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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鄭氏 史錄省察 / 鄭吉會  ☜출처:클릭


 머리말追遠報本을 생각하며

  5

 雪齋 文靖公(諱可臣)의 畵像讚   7
 龍飛御天歌에 오른 雪齋文靖公諱可臣 先生   9
 雪齋公의 詩 7 11 
 雪齋 文靖公諱可臣의 生年을 밝힌 經緯 

 16

 吾鄭과 인척관계가 있는 인물들

 18

 麟山은 羅州市 榮山洞의 伽倻山 一帶이다 23 
 三不義軒公 諱 初 行狀

 28 

 人脈으로 본 戶曹判書 諱 初 先生

 31
 巖軒公 申檣 先生 行狀  32
 景武公(諱軾畵像讚 33
 景武公(諱軾)의 敎旨

 35

 景武公의 現存敎旨

 37
 故 鄭昞宇 族丈이 保管中인 景武公敎旨目錄 38 38

 景武公(諱軾)의 御書閣影堂永慕齋

 41

 默齋公 諱 訥 行狀 

 42

 寄呈義兵從事之行(壬辰倭亂 때 逸軒公이 義兵出征에 보낸 激勵辭

 44

 逸軒公 諱 諶이 아우 滄洲公에게 보낸 편지글 

 45

 酹統制使李忠武(李忠武公이 戰死했을 때 滄洲公이 읊은 輓詞

 48

 滄洲公 逝去에 睡隱諱姜沆先生 輓詞로 弔問하다

 50

 雙溪亭에서 

 51

 逸軒公朴思庵滄洲公의 雙溪亭詩會 年代推定 

 54

 壽亭은 누구일까 

 55

 護錦公 軒號 發見

 57

 護錦公諱如麟의 갑옷에 붙은 鐵鱗을 챙기다 

 58

 護錦公께서 忠逸祠에 配享된 經緯 

 60

 護錦公과 張晩都元帥의 關係 確認 

 61

 竹友堂 諱瀾先生 略歷

 62

 羅州鄭氏門中의 及第하신 祖上님 

 63

 祖上님들의 行錄을 찾아서

 66

 湖南의 名基 金鞍洞 

 70

 金鞍洞에 있는 書院 및 祠宇와 亭子 

 73

 金鞍洞의 書堂 이야기 

 77

 九代 加錄 內容 省察 

 81

 李克勤 先生의 人的事項을 알아내다 

 85

 鄭 선생의 인적사항을 알아내다 

 86

 巡遠은 누구일까 

 88

 三賢堂의 發見 

 89

 頗牧奇才요 日星忠義의 뜻을 알다

 90
 崇禎 紀元後 周甲의 計算法 91





5

<머리말>

追遠報本을 생각하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명命으로 1445년(세종27)에 편찬한 조선조朝鮮朝 건국建國의 창업송영가創業頌詠歌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도 설재雪齋 문정공文靖公 휘諱 가신可臣의 학덕學德을 찬미讚美했고, 중국中國에서는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칭송稱頌했던 선생先生의 화상찬畵像讚과 설재공雪齋公의 시詩(동문선東文選에 등재된 7수首)에 대해서도 재음미再吟味해 보았으며 뒤이어서 금안동金鞍洞을 빛내신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휘諱 초初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공公은 지체가 높고 기풍氣風이 당당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겸양하며 만년晩年에는 성만盛滿을 경계하고 대竹를 심고 꽃을 가꾸는 등 검소儉素하게 살면서 학문學問과 예절禮節 행의行誼 등은 물론 높은 충절忠節로 국내최고國內最高의 가문家門과 혼인 婚姻하고 교류交流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先生에 대한 기록記錄이많지 않아 왕조실록王朝實錄 등 관계 서적書籍을 더 많이 자세하게 살펴봤으면 좋았을 것을 이에 미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또 충효겸전忠孝兼全한 경무공景武公 휘諱 식軾에게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보낸 수찰手札을 봉안奉安한 어서각御書閣이 있고, 온천행궁溫泉行宮의 화재火災로 위급危急에 처處한 왕王을 구救해 왕王이 친親히 내린 영정影幀을 모신 영당影堂이 있으며, 야인정벌野人征伐의 혁혁赫赫한 공훈功勳으로 금성북삼십리錦城北三十里의 땅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 받아 영원불후永遠不朽의 영광榮光을 입은 경무공景武公 휘諱 식軾의 화상찬畵像讚을 다시 번역하였다.

