 11살 되던 섣달 그믐날 밤에 공이 혼자서 서당을 지키며 공부하는 밤중에 갑자기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오면서 창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키는 10자나 되고 몸통은 5아름이나 되는 무서운 괴물이들어와 한참동안 공을 노려보고 섰더니 순식간에 촛불이 꺼졌고 불을 키면 또 꺼지고를 거듭하였으나 싫은 기색 없이 태연한척 호령하기를 “네가 어떤 요물이냐 여우냐 귀신이냐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썩 물러가지 못할까”라고 소리쳤으나 목소리는 무서워서 떨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괴물이 사라지더니 잠시 후에 수염이 아름답고 풍체가 뛰어난 한 노인이 지팡이를 끌며 대청으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나는 금성산을 지키는 산신이다. 너의 도량을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처음엔 세 차례나 불을 껐어도 싫은 기색이 없어 정승의 재목인가 싶었는데 나중엔 말소리가 떨리며 두려워하는 눈치가 보였으니 정경(正卿:판서) 재목이었다.”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자라면서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과 사귀고 강호(江湖)김숙자(金叔滋:대학자 김종직의 부친)와는 도의적으로 사귀었다. 태조 2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조 4년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에 천거되고 차례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등 화려한 벼슬을 지냈으며 태종 8년에서 태종 9년까지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 都節制使) 도진무(都鎭撫)를 지냈으니 이때의 기록이 왕조실록 태종편권 16(455쪽)의 8년 10월과 태종실록권 17(479쪽) 9년 4월의 기록에 있으며 당시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의 천거가 있었음도 첨가되어있다. 그 무렵 제주에 큰 가뭄이 들어 인심이 흉흉할 때 제주목사(濟州牧使) 겸 안무사(按撫使)에 임명되었으니 때는 태종 9년 3월 19일이었다. 재임 시에 신명스러운 치적이 많았는데 제주의 대정현(大靜縣)에 수십 리 들판이 개간이 안 되고 묵어있는 것을 보고 주민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농사지을만한 물이 없어서 이처럼 버려진 땅이 되었다.”라고 하기에 공은 7주야를 목욕재개하고 한라산에 빌었더니 땅이 쩍 벌어지면서 물이 솟아올라서 이 땅을 개간하여 옥토가되게 하고 농사를 짓게 되니 산에선 정천(鄭泉)이요 들은 정평(鄭坪)이라 사민(士民)이 감화하고 송공비(頌功碑)를 세워 그의 덕을 흠모했다. 
돌아와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한성판윤(漢城判尹: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태종 1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의금부사(義禁府事)에 올랐으니 금성산신의 예언이 딱 들어맞은 셈이다. 공은 늘 집안이 번성할수록 몸을 낮추며 꽃씨를 뿌리고대를 가꾸면서 의리를 강론하고 후학을 장진했다. 세종 5년(1423)에 졸하니 향년 79세로 금안동 영안촌안산 유좌에 례장(禮葬)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무송 유씨(茂松庾氏) 좌찬성당(左贊成)의 여이며 이조참판 익(益)의 손이고 병부상서 필(弼)의 후이다. 온순정일(溫順貞一)하고 원유부덕(苑有婦德)하다. 처남은 유구산(庾龜山:한성부윤)과 유오산(庾鰲山:관찰사)형제가 있었으나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옥사하니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이 글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송천희(宋千喜) 선생이 지은 글을 번역하였다.
공의 호가 삼불의헌(三不義軒)인데 이 호는 공이 스스로 지은 호이다. 그 뜻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공이 스스로 주객(主客)의 입장이 되어 문답을 하였다.

공은 한가한 틈에 무슨 일을 하는가
앞뜰에 동백꽃이 만발할 때 새가 와서 꽃을 쪼으면 꽃을 보호하기 위해 새를 쫓는다. 
애물지의:愛物之義(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홍매화가 아름답게 피었을때 꽃나무에 말을 매어놓으면 백마등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즐긴다.
상심지의:賞心之義(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
부엌 종이 반찬거리가 떨어졌다고 고하면 대밭에 들어가 죽순을 끊어다가 반찬을 만드니
안빈지의:安貧之義(가난도 편하게 이기는 마음) 이것을 삼의(三義)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객(客)은 이렇게 말하였다. 
새들이 날아와서 꽃을 쪼으며 노는것도 또한 꽃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인데 이것을 쫓는 것은비급물지서:非及物之恕(용서하는 마음이 아니다.) 일불의(一不義)꽃나무에 말을 매어 말등에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즐겼스니 비양물지도:非養物之道(꽃만 즐기고 나무는 생각지 않았다.) 이불의(二不義)이며대(竹)에는 군자의 절개가 있는데 이것을 자라지 못하게 끊어버렸으니 비애물지인:非愛物之仁(생물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없다.)이다. 그래서 
삼불의(三不義) 아닌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처음엔 삼의(三義)로 생각했다가 뒤에 삼불의(三不義)로 호한 것은 진실로 불의(不義)는 아니지만 자기의 허물을 들으면 기탄없이 고치려는 마음이니 그의 신분이높고 춘추가 많아도 진덕수도(進德修道)의 정신으로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七世 복암공 정극기(復菴公鄭克己)사실(1363~1452)
공의 휘는 극기(克己)요 자는 사안(師顔)이며 호(號)는 복암(復菴)이니 문정공 설재(文靖公雪齋)선생의 현손이다. 
증조의 휘(諱)는 길(佶)이니 개성소윤(開城小尹)이요 조의 휘는 문진(文桭)이니 보성군수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며 고(考)의 휘는 초(初)이니 호조판서(戶曹判書)며 비()는 정부인 무송유씨(茂松庾氏)로 좌찬성(左贊成) 당()의 딸이다.
공은 1363년(공민왕12년)에 나주 김안동( 金鞍洞) 자택에서 탄생하였다. 7, 8세로부터 성리서(性理書)를 탐구(探究)하였으며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서 강호 김숙자(江湖 金淑滋)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으며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였다.1414년(태종14)에 
① 춘방세마(春坊洗馬)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고 1415년에 원주판관(原州判官)으로 나갔다가 문치로써 강능부사(江陵府使)로 옮겼는데 민속이 
② 준우(蠢愚)하여 의리와 학문을 알지 못함으로 공께서 고을의 준수한 자제를 뽑아 매월 삭망(朔望)에 
③ 교궁(校宮)으로 모이게 하여 강의를 함으로써 
④ 효제(孝悌)의 행실을 깨우치게 하였고 재주에 따라 학문을 성취케 하니 
⑤ 도백(道伯)이 탁무(卓茂)와 문옹(文翁)의 교화(敎化)라고 포창(褒彰)하였으며 1419년(세종1년)에 성균제주(成均祭酒)에 임명되니 교육과정을 엄히 세워 여러 학생들과 공복(公服)을 입고 개강하여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했고 1426년(세종8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어 여량군 송현수(礪良君 宋玹壽)와 같이 경연에서 주상(主上)을 모시니 상께서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경등은 타일에 세자를 
⑥ 조호(調護)하라하니 땅에 엎드려 수명(受命)하고 같이 국사를 돌보자고 약속하였다. 1431년(세종13년)에 서해관찰사(西海觀察使)로 재직하다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 한가롭게 외삼촌인 참판 유구산(庾龜山)과 감사 유오산(庾鰲山)과 같이 수석간에 소요(逍遙)하면서 종로(終老)의 계책을 삼으니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먼데서 까지 찾아와 그 수가 심히 많았으며 문하(門下)에서 위대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1451년에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예조판서로 불렀으나 연로하고 병이 있다 핑계하고 벼슬을 사양했다. 1452년 5월 18일 문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종일토록 통곡하였으며 임금이 유충(幼沖)하고 종실이 강성하니 앞으로 국사가 근심된다 하고 드디어 식사를 물리치고 서거하니 향년이 89였다.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나주군 도림면 웅곡 선영하에 귀장(歸葬)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이조참의 종성(宗城)의 여(女)요 시중 문충공 몽주(侍中 文忠公 夢周)의 손녀이다

어구 해석
① 춘방세마(春坊洗馬) : 세자 시강원의 하급 관직
② 준우(蠢愚) : 어리석음
③ 교궁(校宮) : 학교의 건물(향교)
④ 효제(孝悌) : 효도하고 우애함
⑤ 도백(道伯) : 감사. 지금의 도지사
⑥ 조호(調護) : 둘러싸고 보호함

七世 감찰공 정극종 사실(監察公鄭克從事實)(1366~1437) 72세
공의 휘(諱)는 극종이요 자는 문선(文善)이며 호는 금헌(錦軒)이고 본관은 나주(羅州)다. 문정공 설재(文靖公 雪齋) 선생의 현손(玄孫)이며 曾祖의 휘는 길(佶)이니 개성소윤(開城小尹)이요 조의 휘는 문진(文振)이니 보성군사(寶城郡事)로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며 고(考)의 휘는 초(初)이니 호조판서(戶曹判書)요 비()는 정부인(貞夫人) 무송유씨(茂松庾氏)로 좌찬성(左贊成) 당()의 딸이다.
공은 1366년(공민왕15년)에 나주 금안동(金鞍洞) 자택에서 탄생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였으며 독서(讀書)를 좋아해 주위사람들의 부러움을 샀고 장성하여서는 부친을 따라 상경(上京)하여 야은길재(冶隱吉再)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여 문행(文行)이 세상에알려졌다.
1415년(태종15년)에 음보(蔭補)로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으로 임명된지 2년 후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특진되고 1420년(세종2년) 안주(安州) 판관(判官)으로 나갔다가 1422년에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부임하여 현민으로 하여금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실천과 권농(勸農)에 힘을 쓰고 효자효부를 표창하며, 아전(衙前)들을 단속하여 서민을 괴롭히는 부정행위를 금하게 하는 등 서정(庶政)을 잘 다스리니 현민이 선정(善政)을 구가(謳歌)하고 격양가(擊壤歌)를 높이 불렀으며 1426년(세종8년) 관직을 중도에서 버리고 귀향하니 눈물을 흘리며 전송(餞送)하는 행렬이 10리를 연했다. 1437년(세종19) 자택에서 서거하니 향년이 72 였으며 묘는 나주 노안면 영안촌(永安村) 안산 유좌(酉坐) 원이요 비석이 세워졌다.
배(配)는 숙인(淑人) 전주최씨(全州崔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 대사헌(大司憲) 양(良)의 딸이다.
아들은 하나이니 로(輅)요 태인현감(泰仁縣監)이며 딸은 여산송씨(礪山宋氏) 현감 극창(克昌)에게 시집갔으며 손(孫)자는 무장현감 석필(碩弼)과 연필(延弼)이고 外孫은 감사 송만희(宋萬喜) 문절공 이조판서 송천희(宋千喜)이다.

