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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Dalida, 1933 ~ 1987)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탈리아계 부모로부터 '욜란다 크리스티나 질리오티(Iolanda Cristina Gigliotti)'란 이탈리아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삐에뜨로(Pietro)는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한바 있어 달리다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1954년 '미스 이집트'로 뽑혔고, 같은 해 말에 파리로 건너갔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앞세워 프랑스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데뷔곡 'Bambino ('아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디스크가 백만장이 팔리는 대히트로 가수 '달리다'가 탄생하였고, 인기 샹송가수로 발돋움하여 무려 1000여 곡에 이르는 곡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화려한 출세에 비해 어수선하였다. 2살 연하 알랭 드롱(Alain Delon)을 비롯한 몇몇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 뒤 라디오 프로듀서인 뤼시앵 모리스와 결혼했지만, 화가 장 소비에스키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이탈리아 가수 겸 작곡가 루이지 텡코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텡코는 1966년 제17회 '산 레모 가요제'의 결선을 불과 하루 앞두고 입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해버렸다. 루이지 탱고의 자살이 준 아픈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전 남편 뤼시앙 모리스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랑했던 사람마다 자살로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이 두 죽음의 충격으로 딜리다는 한때 자살을 기도했으나, 오히려  그와 같은 비운이 거듭된 끝에, 그녀의 노래는 전보다 더욱 깊이를 더해갔으며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달리다의 노래는 열정 그 자체로, 성숙하고 풍만한 육체로부터 발산하는 요염한 열정적 매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가창력의 양면이 그녀를 마침내 일류 스타로 끌어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로서의 달리다의 인생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어서 그녀의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이 상처를 입거나 자살을 하는 불운이 뒤따랐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평생의 절반을 우울증에 시달려 1987년 5월 3일 55세 나이에 수면제 과용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달리다'는 영어권 국가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 중동, 일본에서는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그녀를 참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단지 샹송가수로서의 달리다가 아닌 정말 프랑스인 가슴속에 그녀는 모두의 연인 이었다. 그녀는 미스 이집트로 뽑혔을 만큼 뛰어난 미모를 앞세워 프랑스로 건너와 영화배우로 데뷔했지만 샹송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프랑스에선 달리다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프랑스 땅에 안치되었다. 몽마르뜨 묘지에 지금도 달리다의 팬들은 꽃을 들고 찾는다. 그렇게 한 시대의 모든이의 사랑을 받았던 달리다는 떠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1000곡에 이르는 주옥같은 곡들은 꾸준히 프랑스인들뿐 아닌 전세계 달리다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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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砅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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