또 서울의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과 규장각奎章閣, 서울대 도서관圖書館 등에

서 찾은 선조先祖들의 행록行錄에 대해서도 그 내용內容을 밝혔고 종보宗報에 발표했


6

던 나의 기록들을 한데 모았으며 호남湖南의 삼대명기三大名基인 금안동金鞍洞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紹介했고, 지금까지 필자가 간행刊行한 ..나의 祖上 내 故鄕 그리고 나의 삶..(1998년 4월 발행發行) ..護錦 鄭如麟 將軍..(2004년 2월 발행) ..나의 書藝作品圖錄..(2014년 6월 발행) ..雪齋書院의 建立年代와 配享先生의 略歷..(2014년10월 발행) 등의 졸저拙著가 있음도 밝힌다.

엮어 놓고 보니 내놓기가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으나 나름대로 나의 정신이 깃들었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행刊行하기로 했다. 혹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오탈자誤脫字는 물론 사실事實과 다른 기록이 있을 때는 기탄없이 지적해 주시고 지도편달 있으시길 간절히 바란다.


7

雪齋 文靖公諱可臣의 畵像讚

설재雪齋 문정공文靖公의 화상찬畵像讚을 쓰신 분이 네 분이었다.

. 운헌雲軒 최처사崔處士.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경주인慶州人) 이제현李齊賢(영의정領議政)

. 죽헌竹軒 자字는 계도啓道(금성인錦城人) 나계종羅繼從(대제학大提學)

. 후학後學 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금성인錦城人) 임면호林沔浩 

이 중 나공계종羅公繼從 선생先生과 임공林公 면호沔浩 선생先生의 화상찬畵像讚만이 전해 오고 있는데 여기에 대제학大提學 죽헌竹軒 나계종羅繼從 선생先生의 글을 올린다.


典 (학우분전)

堂 (오협묘당)

笏(수신단홀)

方(의표동방)

退老(퇴자항노)

慶廷僚(기경정료)

분전을 넉넉히 익혀(墳典 : 三皇五帝 伏羲, 神農, 堯, 舜 등의 글)

조정에서 지혜롭게 이끌었네.

띠를 드리우고 홀笏을 단정히 하니

동방東方의 모범이었네.

물러남에 촌노인들이 탄식하고

기용됨에 조정의 동료들이 경하했네.



8

戰전兢긍履이職(전긍이직)

詢순及급()

(조철송)

(사촉편)

(각수세)

(모려소)

(예숭유)

(공저악)

(유묘익)

(추수자)

직책 수행을 매우 신중하게 했으며

필요하면 땔나무꾼에게도 물었네.

조정에서 불경을 외우다가도 정문학鄭文學이 오신다고 거두었고

선비를 전장에 보내는 것도 말렸네.

세업을 삼가 지켰으며

띠집에서 채소를 가꾸었네.

선비의 스승을 예로써 높였으며

공로가 지대하여 악부에서 환대했네.

충선왕묘에 배향되고 날개되어 호위하니

맑고 깨끗한 가을 물가 같음이여.



9

龍飛御天歌에 오른 雪齋文靖公諱可臣 先生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1445년(세종27)에 세종대왕의 명으로 편찬한 노래이며 그 내용은 세종임금의 윗대 조상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 태종太宗 임금의 행적을 구가謳歌하여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건국은 반역이 아니고 순천명順天命한 것을 강조하여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고 신성시하는 총 125장으로 된 조선왕조 최고의 장중한 서사시敍事詩이다. 그 중 82장은 설재雪齋 문정공文靖公 휘諱 가신可臣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고사를 읊은 노래이다.


引인見견小소()

御어座좌遽거()

敬경儒유之지()

云운如여何하()

혀근 선비를 보시고

용상에서 벌떡 일어서시니

유학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어떠하신가

이는 설재 문정공을 노래한 내용이다.


接접見견老노()

禮예貌모()

右우文문之지()

云운如여何하已()

늙은 선비를 보시고

예절로 무릎을 꿇으시니

문을 숭상하는 덕이

어떠하신가

 목은 이색 선생을 노래한 내용이다.


10

위에서 첫째 연聯의 혀근(작은) 선비는 설재선생이 작은 나라(고려高麗) 사신으로 원元나라에 갔을 때를 가리킨다. 원元의 세조가 선생을 맞을 때 어좌御座에서 벌떡 일어나 맞을 만큼 선생을 크나큰 유자儒者로 대접했다는 고사故事이며, 둘째 연聯의 늙은 선비는 고려 말의 대학자이며 충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가리킨다. 목은牧隱 선생은 공양왕恭讓王 때 정포은鄭圃隱 사건으로 귀양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그때 이성계李成桂가 그를 상좌上座에 모시고 꿇어앉아 술을 권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때의 상황을 읊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왕조朝鮮王朝 건국建國을 합리화合理化하고 신성화神聖化하는, 오직 조선왕조만을 위한 장중莊重한 글이다. 여기에 고려의 신하인 우리 설재雪齋 문정공文靖公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올랐으니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영광이다.