七世 부사공 정극념 사실(府使公鄭克念事實)(1370~1427) 58세
공의 휘는 극념(克念)이요 자는 선덕(善德)이며 호는 금계(錦溪)다.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 선생의 현손이며 증조의 휘는 길(佶)이니 개성소윤(開城小尹)이요 조의 휘는 문진(文振)이며 보성군사(寶城郡事)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며 고(考)의 휘는 초(初)이니 자헌대부(資憲大夫)호조판서(戶曹判書)요 비()는 정부인 무송유씨(茂松庾氏)로 좌찬성 당()의 딸이다.공은 1370년(공민왕 19년)에 나주 금안동(金鞍洞)에서 탄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壯大)하고 총명(聰明)하여 독서에 몰두(沒頭)하면 밤새는 줄을 몰랐으며 의협심(義俠心)이 강해 항상 약한 자를 도왔다. 어른이 되어서는 부친 의헌공(義軒公)을 따라 상경(上京)하여 야은길재(冶隱吉再) 선생 문하에서 중형(仲兄)과 같이 수학하여 문행(文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도의교(道義交)를 하였다. 1416년(태종16년)에 천거(薦擧)로 과천(果川) 현감(縣監)으로 제수(除受) 되었으며 누천(累遷)하여 1423년(세종5년) 안동(安東) 부사(府使)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治積)을 남겼으며, 이곳 안동부는 공의 고조(高祖)이신 문정공 설재 선생과 한 조정에서 정사(政事)를 보면서 의기(義氣)가 상합하고 절친했던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김방경(金方慶) 선생의 본향(本鄕)이라
그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어 공무의 바쁜 와중(渦中)에도 김선생의 후손들을 찾아 도의교(道義交)를 하고 빈궁한 후손에게는 사재(私財)를 들여 구휼(救恤)하였으며, 또한 공의 종증조(從曾祖)이신 참지정사(參知政事) 탁(倬)선생께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많은 선정(善政)을 베푼 고을이라 맑은 마음으로 열정(熱情)을 쏟아 정사에 임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1427년(세종9년)에 이곳 안동에서 순직(殉職)하니 향년 58 이었다.
墓는 광산군 삼도면 웅곡(熊谷) 선영하(先塋下) 子 좌원이며 쌍조(雙兆)다.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추서(追敍)되고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의안대군(義安大君) 양소공(襄昭公) 화(和)의 딸이며 후배(後配)는 정부인 청주정씨(淸州鄭氏)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총(摠)의 여(女)다. 아들은 3명이니 장남(長男)은 사헌부 집의(執義) 윤(輪)이요 차남(次男)은 사헌부감찰 철(轍)이며 삼남(三男)은 여(輿)다. 

七世 현감공 정석필 사실(縣監公鄭碩弼事實)(1372~1439) 68세
공의 휘는 석필(碩弼)이요 자는 원보(元輔)며 호는 금곡(錦谷)으로 관향(貫鄕)은 나주(羅州)다.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 선생의 六代孫이며 고조의 휘는 문진(文振)으로 보성군사(寶城郡事)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요 
증조의 휘는 초(初)이며 자헌대부 호조판서(資憲大夫戶曹判書)요 조의 휘는 극종(克從)이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화순현감(和順縣監)이요 고(考)의 휘는 로(輅)며 태인현감(泰仁縣監)이요 비()는 합덕현부인(合德縣夫人) 남평문씨 현종(賢從)의 딸이다. 공은 1406년(태종6년)에 나주 금안동(金鞍洞)에서 탄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담력(膽力)과 지혜(智慧)가 성인과 같았고 글을 좋아하고 의리(義理)가 강했다. 
장성해서는 판서 삼불의헌(三不義軒) 선생의 종손(宗孫)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명문(名門)의 가풍(家風)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으며 조부(祖父)인 감찰 극종(克從) 밑에서 수학(受學)하고 대호군(大護軍)을 지내신 재종조 자신(自新) 문하에서 병가(齊家)에 힘쓰고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남귀(南歸)하니 이때 공의 춘추 52세 였다. 고조(高祖)이신 이판(吏判)공 문진(文振)으로부터 公에 이르기까지 5대를 계속 높은 벼슬살이를 하여온 덕으로 본래 부자인데다가 公이 20여 년간 근검으로 치가(治家)에 힘을 쓴 결과, 만석(萬石)꾼의 부자가 되고 참깨로 1천석을 받은 나주의 갑부(甲富)가 되어 말년을 행복하게 지내고 1439년(성종4년)에 타계하니 향년 68이었다.
묘(墓 )는 나주 김안동 영안촌(永安村) 후 정좌원으로 쌍조(雙兆)며 비석이 세워졌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남양방씨(南陽房氏) 대호군(大護軍) 진(眞)의 딸이다. 아들은 하나 있으니 정략장군(定略將軍) 계복(繼福)이며 손자는 둘이니 천세(千歲)와 천령(千齡)이다. 

七世 수사공 정철아 사실(水使公鄭喆雅事實)(1422~1467)

공의 휘(諱)는 철아(喆雅)요 자는 원범(元範)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高麗)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사공(守司空)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문정공(文서(兵書)와 무예(武藝)를 사사(師事) 1402년(태종2년)에 무과(武科) 급제(及第)하여 용양위부사정(龍衛副司正)에 임명되고 여러 번 승진을 하여 1413년(태종13년)에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오르고 1420년(세종2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무장현감(行茂長縣監)으로 부임, 농지가 많은 현내(縣內)를 자주 순시하여 권농(勸農)에 힘을 쓰는 등 많은 치적(治積)을 남겼다. 노친봉양(老親奉養)과 종손(宗孫)으로서 선영(先靈)을 받들고 제靖公) 설재 가신(雪齋 可臣) 선생은 중시조(中始祖)로 도학문장(道學文章)이 현우중국(顯于中國)하여 택류동방(澤流東方)케 하였고 세인(世人)으로부터 해동공자로 추앙(推仰)을 받았다. 고조(高祖)는 조선(朝鮮)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휘(諱)는 초(初)이며 증조의 휘는 극념(克念)이요 가선대부 행 안동부사 (嘉善大夫行安東府使)며 조의 휘는 철(轍)이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며 고(考)의 휘는 지(芝)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며 비()는 의인(宜人) 풍천임씨(豊川任氏)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현경(玄卿)의 딸이며 규범(閨範)이 정숙(貞淑)하였다.
공은 1422년(세종4년)에 나주 금안동(羅州金鞍洞) 자택에서 탄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혜(智慧)와 담력(膽力)이 대단(大端)하고 총명(聰明)하여 무인(武人)의 기질(氣質)을 타고 났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무과급제(武科及第)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신 재종숙(再從叔) 석필(碩弼) 문하에서 병서(兵書)와 무예(武藝)를 사사(師事)하여 1448년(세종30년) 27세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종5품)에 제수(除授)되고 누천(累遷)하여 1457년(세조3년)에 강화(江華)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로 부임 군선개량(軍船改良)과 화포(火砲)의 성능(性能) 개량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1461년(세조7년)에 절충장군(折衝將軍) 교동 수군 절도사(喬桐水軍節度使)에 승진되고, 
강화교동도(江華喬胴島)는 한강과 서해(西海)가 연결되어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要衝地)임으로 군사훈련과 군령을 엄히하여 해적(海賊) 방어에 공헌하고 1467년(세조13년)에 서거하니 향년이 46이다.
묘(墓)는 나주시 삼도동 웅곡(熊谷) 선영하 자좌(子坐)원으로 합장(合葬)이며 비석이 세워졌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달성서씨(達成徐氏)로 대사간(大司諫) 화(和)의 딸이며 아들은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익정(益廷)이요 손(孫)은 절충장군 행 전주영장(全州營將) 이성(以聖)이다. 끝.

七世 유(有)(1359~1405)47. 문정공의 증손 호판공의 제(弟)
공민왕 기해생 태종을유 9월 27일 졸.
통정대부지성천사(通政大夫知成川事) 력수(歷守) 영천(永川) 합천(陜川) 삼기(三岐)등 읍(邑)하다. 
증가정대부병조참판(贈嘉靖大夫兵曹參判) (세조 7年 8월 10일 경무공으로 추훈(推勳)되다.)
배(配) 보성군부인오씨(寶城郡夫人吳氏) 호조판서(戶曹判書) 례충(禮忠)의 여(女)이며 
광정대부문하평리(匡靖大夫門下評理) 예(豫)의 손이고 중현대부전객령(中顯大夫典客令) 백일(伯一)의 증손이다. 
기(忌) 6월 8일 묘는 광산구 본양동 월청(光山區 本良洞 月淸) 서록(西麓) 해좌(亥坐) 쌍조(雙兆) 유갈(有碣).

연보(年譜)
조선 태조 4년 (1395) 4월 27일 천통훈대부(遷通訓大夫)지합천 삼기군사(知峽川 三岐郡事)
겸권농병마단련사(兼勸農兵馬團鍊使)
태종 2년 (1402) 천통훈대부지영천사(遷通訓大夫知永川事)
태종 3년 (1403) 7월 8일 천통훈대부지성천사(遷通訓大夫知成川事)겸안주도좌익
병마단련사(兼安州道左翼兵馬團鍊使)권농관학사(勸農管學使)
증가정대부병조참판(贈嘉靖大夫兵曹參判)
세조 5년(1459) 이경무공추훈(以景武公推勳)

八世 자신(自新)(1388~1440)53
공의 휘는 자신(自新) 자는 순안(舜安)이다.설재공의 현손이오 고(考)의 휘는 유(有)니 지성천사(知成川事)이었으며 비()는 보성군부인오씨이며 호조판서 례충(禮忠)의 여이다. 공은 고려우왕 무진생이니 성품이 청렴하고 엄격하며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고 옛 성현의 책을 즐겨 읽었고 문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니 누군들 공과 사귀고 싶지 않았으랴!
뜰 안에는 항시 귀한 손님의 차마(車馬)가 가득했으니 이른바 소년 고사(高士)란 이런 분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일찍이 능성(綾城) 광양(光陽) 흥덕(興德) 인천(仁川) 이천(利川) 춘천(春川) 락안(樂安) 등의 원을 지냈고 모두 위엄과 덕망을 함께하였다. 벼슬은 보공장군(保功將軍)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대호군(大護軍)이었으며 세종경신(1440) 5월 27일에 졸하니 향년 53세이었고 장례는 이해 9월 10일에 이루어졌으며 묘는 나주시 문평면 백룡산하 밤나무등 간좌(艮坐)에 유갈(有碣)하다.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니 세조7년 8월 6일 경무공으로 추훈(推勳)되다. 
배(配)는 정부인 전주최씨 한성판윤 사위(士威)의 여이고 찬성평도공(贊成平度公) 유경(有慶)의 손이오 완산군(完山君) 재(宰)의 증손이다. 우왕 14년(1388) 생이요 세종 경오(1450)에 졸하니 향년 63세이었다. 
생활은 곧고 검박하며 부모에 효도하고 어질고 자애로운 어머니이었다. 묘는 공의 묘위에 비석이 있다. 
여기에 왕조실록에서 발견한 공의 기록을 소개한다. 세종 13년(1431) 3월에 춘천부사로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옷 1벌, 관노(종) 고을(古乙), 면포 15필, 여어리(女於里) 10필을 하사 받았다.
어떻게 해서 하사 받았을까 이조 초기에 해청채포군(海靑採捕軍)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꿩잡는 매를 잡기 위한 제도이었다. 함길도에 400호 평안도에 200호 강원도와 황해도에 각 50호씩을 두어 매를 잡게 했다. 
그러니까 매를 많이 잡아서 상을 받았던 것이다.(世宗실록 권51(297쪽)13년 3월의 기록에 있음)

이판공(吏判公) 자신(自新)의 년보(年譜)
태종 8년(1408) 천조봉대부(遷朝奉大夫) 지능성현사(知綾城縣事:공의 연세 21세때)
태종 12년 임진 입위사헌부감찰(入爲司憲府監察)
태종 13년 계사 출지광양현사(出知光陽縣事)
세종 6년 갑진 천지흥덕현사(遷知興德縣事) 겸권농병마단련부사(兼勸農兵馬團鍊副使)
세종 8년 병오 입록선절장군(入錄宣節將軍) 수의흥위사(守義興衛司) 우령호군(右領護軍)
세종 10년 무신 천조산대부(遷朝散大夫) 출지이천현사(出知利川縣事) 겸권농병마단련부사(兼勸農兵馬團鍊副使)
세종 14년 임자 조산대부행 춘천도호부사(朝散大夫行 春川都護府使) 겸권농병마단련부사(兼勸農兵馬團鍊副使)(이해에 경무공 문과 급제함)
세종 16년 갑인 승봉렬대부(陞奉烈大夫) 지인천군사(知仁川郡事) 겸권농병마단련부사(兼勸農兵馬團鍊副使)
16년 12월 천지락안군사(遷知樂安郡事)
세종 17년 을묘 승봉정대부(陞奉正大夫) 지락안군사(知樂安郡事) 겸권농병마단련부사(兼勸農兵馬團鍊副使) 입록위용장군좌군호군(入錄威勇將軍左軍護軍)
세종 18년 12월 3일 승보공장군(陞保功將軍)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대호군(大護軍)
세조 5년 기묘 증가선대부이조참판(贈嘉善大夫吏曹參判) 경무공추훈
증자헌대부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 (景武公推勳)

九世 병조판서 경무공(景武公) 휘는 식(軾) 행장(行狀)(1407~1467)61
공의 휘는 식(軾), 자는 빙보(憑甫) 또는 경첨(敬瞻)이며 호는 영모정(永慕亭)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문정공(文靖公) 설재선생(雪齋先生)의 5대손이다. 조(祖)의 휘는 유(有)니 통정대부로 지성천사(知成川事), 영천(永川)등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증가정대부(贈嘉靖大夫)병조참판이며 고(考)의 휘는 자신(自新)이니 능성(綾城)등 여러 고을에서 훌륭한 치적을 남겼으며 증자헌대부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 웅무시위사대호군(雄武侍衛司大護軍)이고 비()는 정부인 전주최씨 한성판윤(漢城判尹) 사위(士威)의 여이다. 
태종 7년(1407)에 나주의 금안동(金鞍洞)에서 낳으셨다. 성품이 엄격하고 맑고 곧았으며 문우(文友)나 친인척을 대함에 한결같이 충실하였고 명문거족에서 태어났어도 생활은 항상 청빈하였다. 경사(經史)를 널리 읽고 학문을 닦으면서도 과거에는 별 뜻이 없었으며 행동은 항상 옛 성인을 본받았고 저속한 풍속은 따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유순하고 온화하며 양친이 언제나 기뻐하시도록 모시니 암헌신장(巖軒申檣)선생은 양지지효(養志之孝:뜻을 잘 받드는 효도)라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세종 14년(1432) 4월 14일에 문과에 급제하니 때에 26세이었다. 이듬해에 통사랑(通仕郞)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고 오직 부모에게 효도하며 여가에 학문을 탐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세종 22년(1440) 34때에 부친이 돌아가시니 산소의 서쪽 감나무 밑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산소를 지키며 그 감나무에 의지하여 어찌나 슬퍼하는지 세인(世人)이그 효행에 탄복하며 그 감나무를 영모정(永慕亭)이라 불렀고 그런 연유로 경무공의 호를 영모정이라 하였다. 복을 마치고 어머님의 명에 의해서 출사(出仕)하니 승훈랑(承訓郞) 예좌전품(禮佐田品) 척간사(擲奸使)로 관리(官吏)의 부정을 살피었으며 세종 25년 9월 22일에는 예조좌랑(禮曹佐郞) 함길도 경차관(咸吉道 敬差官)으로 기근(饑饉)과유행병의 상황을 살피고 소상하게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 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그 후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다가 잘 받들었으니 때에 37세이었다. 그해에 벼슬은 의정부(議政府)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가 되어 법률을 제정하는데 관여하고 세종 26년(1444)에 함길도(咸吉道) 도순찰사(都巡察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임지에서 활약하시는데 어머님께서 병환이 위중하니 “속히 올라와서 어머니를 뵈어라.”라고 왕이 친서를 보냈으니 그때가 38세인 3월 19일 이었다.
세종 27년(1445)에는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으며 세종 28년(1446)에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상(喪)에 국장도감판관(國葬都監判官)이 되어 능실제도(陵室制度)를 관장하여 다스리는데 탁월한 재능을 인증 받아 세종대왕께서 유용지재(有用之材:가히 쓸만한 재목)라 칭찬하셨음이 왕조실록 세조 권41에 실려 있다. 
그 이듬해인 세종 29년(1447)에 중시(重試:10년에 한번씩 이루어짐)에 합격하니 출세의 기반이 더욱 튼튼하게 다져진 셈이다. 세종 31년 12월 26일에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制敎)로 승진했으며 세종 32년에는 의주축성종사관(義州築城從事官)으로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공(公)을 천거하니 세종대왕이 말씀하시기를 "내 일찍이 정식(鄭軾)의 사람됨이 질실(質實)함을 아니 가히 맡길만 하다"하고 윤허하니 의주로 나가 읍성과 행성을 완성하였다. 다시 평안함길도(平安咸吉道) 도체찰사종사관(都體察使從事官)이 되어 북쪽 땅을 지키는데 왕이 2차로 친서를 보냈으니 “모친의 병이 위중하니 속히 올라오라.” 하셨으니 이때가 세종 32년 9월 3일이었다. 이처럼 두 차례나 왕의 은혜를 입었으니 대왕께서 얼마나 공을 총애하시고 그 효행을 가상히 여기셨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공은 곧 보문각(寶文閣)에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못하고 이 달에 어머님이 돌아가시니 이때가 세종 32년이며 44세 때의 일이었다. 어머님 상(喪)에도 아버님 상을 당했을 때와 똑같이 시묘(侍墓) 살이 3년에 얼마나 슬퍼하였는지 거의 정신을 잃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공이 어머님 상(喪)마저 마치고 다시는 영달(榮達)에 뜻이 없어 조정에서 여러 번 부름에도 응하지 아니하다가 부득이 나아가니 단종 원년(1453)이었고 벼슬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이었으나 수양대군의 뜻에 거슬린바 있었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파로 몰려 계유정란(癸酉靖란)이 일어난 후의 인사에서 전농시윤(典農寺尹)으로 좌천되고 단종1년 12월에 중훈대부(中訓大夫) 보성군사(寶城郡事) 겸권농병마단련사(兼勸農兵馬團鍊使)가 되어 외직(外職)으로 나가게 되었다. 
임지에 가서 보니 이곳은 해변인데 사람들이 학문을 멀리함으로 공이 군내의 유능한 자제들을 선발하여 매월 1일에 향교에 모여 강론하고 엄하게 과업(課業)을 권하니 3년 만에 학문이 크게 성하였고 또 가난한 백성들을 아끼고 도와주며 고로(故老:많은 경험을 쌓아 옛일을 두루 아는 늙은이)들에게 물어 오래된 폐습(弊習)을 고쳐갔으며 자기의 사재를 털어 굶주리는 백성을 먹이고 근검(勤儉)을 가르치는 등 선정을 베푸니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관찰사(觀察使)는 연이어 공의 선정(善政)을 왕에게 올리니 실로 탁무문옹(卓戊文翁:漢나라의 정치가 및 대학자들)과 같은 선정이었다. 이곳에서 3년째인 세조 3년(1457) 8월 14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어 내직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말 한필과 돌솥 1개를 하사받았다. 세조 5년(1459)엔 통정대부승정원우승지(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가되고 이해 6월 3일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으며 이어서 가선대부(嘉善大夫) 함길도 관찰사(咸吉道 觀察使) 겸함흥부윤(兼咸興府尹)이 되었다. 재임시(在任時)에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북쪽의 야인들을 잘 막아내니 이듬해 9월에는 특령(特令)으로 내관 이존(李存)을 보내 주연을 베풀고 비단옷 1벌을 하사받았으니 어찌 신하로서의 큰 영광이 아니겠는가 이 해에 모련위야인(毛憐衛野人)을 정벌한 군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資)되었음이 왕조실록에 기록되었으며 이듬해 4월에는 공의 북정(北征)시의 공훈에 의해 사패지(賜牌地)로 금성북 30리의 땅을 이후 자손들까지 영세토록 소유하라는 대은전을 내리시었다. 
이어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되고 곧 자헌대부(資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으니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이다. 이 때에 법을 엄수하여 법 앞에 상하 구분이 없었으며 곤란한 백성에게 직업을 주는 등 선정을펴서 서울 일원의 부정을 크게 다스렸다. 이듬해인 세조 8년(1462)에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경상좌도(慶尙左道)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되어서는 요로(要路)에 관절(關節:뇌물)이 통하지 않고 오랜 폐단을 고쳐나가니 장덕위인(長德偉人)이라 칭찬하였다. 이에 왕의 신임은 더욱 두터웠으며 이듬해인 세조 9년에는 록봉(祿俸)으로 제삼과이백구십석(第三科貳佰九拾石)을 내렸고 세조 10년 9월 8일에는 경상전라군적사(慶尙全羅軍籍使)가 되었으며 내구마(內廐馬) 한필을 하사받았다. 이 무렵 온천에 왕을 모시었을 때 행궁(行宮)에 불이 나서 백관이 경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공이 홀로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임금을 등에 모시고 나오니 수염이 타고 옷이 타고 신발까지 탔다. 
이때야말로 내 몸을 버리고 왕만을 구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왕은 직석에서 화공을 불러 왕을 모시고 불 속을 헤쳐 나온 그대로를 그리라고 명령했으나 공이 너무 황공스럽게 생각하고 사양하니 그러면 나를 업지 않은 영정을 그리라하여 지금과 같은 영정을 그리게 했으니 영세불후(永世不朽)의 공적이었다. 공은 귀히될 수록 몸가짐을 삼가며 자꾸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아뢰었으나 왕의 두터운 신임 때문에 허락되지 않다가 세조 13년 초에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추부판사 (中樞府判事)가 되었으니 이조 초기의 군사제도 확립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 해(1467) 3월10일에 졸하니 향년 61세이었다. 왕은 놀라며 애도하고 조정을 파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와 예장(禮葬)을 하니 장지는 나주시 다시면 백룡산이다. 곧 시호를 내리니 경무(景武)이다. 그뜻은 “의(義)로서 구하니 경(景)이요 성품이 강직하여 진실하게 다스리니 무(武)라 했다.”공이 돌아가시니 보한재(保閒齋) 신숙주(申叔舟)선생이 만사(輓詞)를 읊었으니 시제(詩題)는 호 정판서형 상견 빈염 유감(護鄭判書兄喪見殯殮有感)이니 그 뜻은 정판서(鄭判書) 형의 죽음에 당하여 염하는 것을 보며 느낌 있어 읊다이다. 위의 시의 한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영웅개관사환료(英雄蓋棺事還了)요 육십일년공수귀(六十一年空手歸)”니 뜻은 다음과 같다. “영웅도 관을 덮으면 일은 모두 끝나는 것 61세에 빈손으로 돌아가네” 이다. 숙종 19년(1693)에 설재서원에 배향되고 고종 5년(1868)에 논산군 노성면 화곡리(論山郡 魯城面 禾谷里)에 영당을짓고 여기에도 모시었다. 
배(配)는 정부인 여흥민씨 판봉상시(判奉常寺) 병각(屛角)의 여요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왕승도(王承道)의 외손이다. 1월 28일 졸하니 묘는 월청동(月淸洞) 남록(南麓) 간좌(艮坐) 유갈(有碣)이다.