11

雪齋公의 詩 7首

文문樂락軒헌李이藏장用용1)懶齋재柳류璥경2)二相상國국與여諸제卿경大대夫부作작詩시結결社사余여亦역喜희幸행偶우成성長장句구寄기呈정(六首수)

문락헌 이장용文樂軒李藏用과 나재 류경懶齋柳璥 두 정승이 여러 경대부들과 시회詩會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나 또한 기쁘게 장구長句를 지어 붙여 드린다.


平평生생出출處처若약爲위量량

半반壁벽靑청燈등夜야意의凉량

萬만戶호風풍塵진何하擾요

林림烟연月월奈나茫망

洞동猿원不불避피安안禪선石석

江강鷺로時시來래撰찬疏소堂당

雲운臥와3)他年년拂불衣의4)去

평생의 거취를 헤아려 보니

書燈이 걸린 벽에 밤기운 서늘하네

萬戶에 풍진은 어찌 그리 요란하며

숲속에 안개는 어찌 그리 아득한가

골짝 원숭이는 편안히 참선하는 돌자리를 피하지 아니하고

강가 백로는 야외의 글짓는 곳에 때로 온다네

속세를 떠나 누웠다가 他年에 옷을 떨치고 가서


1) 李藏用(1201~1272) 號는 文樂軒, 고려의 文臣, 字는 顯甫. 추밀원사 儆의 아들. 고종 때 及第하여 中書

侍郞 平章事에 이르렀다. 몽고에서는 海東賢人이라는 稱號를 받았다.

2) 柳璥(1211~1289) 號는 懶齋, 고려의 功臣. 諡號는 文正. 고종 때 及第하였다. 崔氏의 武斷政治가 極甚하여 崔.의 행패가 심하매 1258년(고종45) 別將 金仁俊 등과 협력하여 崔.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功臣이 되고,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승진하고 金方慶이 誣告를 받았을 때 그를 구출했다. 安珦 등이 門下生이다.

3) 雲臥 : 구름에 쌓인 산에 누움. 속세를 벗어나 조용히 살음 4) 拂衣 : 옷자락을 걷어 올림. 힘차게 일어나는 모양. 決然히 떠나감.



12

好호.어甁병錫석付부閒한忙망

靜정裏리機기關관5)沒比비量량

幾기年년高고臥와6)北凉량

술병과 지팡이로 閑忙間에 붙임이 좋으리라

조용히 생각하니 국위 손상하는 앞잡이들 행패 비할데없어

몇 년을 北窓의 서늘함에 은거하였던고








忽홀

思사

雲운

壑학

閒한

棲서

息식

문득 구름골짝에서 한가히 서식함을 생각하고

反반

愧괴

塵진

區구

自자

混혼

茫망

7) 도리어 더러운 곳에서 스스로 混茫함이 부끄럽네

慕모

道도

未미

能능

窺규

奧오

室실

道를 사모하나 능히 오묘함을 엿보지 못하고

愛애

兒아

奚해

止지

誡계

垂수

堂당

아이를 사랑함에 어찌 집에서 경계함을 그치겠는가

一일

朝조

勇용

捨사

君군

知지

否부

一朝에 용퇴함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已이

唾타

紅홍

衢구

事사

ㄷ忙

이미 벼슬길에 침 뱉으니 일마다 바쁘구나.

身신

如여

匹필

素소

可가

裁재

量량

이 몸은 본디 변변치 못함을 짐작하여 헤아리니

誰수

借차

空공

門문

8)氣

味미

凉량

누가 法門을 빌려 氣味를 서늘케 했을까

未미

得득

投투

簪잠

敲고

剝박

啄탁

벼슬을 던지고 주둥아리를 후려치지 못하니

暫잠

期기

泛범

笠립

渡도

滄창

茫망

잠시 삿갓을 띄우고 바다 건너가기를 기약하네

逍소

遙요

不불

分분

煙연

霞하

窟굴

노닐음에 煙霞의 굴을 분별하지 아니하고

功공

業업

徒도

爲위

翰한

墨묵堂당

功業은 한갓 翰墨堂이 되었네

5) 機關 :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남의 앞잡이가 되어 활동하는 것 6) 高臥 : 뜻을 고상하게 품고 세속을 벗어남 7) 混茫 : 흐리멍덩하여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음.

8) 空門 : 만물은 모두 空이라는 이치를 說한 불교의 法門. 禪宗의 異稱.

13

笑소

殺살

9)他

鄕향

浪랑

遊유

子자

타향에서 놀고 지냄을 일소에 부치고

一일

生생

多다

至지

百백

年년

忙망

일생을 백년토록 바쁘게 살았다네.