경무공의 영정
경무공의 교지

十世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휘(諱) 승현(承賢)(1428~1508)81
자는 희성(希聖) 조봉대부 사헌부감찰(朝奉大夫司憲府監察) 조산대부행 재용감주부(朝散大夫行齋用監主簿) 세종 무신생 중종 무진졸 묘는 백용산 동록 계좌 쌍조 유갈·배(配) 령인 진주하씨(令人晋州河氏) 종묘서령(宗廟署令) 제명(悌明)의 여이며 영의정(領議政) 문효공(文孝公) 연(演)의 손이며 좌의정 자종(自宗)의 증손이다. 기(忌) 3월3일 묘재 진주(晋州) 유일녀(有一女)· 배(配) 령인 서산정씨(令人瑞山鄭氏) 사정(司正) 계획(繼獲)의 여이며 호판(戶判) 순(珣)의 손 판서달한(判書達漢)의 증손 집의(執義) 유부(柳溥)의 외손이다. 세종 을묘생(1435) 성종임진졸(1472) 향년 38세 生 二男二女
배(配) 령인 신천강씨(令人信川康氏) 신천군(信川君) 곤(袞)의 여요 찬성 생경(生慶)의 손 판서(判書) 득화(得和)의 증손이다. 기(忌) 1월 15일 
※묘는 월청동 임좌 유갈

년보(年譜)
세조 5년 기묘(1459) 풍저창(豊儲倉) 록사(錄事)
※ 풍저창 : 고려 충렬왕 때 우창(右倉)을 고친 이름 : 왕실에서 쓰는 곡식을 맡은 관청.
이조초(李朝初)에도 두었다가 장흥고와 합침.
1월 일 천장사랑(遷將仕郞) 풍저창(豊儲倉) 록전사(錄典事)
세조 9년 계미(1463) 1월 천통사랑(遷通仕郞) 수전생서(守典牲署)
※ 전생서 : 이조 때 제향에 쓸 양, 돼지 등을 기르는 일을 맡던 관청(초기부터 고종 31년까지 지속됨)
세조 11년 을유 1월 4일 천선무랑 사헌부감찰(遷宣務郞司憲府監察)
세조 13년 정해 1월 일 천승의랑(遷承議郞) 행풍저창(行豊儲倉) 주부(主簿)(이해에 경무공졸)
성종 7년(병신) 11월 17일 승조봉대부(陞朝奉大夫) 행사포서사포(行司圃署司圃)
※ 사포서 : 이조 때 궁중의 원포(園圃) 채소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성종 10년 기해 3월 15일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사헌부감찰(行司憲府監察) 12월23일 행제용감주부(行濟用監主簿)
※ 제용감 : 이조 때의 관청. 모시 피물(皮物), 마포, 인삼의 진헌 및 의복과 사(紗), 나(羅), 능(綾), 단(緞)등의 사여(賜與)와 포화(布貨)의 염직(染織)등을 맡아보았다.
성종 12년 신축 5월 21일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제용감주부(行濟用監主簿)

十一世 관(觀)(1464~1511)48
자는 원빈(元賓) 감찰공 승현의 자(承賢의 子) 세조 갑신생 중종 신미 10월 11일 졸 관(官)은 증계공랑사섬시직장(贈啓功郞司贍寺直長) : 선조 23년(경인) 변무(卞誣)로 추은(推恩)묘는 백룡산 서록 증조고 묘하 임좌 배(配) 안인(安人) 함양박씨 교수(敎授) 현몽(玄蒙)의 여 문과 평(枰)의 손 좌령산원(左領散員) 득지(得止)의 증손 성종경인생(1470) 중종 을해(1515) 3월 21일 졸 향년 46
묘는 쌍조 유갈(有碣)

十二世 효조(孝祖) 행장(行狀)(1482~1540)59
공의 휘는 효조(孝祖) 자는 원지(遠之) 호는 금주(錦洲)이다. 경무공의 증손이며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 관(觀)의 자이니 비()는 안인함양박씨(安人咸陽朴氏) 교수 현몽(玄蒙)의 여이다.성종 임인 2월 10일생이니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기상이 엄중하며 큰 뜻을 품으니 지모(智謀)와 용략(勇略)이 뛰어나고 문무에 능하여 시인(時人)이 장상(將相)의 그릇이라 칭찬하였다. 연산 갑자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중종 병인(1506) 무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거쳐 함경도북병마절도사(咸鏡道北兵馬節度使)에 이르렀으나 권귀(權貴)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중종 경자 8월 17일 졸하니 향년 59이다. 유녀(有女) 무자(無子)하니 그의 아우 주부공(主簿公) 염조(念祖)의 자(子) 눌(訥)로 뒤를 이었다.공은 증정헌대부병조판서(贈正憲大夫兵曹判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오위도총부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이다. 교지(敎旨)는 병화에 유실되었으니 신적(信蹟)은 읍지(邑誌)와 호적(戶籍)이다. 묘는 나주시 운곡동 석교촌 후록 계현(鷄峴) 건좌(乾坐)이다. 옛 비석이 있었으나 글씨가 마멸되었기에 개수(改竪)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함양노씨이며 부(父)는 병마사(兵馬使) 정남(程南)이며 성종 임인(1482) 9월 7일생에 중종정축(1517)에 졸하니 향년 36이고 묘는 쌍조이다. · 배(配) 정부인 양성이씨(貞夫人陽城李氏)니 부(父)는 동지(同知) 의장(義章)이다. 연산 신유(1501) 12월 26일생이며 명종임술(1562) 2월 2일 졸하니 향년 62이고 묘는 석교촌서(石橋村西) 고산동(高山洞) 판도공(版圖公) 묘하(墓下) 곤좌(坤坐)이다.

十二世 주부공(主簿公) 염조(念祖) 행장(1486~1571)86
자는 술지(述之) 호는 사례당(思禮堂) 관은 증선무랑 사섬시주부(贈宣務郞司贍寺主簿)이니 선조 23년(경인)에 변무(卞誣)로 추은(推恩). 고(考)는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 관(觀)이며 비()는 안인함양박씨(安人咸陽朴氏) 교수(敎授) 현몽(玄蒙)의 여(女)이다. 공은 성종 병오생이니 성품이 꾸밈이 없고 성실했으며 주자학을 연구하여 학식이 정명(精明)하고 시례(詩禮)는 세업(世業)이요 효는 증민(曾閔)을 본받았다.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요 행실은 사물지칙(四勿之則: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에서 벗어남이 없었으니이름 그대로 큰 선비의 가문이었으니 비단 한 집안뿐 아니라 향당(鄕黨)에서 모두 본받았다. 부모님을 오래도록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공이 26세 때 부친이, 30세 때 모친이 각각 별세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전후 6년을 여묘(廬墓)를 살았으며 시인(時人)이 그 집을 사례당(思禮堂)이라 했다. 그 여막(廬幕)에 수시로 내왕하며 염천한설(炎天寒雪)이라도 성묘를하며 정성스럽게 산림과 묘역(墓域)을 가꾸니 누가 감히 산림을 훼손하려들지 못하였다. 이처럼 구목(丘木=墓木)을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부모님과 선영의 은덕을 추모하였다. 부모님 상(喪)에 너무 젊을 때라 예(禮)를 갖추지 못했음을 종신토록 후회하며 늘 삼자(三子)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절대로 장사(葬事)를 후(厚)히 하지 말라.” 하였으니 부모님 사후에까지 부모에 대한 효의 정신을 짐작케 한다. 
명종 계해(1563)에 참봉 벼슬이 내려지고 선조 신미(1571) 2월 24일에 졸하니 수(壽)는 86이다. 
장남(訥)은 과거를 포기하고 부모님을 섬겼으니 집안이 비록 넉넉지 못했으나 잘 받들었으며 차이남(次二男 : 諶, 詳)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으니 인근에서 이르기를 평소에 적선(積善)하더니 이처럼 영화를 본다고 입을 모아 부러워했다. 묘는 다시면 운봉리 백룡산 감찰공(監察公) 묘하(墓下) 해좌(亥坐)이다. · 배(配)는 의인 경주이씨(宜人慶州李氏) 기묘명현(己卯) 명현(名賢) 해(蟹)의 여(女)이고 훈도(訓導) 석(碩)의 손이며 성균진사(成均進士) 극근(克勤)의 증손 교수 두평(斗平)의 현손 수의부위(修義副尉), 하동 정승서(河東鄭承)의 외손이다. 성종 을사(1485) 7월 4일생이요 명종 무오(1558) 5월 16일 졸하니 향년 74세이며 묘는 합조(合兆) 유갈(有碣).

十三世 묵재공(默齋公) 눌(訥) 행장(行狀)(1504~1548)45
공의 휘는 눌(訥) 자는 경여(景汝) 호는 묵재(默齋)이고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문인이다. 경무공의 현손이며 주부공(主簿公) 염조(念祖)의 장자인데 출계 백부하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온화하며 순수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스럽게 지체(志體)를 받드니 시인(時人)이 탄복하여 오! 정생(鄭生)이여! 하늘이 낸 효(孝)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했다. 따라서 문정공과 경무공의 후예로서 사례당(思禮堂:휘 염조(念祖))과 묵재공(默齋公:휘 눌(訥))의 효가 있으니 가위(可謂) 충효상전(忠孝相傳)이라 했다. 아우인 일헌(逸軒:諶)과 창주(滄洲:詳)와 더불어 효경(孝經) 및 출사표(出師表)를 강론하며 이르기를 충효와 시례(詩禮) 세업(世業)의 정훈(庭訓)을 이어받아 사친(事親)을 증자(曾子), 사군(事君)은 무후(武候:제갈 량)처럼 해야 진정 효와 충이라 했다. 학행(學行)으로 숭인전참봉(崇仁殿參奉)이 제수되고 후에 나주도훈장(羅州都訓長)이 되어 후학(後學)들에게 학업을 권장하면서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고 기강(紀綱)을 바로잡으며 옥석(玉石)을 가리니 상대방이 시기한바 되었는데 이 때 향교 앞에 있던 은행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니 이것으로 제기(祭器)를 만들었더니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다. 이 무렵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는데 종묘서령(宗廟署令)의 임명에도 부임하지 않으니 정순붕(鄭順朋)의 탄핵을 받아 경상도 함양(咸陽)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슬하의 자녀가 모두 어린데 슬피 울며 뒤를 따랐으니 온 집안이 타향길 변방으로 옮기게 되어 조상의 제사를 적소(謫所:귀양살이 하는 곳)에서 모실 수 없어서 중제(仲弟)인 일헌공(逸軒公)이 선영을 받들게 되었다. 공은 자녀에게 유언하되 “향사(鄕事)에 참여하지 말고 남의 시기함을 조심하라.”하였다. 선영을 받들지 못한 한(恨)과 부모님을 앞서가는 불효(不孝)를 저지르며 관(棺)으로 돌아오니 비록 혼백이라도 어찌 가슴이 메이지 안했으랴! 그러나 반장(返葬)함은 당연한 이치이니 이 원한을 현사제(賢舍弟) 정랑(正郞) 서천(舒川)에게 전하면 이 백골의 원한을 풀어 주리라 하였다. 묘지는 새로운 산을 택했으니 나주북문외(羅州北門外) 마안치(馬鞍峙) 동향원(東向原)이다. 
연산 갑자(1504) 7월 9일생이요 명종 무신(明宗 戊申) 3월 13일 졸하니 향년 45이다.
배(配)는 유인창녕성씨이며 부(父)는 참봉 수재(壽載) 조(祖)는 장령(掌令)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관(觀)이며 증조(曾祖)는 문장(文壯) 전한(典翰) 진(晋), 화천부원군(花泉府院君)대용(大庸)의 7세손이다. 
연산 임술(1502) 9월 7일생이요 선조 임신(1572) 5월 11일 졸하니 향년 71세이며 묘는 쌍조(雙兆)이다.

※ 을사사화(乙巳士禍:1545)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화로서 소윤(小尹)이 대윤(大尹)을몰아낸 사건. 
이 때 정순봉(鄭順朋:鵬, 明)이 소윤의 두목인 윤원형(尹元衡)과 짜고 대윤 일파를 죽이고 그 후 다시 전라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빙자하여 을사사화의 여당(餘黨)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제거했다.(기미사화)

※ 김정국(金正國)(1485~1541)57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의성(義城). 김안국(金安國)의 동생. 1509년에 문과 급제하여 관찰사에 이르렀다.
기묘사화로 퇴관(退官)하고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업하니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사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峰書阮)과 임강서원(臨江書阮)에 배향되었다.