屛병

俗속

幽유

居거

10)四

十십

年년

세속을 떠나 幽居한 지 40년에

種종

蓮연

時시

復복

引인

遺유

民민

11) 蓮을 심고 때로는 다시 遺民을 이끌었네

講강

.란

花화

影영

爭쟁

侵침

席석

講論이 늦음에 꽃그림자 다투어 자리를 침노하고

定정

起기

苔태

痕흔

半반

沒몰

茵인

잠자고 일어나니 이끼 흔적 반이나 자리가 없어졌네

魂혼

夢몽

自자

勞로

千천

里리

月월

꿈은 스스로 千里月에 수고롭고

光광

陰음

虛허

遣견

九구

街가

塵진

세월을 헛되이 큰거리 風塵에서 보냈네

徑경

荒황

莫막

怪괴

歸귀

來래

晩만

길이 거치니 돌아감이 늦음을 괴이 여기지 말라

他타

日일

功공

成성

一일

幅폭

巾건

他日에 功이 한 폭의 두건에서 이루어지리.

端단

居거

12)演

法법

許허

多다

春춘

평소에 법을 편 지 여러 해에 이르고

密밀

化화

遙요

知지

澤택

萬만

民민

은밀한 교화가 만민에 미침을 멀리서 안다네

林임

下하

摘적

蔬소

甘감

味미

食식

숲 아래서 채소 뜯어 식사가 감미롭고

溪계

邊변

藉자

草초

侈치

文문

茵인

냇가에서 풀을 까니 문채 난 자리 사치스럽네

9) 笑殺 : 소리 내어 크게 웃음. 문제 삼지 아니하고 일소에 부침.

10) 幽居 : 세상을 피하여 그윽하고 외딴곳에 살음 11) 遺民 : 살아남은 백성. 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 亡國의 백성으로서 절의를 지켜 새 조정에 벼슬하지

않는 사람.

12) 端居 : 일상생활. 平居.

14

來래

從종

南남

嶽악

相상

傳전

鉢발

13) 南嶽에서 와 弟子에게 道를 傳하고

常상

遇우

西서

風풍

14).

避피

塵진

항상 서풍을 만남에 부질없이 티끌을 피하네

卜복

隱은

何하

年년

結결

茅모

屋옥

은거하며 어느 해에 띠집을 엮어

倚의

.공

長장

嘯소

岸안

綸륜

巾건

15) 지팡이 의지하고 휘파람불며 두건이 비뚤어지도록 살아볼까

走주

妄망

驅구

迷미

七칠

見견

春춘

망녕되고 희미한데 달려온 지 일곱 해

空공

王왕

16)何

惜석

濟제

窮궁

民민

17) 부처님은 어찌하여 窮民 구제함을 애석해 하나

但단

期기

杖장

.구

尋심

蓮연

社사

다만 지팡이로 蓮社 찾음을 기약하고

肯긍

要요

笙생

歌가

醉취

錦금

茵인

즐겨 피리와 노래로 비단자리에 취함을 요구하네

骨골

爽상

知지

君군

眠면

月월

露로

기골이 상쾌한 그대는 달 이슬에 졸고 있음을 알고

顔안

.훈

愧괴

我아

困곤

風풍

塵진

낯이 훈훈하니 내가 風塵에 곤궁함이 부끄럽네

爲위

言언

講강

下하

宗종

雷뢰

輩배

위하여 말하노니 뇌동하는 무리를 우러르지 말고

且차

莫막

搔소

頭두

18)戀

舊구

巾건

또한 관을 벗으며 옛 벼슬을 사모하지 말라.

13) 傳鉢 : 衣鉢을 전하여 주는 일. 衣鉢 : ① 袈裟와 바리때 ② 傳法의 표가 되는 물건 ③ 師父가 弟子에게

道를 전하는 것 14) 西風 : 遼東 이곳은 滿洲의 남쪽 일부의 땅으로 고구려 이후 고려말까지 영토문제로 우리나라의 근심지역

인데, 우리나라 西쪽에 있으므로 西風이라 했다.

15) 岸綸巾 : 두건을 비스듬히 쓰다.

16) 空王 : 부처님의 존칭.

17) 窮民 : 가난한 백성.

18) 搔頭 : 관을 벗음. 걱정이 되어서 착심이 안 되는 모양.

15

皇황

都도

次차

金금

鈍둔

村촌

韻운

(공이 원도元都에 머물러 있을 때 김둔촌金鈍村이 보내준 시詩를 차운次韻)

略약

無무

才재

德덕

副부

民민

瞻첨

才德으로 백성의 바람에 조금도 부응치 못하면서

底저

事사

奔분

馳치

突돌

不불

黔검

무슨 일로 바삐 달려 구들 검을 틈도 없었네

坐좌

臥와

何하

曾증

安안

寢침

.속

앉으나 누우나 어찌 일찍이 침식을 편히 하랴

居거

諸제

只지

任임

換환

寒한

炎염

세월은 다만 寒暑가 바뀜에 맡겨두네

.빈

絲사

入입

鏡경

簪잠

嫌혐

重중

흰머리 거울에 비춤에 벼슬 무거움을 혐오하고

詩시

草초

盈영

囊낭

筆필

退퇴

尖첨

詩草가 주머니에 가득하고 붓끝은 무디어졌네

常상

憶억

雪설

齋재

時시

對대

榻탑

항상 雪齋에서 때로 대하던 자리를 생각하며

靜정

聞문

風풍

響향

動동

虛허

.첨

바람소리가 빈 처마에 울림을 조용히 듣노라.