十三世 일헌공(逸軒公) 행장(行狀)(1520~1602)83
공의 휘는 심(諶)이요 자는 중실(仲實)이며 일헌(逸軒)은 그 호이다. 나주정씨니 시조(始祖)의휘는 해(諧)이고, 추봉군기감(追封軍器監)이며 삼전(三傳)하여 휘 가신(可臣)은 호가 설재(雪齋)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이다. 공과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金周鼎), 문현공 윤보(文顯公 尹珤)로 강도지교(講道之交)를하니 문학과 행의(行誼)가 아울러 후세에까지 크게 빛이 났다. 
이로부터 가문(家門)이 이어서 번창하니 오전(五傳)하여 휘 식(軾)은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요 삼전(三傳)하여 휘 염조(念祖)는 호는 사례당(思禮堂)이며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이니 고(考)이며 비()는 경주이씨 기묘명현(己卯名賢) 모산(茅山) 해(蟹)의 여이다. 중종(中宗) 경진(庚辰)에 낳으니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말을 배우면서부터 문자를 해득하였다. 9세 때 관찰사가 고을을 순찰하면서 선비들을 모아 글재주를 시험하는데 공이 응하여 상으로 뽑히니 보는 이 마다 기특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어 장래가 크게 촉망된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1552년 33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1568년 49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을 거쳐서 호조정랑이 되었을 때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와 계시다가 그 해 가을에 다시 이조정랑이 제수(除授)되니 부모의 명에 따라 출사(出仕)하였는데 수일이 못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다. 
“中流矢棹에 南北이 誰先고 谷口鞭驢하니 故逕依然이라” “물 가운데서 노를 잃었으니 남북중 어느 곳을 먼저 할까 곡구에 노새를 모니 옛길이 의연쿠나”오직 어버이를 모시고자 벼슬을 버렸으며 성품이 맑고 고아서 수석을 좋아하여 시내(溪)의 동쪽 경치 좋은 곳을 가려 조그마한 정자를 지으니 화수(花樹)가 줄지어 이어지고 송죽이 교취(交翠)하니 날마다 이곳에서 글을 읊으며 “내가 고향에 돌아옴은 세상을 피함이 아니오 성품이 본디 임천(林泉)을 좋아하여 흥치(興致)가 유연히 이는데 어느 누가 나의 어깨 잡으랴”하였고 또 밝히되 “일옹(逸翁)이 금성(錦城)에 돌아옴은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이니 공을 세우려고 기필하지 않고 이름도 떨치기를 바라지 않네”라고 읊었다. 공이 스스로를 일옹(逸翁)이라 한 것도 자연을 즐기며 소요자적(消遙自適)하던 성품의 표현이라 하겠으니 공이얼마나 겸양하며 세태에 초연(超然)한 고상한 인품인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공이 평생에 이르기를 “재주와 덕이 없어 세상을 바로잡는데 쓰이지 못하고 재리에 뜻이 없어 집안도 돌보지 못했으며 이름과 절개가 없어 백성을 선도하는데 모범을 보이지도 못했고 용맹과 지혜가 없어 앞장서서 나라를 구하지도 못했으며 기교(奇巧)와 속임수도 몰라 내몸을지키고자 꾀하지도 않았다”라고 술회(述懷)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목사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선생과 창의할 것을 의논하였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장군이 처음의병을 일으키면서 공에게 고하니 즉시 의청(義廳)으로 달려가 피를 마시고 명세했으니 이 사실이 장계곡(張谿谷) 유(維)와 강수은(姜睡隱) 항(沆)의 문집에 실려 있으며 재조번방지(再造藩邦誌:임진란에 관한 기록)와 김천일 장군의 묘정비(廟庭碑)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카인 여린(如麟)을 전쟁터에 보내며 “송이원문거(送爾轅門去)”라는시를 지었고 고재봉(高齋峯:敬命)선생에게도 격려하는 글을 보냈으니 글의 뜻은 대략 다음과같다. 
“종묘와 사직이 재가 되어 선왕(先王)이 의탁할 바를 잃었고 죄 없는 백성이 도탄에 빠져 통곡하니 어찌할꼬! 천정을 바라보며 탄식한들 소용없고 손을 묶고 묘책이 없으니 후회막급이로다. 오늘날의 우리의 책무(責務)는 오직 각기 의로움을 떨치는 데 있으니 가히기대하고 권할 바는 없으나 발은 위급한데에 이르지 못해도 배고파도 먹을 것을 생각할 겨를없이 급히 적을 막아내야 하니 기회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는 글 뜻이 어찌나 격렬한지 듣는사람마다 감동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의분에 떨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때에 공은 73세의 고령이었다. 
공은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근심하며 분하여 먹을 것을 잊고 허공을 바라보며두보(杜甫)의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의 글을 외었으며 왕의 파천(播遷)에 호종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붓을 들 때마다 내 목숨만 아낀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였다. 그외에도 척화(斥和) 시와 두죽(豆粥) 시(詩) 등을 살펴볼 때 공의 기절(氣節)을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절도사(節度使) 최경회(崔慶會)가 진주에서 전사하니 글을 지어 조위하고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이 화친을 주장한다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오적가(賊歌:적을 무찌르자는 글)를 지었다. 선조 임인 4월 24일 졸하니 향년 83이다.묘는 광산구 돈목동의 간좌(艮坐)이다. 
배(配)는 광산 김씨 참봉 반(攀)의 여이며 생졸(生卒)은 기록이 없고 묘는 쌍조(雙兆)이다. 유고(遺稿)는 병화(兵火)에 잃고 거의전하지 않으니 만년(晩年)의 글과 과제(科製:과거 때 지은 글) 약간편이 있다. 
영조 을해(1755)에 설재서원에 배향되었다. 3남을 두었으니 여해(如海)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이요여한(如漢)은 장사랑(將仕郞), 여하(如河)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다. 진사(進士) 혼(渾), 생원(生員) 미(渼), 참의(參議) 란(瀾)은 병자호란에 창의하니 공의 손(孫)이요 현손(玄孫)지중(之中)은 어모장군겸선전관이며 비(備)는 진사 6대손 성()은 생원 7대손 태운(泰運)은 진사 용운(龍運)은 학행(學行)으로 익운(翊運)은 효행으로 대운(大運)은 고가풍(古家風)이 있었고 8대손 기호(基灝)은 종사(宗祀)를 주관하고 기설(基說)은 지극한 효성으로 알려졌으니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먼저 나공형규가(羅公炯奎) 공의 행장을 썼으니 나공은 일찍이나의 종조 도암(陶菴) 문정(文正)선생 문하에서 놀았다. 그의 글로 가히 증거가 되나 지금부터 200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문헌이 인멸하여 전해옴이 적어서 뒤에 사책(史冊)에서 약간의 기록을 얻었을 뿐이다. 대운(大運)의 자(子) 기주(基宙)가 가장(家藏)의 기록을 가져와서 글을 청하니 돌아 보건데 우매하여 어찌 능히 감당 하리오 마는 삼가 듣건데 공의 효성과 문장이 세상에 울렸으니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동이 반드시 많이 보일 텐데 어찌하여 전하지 못하고 다시 상고할 수 없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공의 충의의 정신이 확고하고 또한 공의손(孫) 란(瀾)이 병자호란에 창의 종군하니 이로써 가히 공의 유훈이 없어지지 않음이라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로다. 
아! 위대하여라 이에 삼가 나공(羅公)의 지은바 글에 의해서 썼으니후세에 모범이 되게 지을 자에게 혹시나 택할 점이 있을까 한다. 순조(純祖) 칠년(1807) 동짓달 하순 삼주(三州) 이광헌(李光憲) 근찬(謹撰)(남평현감) 

十三世 창주공(滄州公) 행장(1533~1609)
내 일찍이 고려사열전에서 삼가 문정공을 살폈으니 선생의 휘는 가신(可臣)으로 도학문장이 실로 백세의 스승이라 손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지어 고금 백왕(百王)의 거울로 삼게하여 만세도록 지키고 본받아야 할 법정(法程)이 되었다. 일찍이 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갔을때 화인(華人)들은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칭찬했으니 나주정씨의 중시조이며 공의 9대조이다.공의 휘는 상(詳)이요 자는 중신(仲愼)이니 창주(滄州)는 호이다. 조(祖)의 휘는 관(觀)이니 직장(直長)이오 증조의 휘는 승현(承賢)이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고조의 휘는 식(軾)이니 세종조에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거쳐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니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이후 고관대작이 집안에 이어져 사기(史記)에 기록이 끊이지 않았다. 고(考)의 휘는 염조(念祖)니 학행으로 참봉을 제수 받았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조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부모상(喪)에 여묘(廬墓)를 사니 시인(時人)이 그 여막(廬幕)을 사례당(思禮堂)이라 하였기에 호가 사례당(思禮堂)이 되었다. 비()는 경주이씨 기묘명현(己卯名賢) 모산(茅山) 해(蟹)의 여이다. 3남을 낳았으니 공은 셋째이다. 장(長)은 묵헌(軒)이고 차(次)에 일헌(逸軒)이니 모두 충효의 정신을 이었으며 시례(詩禮)는 가학(家學)이었다. 중종 계사에 낳고 열심히 공부했으니 등불로 밤을 세워 방안의 네 벽이 연기에 그을려 옷칠을 한 것 같았으며 인근의 어른들이 놀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성품이 엄숙하고 의지가 굳었으며 위엄이 태산 같으니 거동이 무거워 그 심중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평상시에 옆에서 행동을 칭찬하면 내가 아니라 우리 형님들이라 하고 진실로 학문을 깊이 있게 강론(講論)하는 자리에서는 정통한 학설로 누구에게도 양보함이 없었으니 이로써 공의 지(智) 인(仁) 용(勇)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성하면서 학문이 더욱 정밀하고 깊숙해지니 교유(交遊)하는 분이 모두 당시의 명석(名碩)으로 수은(睡隱) 강항(姜沆)과 계곡(谿谷) 장유(張維)와도 도의의 사귐이 되었다. 선조 갑술(1574)에 문과에 장원하여 봉정대부(奉正大夫) 행형조정랑(行刑曹正郞) 겸춘추관기주관(兼春秋記注官) 동학교수(東學敎授)에 이르고 단성(丹城) 남평(南平) 무주(茂朱) 서천(舒川) 창평(昌平) 등의 원님이 되어 크게 치적을 남기었고 특히 서천군수 때는 그 덕을 암벽에 새기고 오래도록 칭송했다. 철원부사 교지는 공이 별세하시고 상여가 뜰 때에 도착했다고 전해진다. 
선조 22년 기축(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경인(1590)에 옥사(獄事)가 벌어지니 이에 연루된 오현(五賢:東菴李潑, 南溪李沽, 淸溪柳夢井, 鼎谷曺大中, 困齋鄭介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가 같은 파당을 위한 짓이라고 의심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동여울위(莎洞灘上)에 정자를 짓고 솔진회(率眞會)를 만들어 당시의 석학들과 학문을 강론하며 후학을 길렀으니 문하에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능양학사(陵陽學士) 정화(鄭화)는 이르기를 “선생이 벼슬 버리기를 헌신짝 같이 하고 사방의 선비들이 큰 산 큰 별처럼 우러르며 따랐다.”고 했으니 당시 사림(士林)들의 공을 높이고 존중함이 이와 같았다. 
임지왜란을 당하니 공은 60세이었다. 공이 전란을 걱정하고 분개하여 먹을 것을 잊고 이르기를 “내 집은 대대로 국은을 입었는데 사직의 안위가 조석에 달렸거늘 어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으리오” 하며 아픈 몸을 이끌고 충무공진으로 달려갔는데 때에 적은 강하고 아군은 약세이었다. 공이 충무공에게 이르기를 “호남은 지리적 위치로 보아 국가의 근본이며 군사의 요충지이니 먼저 이 곳을 지켜야하오”라고 했으니 곧 약무호남(若無湖南)이면 시무국가(是無國家)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충무공도 그 말을 옳다 여기고 이에 따랐다. 
이후 한산진에서 진주로 향하여 병사 최경회(兵使 崔慶會)와 더불어 영호남 합세의 전략을 도모했고 또 남원에 이르러 양대박(梁大樸)과 전략을 도모하며 격문(檄文)을 띄워 군병과 동지를 모으는 도중에 병환으로 부득히 귀가하여 제2자 여린(如麟)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이 아비를 대신해서 나가 싸워서 국은에 보답하라.”하며 충무공진으로 군량미 16섬과 말먹이콩 10섬을 실어 보내고 서한도 한통 보냈으니 그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지난번에 사퇴 후로 병이 더욱 심하여 다시 전장에 나가지 못하니 국은을 등진 죄를 어찌 피할 수 있으리오. 나를 대신하여 자식을 휘하로 보냅니다.”라고 했다. 충무공이 답서하기를 “많은 군량미를 보내고 또 용맹한 자제(子弟)까지 보내니 한 팔을 더 얻은 것 같으오.”라고 했다. 그 후 충무공이 노량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사를 지어 영혼을 위로했는데 그 글과 격문(檄文)등을 살펴볼 때 탁월한 문장력으로 분충살신의 정신을 일깨운 공은 용병과 전술은 비록 충무공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조국수호의 충성심을 널리 선양(宣揚)한 정신은 충무공에게 내리지 않았으니 공을 아는 이는 충무공만한 이가 없고 충무공을 아는 사람도 공만한 이가 없다 할 것이다. 
광해원년 6월 4일에 졸하니 향년 77세이다. 이 때 수은(睡隱)과 계곡(谿谷)이 모두 시(詩)로서 애도했다. 
장지는 백룡산 안산(案山) 사좌(巳坐)이다. 정조 기미(1799)에 나주시의 다시면 보산사(寶山祠)에 배향되고 그 후 설재서원에도 배향되었다. · 배(配)는 숙부인 고성이씨 습독(習讀) 각(慤)의 여요 감사절(節)의 현손이다. 
중종 신묘(1531)에 낳고 광해 임자(1612)에 졸하니 수(壽)는 82이며 묘는 합조(合兆)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여룡(如龍), 은 통덕랑(通德郞) 차남 여린(如麟)은 임진왜란, 갑자 괄(适)란, 정묘호란의 3란 공신이며 경원 도호부사와 용천방어사(龍川防禦使)등을 지냈으며 3남 여봉(如鳳), 도 통덕랑(通德郞) 4남 여구(如龜)니 종사랑(從仕郞) 연은 전참봉(延恩 殿參奉)이다. 여(女)는 파주염공달(坡州廉公達)에게 시집갔으니 진사이었다. 손증(孫曾)은 내외(內外) 오십여 명이나 된다. 오호라 공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학문이 정통(精通)하니 가위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인데 자리는 덕(德)에 미치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솔진회(率眞會)를 설치하여 석학(碩學)들이 모여 강론(講論)하면서 더욱 깊이 깨닫고 후학을 권진(勸進)하며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잊고 살았으니 운림(雲林)의 락(樂)이 오히려 벼슬길의 풍파보다 낫지 않았을까 선생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이 지금껏 인근향리(隣近鄕里)에 구비(口碑)로 풍성하게 전해오니 가히 백세토록 본받을만하다. 후손인 지호(志浩)가 공의 글과 유집(遺集)을 가져와 나에게 글을 청하니 사양치 못하고 간략히 정리하여 기록했으니 후일 뜻있는 군자의 선택을 바란다.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겸춘추관수찬(兼春秋館修撰) 
풍산(豊山) 홍명주(洪命周) 근찬(謹撰)

연보(年譜)
선조 7년 감술(1574) 문과 장원
선조 8년(1575) 8월 제단성현감(除丹城縣監)
″ 9월 천봉상시주부(遷奉常寺主簿)
″ 10월 선무랑출수남평현감(宣務郞出守南平縣監)
선조 11년(1578) 8월 5일 선무랑수성균관전적겸동학교수(宣務郞守成均館典籍兼東學敎授)
선조 12년(1579) 11월 천승훈랑행무주현감(遷承訓郞行茂朱縣監)
선조 16년(1583) 2월 12일 승훈랑행형조좌랑(承訓郞行刑曹佐郞)
선조 18년(1585) 9월 봉직랑수서천군수(奉直郞守舒川郡守)
선조 19년(1586) 1월 승통선랑수서천군수(陞通善郞守舒川郡守)
선조 20년(1587) 11월 통선랑행창평현감(通善郞行昌平縣監)
선조 23년(1590) 6월 7일 진용교위행충무위부사용(振勇校威行忠武衛副司勇) (故 昞宇氏 보관)
선조 24년(1591) 3월 20일 승봉직대부행공주교수겸제독속교관
(陞奉直大夫行公州敎授兼提督屬校官) (故 昞宇氏 보관)
선조 25년(1592) 3월 25일 봉정대부행형조정랑춘추관 기주관(奉正大夫行刑曹正郞春秋館 記注官)


十二世 언조(諺祖)(1501~1585)85
자는 후지(厚之) 호는 사의당(思義堂)이며 증통훈대부(贈通訓大夫) 행사헌부지평(行司憲府持平)이다.
첫 벼슬로 중종계미(1523)에 부사용(副司勇)이 되고 병술(1526)에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 경인(1530)에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이 되었다. 천성이 순수하고 강직하며 학행(學行) 일치하고 경제(經濟)도 넉넉했다. 중종임진(1532)에 처음으로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고절리(高節里)에 이사해 살며 정자를 지어 취옹정(醉翁亭)이라 하니 유림(儒林)의 종장(宗匠) 문경공(文敬公) 모재(慕齋) 김선생이 와서 술을 마시며 취옹정(醉翁亭) 증시(贈詩)가 있고 또 이택당(李澤堂集)에도 서로 화답하는 시(詩)가 실려있다. 묘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고백리 후록 분토곡 간좌 쌍분이고 배(配)는 숙인(淑人) 남양홍씨 득인(得仁)의 여(女)이다.연산 임술생(1502)이며 8월 12일에 졸하다.

十三世 고(誥)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이니 처음 휘는 호(浩) 
자는 중겸(仲謙) 호는 사우당(四友堂)
일찍이 학문을 이루었으나 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산야(山野)에 은거하여 송(松), 국(菊), 매(梅), 류(柳)로 벗을 삼으며 사우당(四友堂)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묘는 광산구 본량면 능곡오좌이다. 
배(配)는 숙부인 안성김씨(安城金氏) 진사(進仕) 안의(安義)의 여(女)이며 묘는 합조(合兆)이다.

十一世 휘는 근(覲)
초휘(初諱)는 치성(致誠) 자는 성지(省之)이고 벼슬은 계공랑(啓功郞) 정릉참봉(定陵參奉)이다.
묘(墓)는 병화(兵火)로 실전(失傳)하니 후인이 전하기를 성북(城北) 1里 쯤에 은방축상(隱防築上)
동록(東麓)에 정참봉공(鄭參奉公) 묘(墓)가 있다고 전했다.
배(配)는 진주강씨(晉州姜氏) 묘는 위와 같다. 

十二世 휘는 균(均):(1486~1550)65
성종(成宗) 병오생이며 중종(中宗) 을유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생원(成均生員) 이었다. 
명종(明宗) 경술 8월 16일에 졸(卒)하니 묘는 곡강면(曲江面) 송림동록(松林東麓) 간좌(艮坐)에 비석이 있다.
배(配)는 나주정씨(羅州丁氏)로 갑진생(1484)이며 9월 16일 졸(卒)하니 묘는 쌍조(雙兆)이다.

十三世 휘는 이상(履常)(1523~)
자는 득이(得而) 호는 종모재(終慕齋). 중종(中宗) 계미생으로 명종을묘(1555년:33세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고비(考) 상(喪)에 려묘(廬墓) 6년을 살고 복을 마치고도 묘의 곁에 거처 하면서 조석으로 묘역을 살피고 쓸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그로인하여 과업(科業)을 폐하고 성리학을 정탐(精探)하며 돌아가신 부모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니 동리에서는 그 집을 종모(終慕)라 하니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었다. 
그 정성을 보고 후인(後人)들은 그 마을을 정시동(鄭侍洞)이라 했다. 1월 15일에 졸하니 묘는 정시동(鄭侍洞) 북쪽 갑좌에 비석이 있다. · 배(配)는 광산김씨 진사 훤(喧)의 여이고, 임오생이며 9월 23일 졸하니 묘는 합조(合兆)이다.

十一世 휘는 도(覩)(1467~1515)49
벼슬은 충순위(忠順衛), 세조 13년 정해생이며 중종 10년 을해에 졸했다. 묘는 이로(伊老)의 기곡(基谷)에 있다. · 배(配)는 반남박씨 교리 수소(守素)의 여이고 임진생(1472)이며 경진(1520)에 졸하니 향년 48세로 묘는 상동(上同).

十二世 휘는 흥조(興祖)
벼슬은 직장(直長)인데 외손봉사(外孫奉祀)하였다.



十二世 휘는 윤조(允祖)(1501~1582)82
연산군 신유생으로 선조 무자 3월20일 종하다. · 배(配)는 밀양박씨 군수 신지(信之)의 녀(女)이며 묘는 쌍조이다. 

十三世 휘는 령(齡)(1520~1582)63
초휘는 진원(振元) 자는 계령(繼令) 벼슬은 교동수사(喬洞水使)와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지냈다. 종종 경진생이요, 선조 임오 8월 16일 졸하니 묘는 남원 산동리 대치 간좌이다. 
배(配)는 숙인 경주김씨 목사 길수(吉洙)의 여(女)이며 4월 7일 졸하니 묘는 쌍조이다. 