※ 위의 시詩 7수首는 모두 동문선東文選에 등재되었는데 위 6수首는 초휘初諱 흥자興字로 등재되었고, 아래 1수首 황도운皇都韻은 휘자諱字를 가신可臣으로 고친 후에 등재되었다. 설재공雪齋公께서 충렬왕忠烈王 6년(1280)에 사명賜名을 받으셨으니까

공公이 57세 때였다. 그러므로 황도운皇都韻은 57세 이후의 글이 되고, 6수首는 57세 이전의 글인데 공公이 충렬왕忠烈王 4년(1278년 : 55세) 때 이분희李汾禧 형제兄弟가 홍다구洪茶邱에게 아첨하여 국정國政을 혼란混亂케 함에 그들과 한 조정朝廷에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영운시.雲詩를 읊고 사임辭任했으니 바로 그때에 읊으신 시詩인 듯하다.



16

雪齋 文靖公諱可臣先生의 生年을 밝힌 經緯

서기 1976년 1월 11일, 집에 소장하고 있는 문헌1)을 살피다가 설재공雪齋公의 연보年譜 중에서 설재공雪齋公의 생년生年에 대해서 “宋理宗嘉定中生”이란 글귀를 발견하였다. 이는 설재雪齋 공께서 “송宋나라 이종理宗의 가정嘉定 중에 낳으셨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설재雪齋공에 대한 모든 기록에 공은 송宋나라 이종理宗 때 낳으셨다고만 되어 있었다. 송宋나라 이종理宗은 40년(1225-1264) 간을 왕위王位에 있었기에 이것만으로는 낳으신 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가정嘉定이란 연호年號에 대해서 찾아보니 가정嘉定이란 연호年號는 이종理宗 때의 연호가 아니라 이종理宗 바로 앞 영종寧宗 때의 연호였다. 그러면 왜 이종理宗의 연호인 보경寶慶을 쓰지 않고 ‘理宗嘉定中生’이라 하였을까 하고 의문이 생겼다.

그리하여 옛날 중국의 왕위王位 계승繼承 과정과 관례慣例에 관하여 확실한 것을 알고자 여러 문헌을 조사하던 중 주자朱子가 쓴 대학大學 서문의 맨 끝에 “淳熙己酉二月甲子新安朱熹序”라고 씌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해는 남송南宋의 효종孝宗 순희淳熙 16년(1189) 2월 4일이다. 그런데 그 이틀 전인 2월 2일에 효종孝宗은 광종光宗에게 양위한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미 양위를 받아 즉위卽位한 광종光宗의 연호인 소희紹熙를 쓰지 않고 전왕前王의 연호인 순희淳熙를 쓴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설재雪齋공의 출생 년도를 입증立證해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당시 중국의 관례慣例는 전왕이 양위한 그 해에 한해서는 새로 즉위卽位한 신왕新王의 연호를 쓰지 않고 전왕의 연호를 그대로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宋理宗嘉定中生’은 이종理宗 바로 앞의 영종寧宗이 이종理宗에게 양위하여 이종理宗이 즉위卽位 한 그 해에 낳으셨다는 글귀로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종理宗이 즉위한 연대는 고려高麗 고종高宗11년 갑신甲申이요, 서기로는 1224년

1) 表紙가 훼손되어 題號를 알 수 없는 문집의 雪齋公 行狀 부분.

宋理宗嘉定中生

17

이다. 이로써 설재雪齋 공께서 낳으신 해는 고려 고종11년 서기 1224년임을 만천하滿天下에 밝히는 바이다.

1976년 1월 11일 雪齋公 20世孫 吉會 謹識

이 기록은 1978년(무오)에 발간한 족보 첫째 권 29쪽과 종보 4호 20쪽에도 밝힌

바 있다.

설재공의 정확한 탄생년도를 “宋理宗嘉定中生”이라고 확인해 주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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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鄭과 인척관계가 있는 인물들

. 안홍우安弘祐 죽주인竹州人 벼슬은 대부소경大府少卿(종4품):재화보관財貨保管(설재공雪齋公의 장인).

. 박전지朴全之 죽산인竹山人 호는 행산杏山, 시호諡號는 문광文匡, 정승 19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국史局, 한림翰林을 지내고 안동부사安東府使를 거쳐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삼사좌사三司左使, 개성부윤開城府尹 등을 역임하고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忠肅王8)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탁倬의 장인).