十一世 휘는 간()
벼슬은 충순위
배(配)는 나주나씨. 12월 19일 졸하니 묘는 돈목동 선묘하(先墓下) 쌍조이다.

十二世 휘는 홍조(弘祖)
벼슬은 병절교위(秉節校尉) 행 충무위(忠武衛). 12월 3일 졸하고 묘는 상동(上同)이다.
배(配)는 여산손씨이며 1월 24일 졸하니 묘는 합폄(合)이다.

十三世 휘는 순(詢)
벼슬은 통덕랑(通德郞) 예빈시별제(禮賓寺別提)이다. 1월 21일 졸하고 묘는 화순군 화순면 압곡(鴨谷) 분산등(粉山嶝) 유좌(酉坐)에 비석 있음. · 배(配)는 숙부인 순창림씨(淳昌林氏) 대년(大年)의 여이며 7월 27일 졸하니 묘는 합조(合兆)이다.

十二世 경조(敬祖)(1552~)
명종 임자생이다. 배(配)는 나주나씨 묘는 본량면 돈목동 계좌 합조이고 배(配) 풍산홍씨 순(洵)의 여는 
참봉 한신(漢信)의 손녀로 묘는 덕복동 해좌이다.

十三世 의(誼)(1573~)
선조6년 계유생
자는 여순(汝舜) 호는 성헌(醒軒)이다. 문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임진왜란에 김건재(金健齋), 고재봉(高齋峯)과 같이 창의(倡義)했다. · 배(配)는 광산김씨 어모장군(禦侮將軍) 환(桓)의 여(女)이다. 
임진 8월 9일 졸하니 묘는 상동 합봉 하다.

十二世 학조(學祖)
자는 문명(文明) 벼슬은 승사랑(承仕郞)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이고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평택임씨 묘는 나주시 운곡동 청룡등 자좌 합조 유갈(有碣)

十三世 우()
배(配)는 문화류씨 묘는 나주 상곡면 고방산 간좌 쌍조에 상석이 있다.

충순위(忠順衛) 예빈시참봉공파(禮賓寺參奉公派) 사실(事實)

十一世 정()(1477~)

공은 시조 해(諧)로부터 11세이며 4세 중시조 설재(雪齋) 문정공(文靖公) 가신(可臣)으로부터 8세이고 9세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신 경무공(景武公) 식(軾)의 5째손자로 성종 8년 정유(丁酉)1477년생인 공의 벼슬은 충순위(忠順衛)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이시고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여흥민씨(驪興閔氏) 한성부윤(漢城府尹) 계목(啓睦)의 여(女)로 묘는 나주시 다시면 용산북록(龍山北麓)에 합조(合兆)로 조봉대부(朝奉大夫)행사헌부감찰(行 司憲府監察) 조산대부(朝散大夫) 행 재용감주부(行 齋用監 主簿)를 지내신 휘(諱) 승현(承賢)이신 고위(考位) 묘(墓) 아래 계시였으나 지형(地形)이 고산심곡(高山深谷)이라 후손(后孫)들이 천묘(遷墓)를 간원(懇願)하여 신사(辛巳) 2002년 3월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정동 산63번지 속칭 당산뫼 문산내 아들 팽조(彭祖)의 묘 상위(上位) 中央에 이장(移葬)하여 간좌(艮坐)에 합조(合兆)로 뫼시었다.

十二世 휘는 팽조(彭祖)
공은 예빈시(禮賓寺) 참봉공(參奉公)이신 정()의 아들로 출생(出生)하여 자(字)는 천령(千齡)으로 벼슬은 계공랑(啓功郞)을 지내시고 배위는 안인(安人) 해평윤씨(海平尹氏) 판돈령(判敦寧) 반(潘)의 여(女)로 묘는 광주시 광산구 지정동 속칭 모래기(慕來崎) 남록(南麓) 임좌(壬坐)에 쌍조(雙兆)로 뫼시었으나 군이 징발(徵發)하여 보전포사격장(步戰砲射擊場)으로 지정(指定) 출입이 제한되어 신축(辛丑)1961년 3월에 지정동 산63번지 당산뫼 문산 서록(西麓)에 간좌(艮坐)로 합조(合兆)하여 뫼시다.

十三世 휘는 형()
공은 팽조(彭祖)의 아들로 출생하여 휘는 형()으로 초휘(初諱)는 훈(訓)이오 자(字)는 연수(延壽) 또는 경여(景汝)요 호(號)는 둔암(遯庵)이며 벼슬은 선조(宣祖)때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菅)을 지내시다.
공(公)께서는 공직시(公職時) 성품(性品)이 맑고 밝아 조야(朝野)에서 덕망(德望)을 싸으시어 찬사(讚辭)와 칭송(稱頌)을 받으시니 시기(猜忌)하는 자들이 있어 출사(出仕)의 뜻을 저 버리고 선조(宣祖)22년 기축(己丑)1589년에 사직(辭職)하고 환향(還鄕)하여 주북 평지(州北 平地:나주의 북쪽.현 광주시 광산구 지정동 평지마을을 지칭하는 말) 마을에 정착(定着) 둔적(遁迹)하여 후학(後學)에 장진(奬進)하시던 광산구 명화동 산357의2번지를 지금까지도 유래(由來)되어 서당뫼로 불러오고 있으며 평지 마을에 예빈시 참봉공(參奉公) 후예(后裔)가 세거(世居)하여 번창(繁昌)한 집성촌(集成村)이 되도록 터전을 마련하여 주시어 평지(州北) 마을을 나주정씨 촌(村)이라고 부르기도 하다. 공의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인성(麟聲)의 여(女)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 대혁(大赫)의 손녀(孫女)이시고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정동 산206-2번지 속칭 희여치(希汝峙) 아래 죽포등(竹浦嶝) 문중산 미좌(未坐)에 합조(合兆)로 뫼시던 묘역으로 군 징발지(軍 徵發地)를 경유 출입하게 됨에 군 포사격(軍砲射擊)등의 통제(統制)를 받고 있어 이를 해소(解消)하기 위하여 문원들이 천묘를 간원함으로 석물과 같이 계미(癸未)2004년 4월 17일 위같은 지정동 산63번지 속칭 당산뫼 문산에 공의 고위(考位) 묘(墓) 동록(東麓) 아래로 이장(移葬)하여 간좌(艮坐)에 합조(合兆)로 뫼시다.

八世 휘는 자호(自浩)(1392~1451)60
초휘(初諱)는 응신(應新) 벼슬은 통덕랑(通德郞)으로 임신생(太祖元年)에 신미에 졸(文宗元年)하니 묘는 임천지곡동(林川紙谷洞) 간좌(艮坐)에 합조(合兆)이다. 배(配)는 전주이씨 신양수준(信陽守准)의 여이며 2월 6일 졸하다.

九世 휘는 헌(軒)(1444~)
초휘는 인부(仁富) 갑오생(태종14년)에 9월 22일 졸하니 묘는 임천지곡(林川紙谷)의 선조동록(先兆同麓)이다. 
배(配)는 한산이씨 현경(賢慶)의 여이며 목은(牧隱) 색(穡)의 후인데 10월 10일 졸하다.

十世 휘는 기매(耆梅)
호는 임천(林川) 정묘생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9월 15일 졸하니 묘는 서변면(西邊面) 대독동(大督洞) 을좌에 합조(合兆)이다. 배(配)는 동래정씨 자훈(自訓)의 여이며 참의 복시(復始)의 6세손이다. 
12월 2일 졸하다.

十一世 휘는 순수(淳守)
벼슬은 무과훈련원참사(武科訓練院參事)이고 12월 21일 졸하니 묘는 선고묘하(先考墓下)에 갑좌(甲坐)이다.
배(配)는 단인(端人) 경주김씨 법형(法亨)의 여이며 수은(樹隱) 충한(漢)의 후이다. 1월 20일 졸하니 묘는 부여군 남면 송학리 좌이다.

十二世 휘는 희욱(希郁)(1582~)
호는 죽천(竹泉) 선조 임오생이며 장수찰방(長水察訪)으로 증통정대부이고, 12월 29일 졸하니 묘는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지장동 신좌이다. 배(配)는 숙부인 김해김씨 희식(喜植)의 여이고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 보(普)의 후이다. 3월 14일 졸하니 묘는 합조(合兆)이고 비석이 있다. 

十三世 종립(宗立)
계묘생이며 5월 11일 졸하니 묘는 선영하 건좌이다. · 배(配)는 한산이씨 덕화(德化)의 여이며 응춘(應春)의 손이고 묘는 쌍분이다. 

十三世 흥립(興立) 
을사 3월 3일생이며 3월 7일 졸하고 묘는 선산하 건좌 쌍조이다. · 배(配)는 남포백씨(百氏) 원진의 여의고 정당문학 원항(元恒)의 8세손이다.
정미생이며 3월 3일에 졸하다.

十三世 효립(孝立) 
갑오생이며 12월 13일 졸하니 묘는 임천 서면 초장동 곤좌이다. · 배(配)는 고하노씨(盧氏) 충인(忠仁)의 여이고 좌상(左相) 공숙공(恭肅公)
한(閑)의 후이며 묘는 서영하 좌이다. 

十三世 재광(再光) 
무오 2월 7일생에 무오 2월 8일 졸하다. 묘는 충화면 가화히 신죽동자좌이다. · 배(配)는 성주이씨 종무(宗武)의 여이며 판결사 우(遇)의 손이고 현감 언진의 증손이다. 10월 14일 졸하니 위와 같다.

十三世 인립(仁立)

경신생 휘는 영립(齡立) : 개해생 휘는 애립(愛立), 휘는 일립(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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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砅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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