. 김방경金方慶(1212-1300)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 안동安東. 길佶의 처외조부妻外祖父. 소년에 등과하여 고려의 도원수都元帥였으며 추충정란정원공신推忠靖亂定遠功臣 삼중대광도첨의사사三重大匡都僉議司事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해졌다(옛날에는 호적에 처외조까지 올랐다).

. 정해鄭. 청주인. 시호는 장경章敬. 관官은 찬성사贊成事.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전佺의 장인)

. 권윤명權允明 안동인安東人. 관官은 광정대부첨의평리길창부원군匡靖大夫僉議評理吉昌府院君(길佶의 장인)

. 민지閔漬 여흥인驪興人. 시호는 문인文仁. 벼슬은 정승政丞.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세자世子로 있던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학사翰林學士 조열대부朝烈大夫가 되고 그 뒤,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첨의광정원사僉議光政院使가 되고 후에 정승政丞이 되었고, 여흥부원군驪興府阮君에 봉해졌다(억億의 장인).

. 김광연金光衍 언양인彦陽人. 벼슬은 판서判書(엄儼의 장인)

. 김미金彌 낙안인樂安人. 감사監司, 문하시중門下侍中 낙천군洛川君 시호는 충민忠愍. 김수金隨의 자子(길佶의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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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황鄭璜 진주인晋州人. 진양백晋陽伯 시호는 충장忠莊(길佶의 사위)

. 정리鄭釐 동래인東萊人. 벼슬은 문하평리門下評理(문진文振의 사위)

. 이제현李齊賢 경주인慶州人. 고려말高麗末의 성리학자性理學者.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문충文忠 문하시중門下侍中 공민왕묘恭愍王廟에 배향配享되었다(설재공雪齋公의 화상찬畵像讚을 썼다).

. 최사위崔士威 전주인全州人.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자신自新의 장인)

. 신장申檣 고려인高靈人. 좌찬성左贊成 포시包翅의 자子. 호는 암헌巖軒 벼슬은 대제학大提學 1402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직제학直提學 좌보덕左輔德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1431년(세종13)에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짓고 세종14년에 공조(工曹)참판(參判)이 되어 남산지곡南山之曲을 지었다. 후에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글씨에도 능能했다. 자子인 신맹주申孟舟는 문서윤文庶尹 신중주申仲舟는 문군수文郡守 신숙주申叔舟는 문영상文領相이며 시호는 문충文忠 신송주申松舟는 문장령文掌令 신말주申末舟는 대제학大提學 호는 귀래정歸來亭인데 이 5형제 모두 금안동金鞍洞에서 낳았다고 한다(유有의 사위).

. 정종성鄭宗誠 연일인延日人. 벼슬은 이조참판吏曹參判(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자

子, 극기克己의 장인)

. 원천석元天錫 태종太宗의 사부師傅. 호는 운곡耘谷. 휘諱 초初의 손孫(극념克念의 자子인 수輸의 장인). 고려 말에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은거하였다. 1400년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자주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다. 원주原州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祭享함.

. 송천희宋千喜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극종克從의 외손자外孫子).

. 유구산庾龜山 무송인茂松人. 벼슬은 한성부윤漢城府尹. 1545년 단종端宗 손위遜位 때 이유李揄 이보흠李甫欽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효흡金孝洽의 밀고로 탄로되어 옥사獄死했다. 숙모전肅慕殿에 모셨다. 이 유씨일가庾氏一家가 화천면花川面 동성촌同聲村에 살았는데 대代를 이어 영달榮達하여 마을을 출입하면서 같은 갈도喝道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 마을을 동성촌同聲村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갈도

喝道:고관의 행차에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소리(쉬, 물렀거라!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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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오산庾鰲山 유구산庾龜山의 동생. 벼슬은 관찰사觀察使. 형 유구산庾龜山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옥사獄死했다. 역시 숙모전肅慕殿에 모셨다(휘諱 초初의 처남).

. 이화李和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태조李太祖(성계成桂)의 아우이며 호는 이락정二樂亭, 시호는 양소襄昭,벼슬은 영의정領議政.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이되고 1398년(태조7) 제1차 왕자의 란을 평정하고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으며,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란을 평정,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1407년(태종7)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극념克念의 장인).

. 정총鄭摠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학자. 시호는 문민文愍. 본관은 청주淸州. 文科에 장원

급제壯元及第하고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이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극념克念의 장인)

. 정계함鄭繼咸 서산인瑞山人 관은 현감縣監(호조판서戶曹判書 정순鄭珣의 자子, 휘諱 초初의 사위)

. 성유수成有守 창녕인昌寧人. 예조판서禮曹判書 극기克己(휘諱 초初의 장자長子)의 사위. 한성판윤漢城判尹 효상孝祥의 자子. 벼슬은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도정都正에 이르다.

. 하연河演 본관은 진주晋州. 시호는 문효文孝.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며 승현承賢의 처장조妻丈祖이다.

. 강곤康袞 신천인信川人. 세조世祖 때의 공신功臣. 시호는 공양恭襄 추충정란공신推忠靖亂功臣 등 3공신功臣이며 신천군信川君에 봉해졌다. 청렴강직淸廉剛直했음(승현承賢의장인).

. 송극창宋克昌 여산인驪山人.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은 현감縣監이다. 장자長子 만희萬喜는 감사監司, 자子 천희千喜는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 민유閔愉 호는 사암思菴 벼슬은 대제학大提學(병판휘식兵判諱軾의 처장증조妻丈曾祖).

. 민수생閔壽生 여흥인驪興人. 벼슬은 판서判書(휘諱 식軾의 처장조妻丈祖).

. 이극근李克勤 경주인慶州人.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휘諱 식軾의 스승).

. 이해李蟹 극근克勤의 손孫. 휘諱 염조念祖의 장인丈人(정눌鄭訥, 정심鄭諶, 정상鄭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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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外祖父). 창주공휘상滄洲公諱詳의 형제분은 모두 외조부 이해李蟹에게서 배웠다. 이해李蟹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이며 호는 모산茅山 1504년(연산10)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515년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조광조趙光祖와 친교親交가 두터웠다. 영강서원榮江書院에서 제향祭享함. 우리 나주정씨문중羅州鄭氏門中과 경주이씨문중慶州李氏門中은 오랜 동안 깊은 세교世交가 이어졌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은 설재공雪齋公의 화상찬畵像讚을 썼으며 이극근李克勤은 병조판서兵曹判書 휘諱 식軾의 스승이었고 그의 손자孫子인 이해李蟹는 휘諱 염조念祖의 장인丈人이었으며 외손자外孫子인 눌訥, 심諶, 상詳 삼형제의 스승이었다.

. 장만張晩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시호는 충정忠定 본관은 인동仁同. 벼슬은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이다. 군수郡守 기정麒禎의 아들로 1589년에 생원진사生員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591년 문과급제文科及第 봉산군수鳳山郡守 때 선정善政으로 승지承旨가 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에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가 되어 전공戰功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부친父親은 군수郡守 기정麒禎이며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옥성부원군議政府領議政玉城府院君이다. 따라서 호금공護錦公의 장인丈人은 부원군府院君이고 처남妻男은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이다.

. 이덕일李德一 자는 경이敬而 호는 칠실漆室 벼슬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응시應試, 급제及第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을 모아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의 막하幕下로 들어갔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 戰死한 뒤 축성제구책築城制寇策을 논하여 우의정右議政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천거薦擧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효선공孝仙公 정발鄭撥의 장인).

김방경金方慶 고려의 도원수都元帥 (길佶의 처외조부妻外祖父)

신장申檣 대제학大提學 (유有의 사위)

신숙주申叔舟 3대 영의정領議政

정종성鄭宗誠 이조참판吏曹參判 (정몽주鄭夢周의 자子, 극기克己의 장인)

이화李和 이성계李成桂의 아우, 영의정領議政 (극념克念의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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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元天錫 태종太宗의 사부師傅 (초初의 손孫, 수輸의 장인)

송천희宋千喜는 이조판서吏曹判書 (극종克從의 외손자)

장만張晩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 (정여린鄭如麟 장군과 남매간)

위와 같이 대표적인 인물 몇 분만 살펴보아도 설재공雪齋公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이후에도 왕실 혼인은 물론, 국가적으로 굴지의 가문과 인물들이 우리 나주정씨와 인척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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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山은 羅州市 榮山洞의 伽倻山 一帶이다

1705년에 이루어진 나주정씨족보羅州鄭氏族譜인 을유보乙酉譜부터 1731년의 신해보辛亥譜까지 인산보麟山譜라 했으며 1888년에 이루어진 나주정씨문집羅州鄭氏文集(元亨利貞)에까지 설재공雪齋公의 성姓은 정鄭이요 계출인산系出麟山이라했다. 위의 기록만 보더라도 우리 나주정씨의 족보에서 인산麟山이란 본관本貫이 1705년 이후 180 여 년간이나 기록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어찌 여기에 대해서 상고(詳考)하지 않고 소홀히 넘겨버릴 수 있겠는가.

1705년(조선 숙종31 을유乙酉)에 이루어진 을유보乙酉譜 발문跋文에 의하면 우리 정씨鄭氏가 인산麟山에서 일어났다고 했는데 고려 때의 지리지地理誌를 살펴보면 인산麟山이란 군郡이나 현縣은 없고 의주義州와 경계에 인주麟州라는 땅이 있었으나 지금은 의주義州에 합쳐졌다고 한다. 오정吾鄭이 나주羅州에서 살아온 지 이미 오래고 인산麟山이 어디이며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았는지 확실치 않은즉 이번 족보는 나주 정씨보羅州鄭氏譜라 해야 마땅하나 인산정씨보라 한 것은 우리의 근본을 잊지 않기위함이니 후세에 이 일을 상고詳考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정吾鄭의 대유학자大儒學者이신 다천공 우익선생茶泉公遇益先生께서 쓰신 전다천유고前茶泉遺稿 373쪽 을유보乙酉譜 서문序文(1945년 발간) 중에 오정吾鄭의 구관舊貫 인산麟山은 ‘今伽倻山在榮山’이라 씌어 있다. 이 문구文句의 뜻은 인산麟山은 영산포榮山浦의 가야산伽倻山 일대一帶라는 뜻이다. 필자筆者 역시 가야산伽倻山 일대가 곧 인산麟山이며 이곳이 오정吾鄭의 발상지發祥地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이유理由는,

첫째 설재공雪齋公께서 영산포榮山浦 가야산伽倻山 근방인 동강면洞江面 시중동侍中洞에서 낳으셨다.

둘째 설재공雪齋公의 배위配位인 안씨부인安氏夫人 산소도 가야산伽倻山 아래에 있는데 인증認證과 아니다에 말이 많지만 인근의 동명洞名이 안성동安姓洞이고 과거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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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에서 확인할 만한 지석誌石이 나왔다고 하며 또 묘墓의 형태가 왕릉王陵처럼 웅장하여 정승의 부인夫人이 아니면 그렇게 묘墓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근년近年에 이르러 많은 분이 인증하는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지석誌石 이야기인데, 지난 갑술보甲戌譜(1934년 발간) 때 만송晩松(자인국휘우경字仁國諱遇慶 당시63세), 금사錦沙(자 문숙, 휘 우림字文淑諱遇琳당시56세), 금하琴下(자 행숙, 휘 우선字行淑諱遇善 당시52세) 이 세 분이 문중대표로서 보사譜事를 의논키 위해 안성동安城洞에 갔는데 그곳의 종인宗人 초암.庵(자 성옥, 휘 인회字聖玉諱仁會 당시54세)께서 안씨부인安氏夫人 산소에서 나왔다는 지석誌石을 보여주며 그 묘墓가 안씨부인安氏夫人 산소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셋째 설재공雪齋公의 다섯째 아드님 길佶(개성소윤開城少尹)의 산소도 가야산..山 근처인 장사長沙에 모셨다.

넷째 오정吾鄭의 시조始祖 해諧, 이세二世 종산宗産, 삼세三世 송수松壽의 산소를 실전失傳했는데 가야산..山 근방의 영산신씨靈山辛氏의 산山에 위 3위의 산소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섯째 가야산..山 일대一帶를 지금은 ‘개산’이라 부르는데 ‘개산’의 옛 이름을 ‘인살매’라고 불렀다는 촌로村老들의 이야기도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해서 여기가 바로 인산麟山이며 오정吾鄭의 발상지發祥地일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가야산..山이 ‘개산介山’1)이 되고 ‘개산’이 ‘인산麟山’2)이 되었을까.

첫째 가야산..山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개산’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 ‘개산’을 한자로 쓸 때 견犬 변의 ‘인산.山’으로 썼다가 본관本貫을 개견犬변에 쓸 수 없어서 인산麟山이라 썼을 것이다. 그러면 왜 인산麟山은 압록강변 의주義州 근처에 있다 하고 본관本貫을 나주로 하였을까.

1) ‘개산’ : 임인보(1962년 발간) 卷一의 1쪽 山圖와 신미보(1991년 발간) 卷之一 74쪽 소윤공 諱 佶의

墓 山圖에도 둘레의 ..山이 ‘介山’으로 표기되어 있음.

2) ‘麟山’ : 조선조 고종 25년(1888) 戊子에 발행된 羅州鄭氏文集 ..元亨利貞.. 四卷中 卷之上(元) 雪齋公行狀에서 ‘公姓鄭 系出麟山(誌圖.山)’이라고 明記되어 있다. 이 원고는 나주정씨 종보 5호에도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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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尹公 諱 佶의 墓 山圖. ..山 一帶를 ‘介山’이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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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鄭氏文集 ..元亨利貞.. 四卷中 卷之上(元) 雪齋公行狀에서

‘公姓鄭 系出麟山(誌圖.山)’이라고 明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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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족보인 ‘을유보’의 발문跋文에 기재된 것처럼 우리 조상祖上이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해 인산보麟山譜라고 했다가 대성大姓의 본관本貫을 인산麟山이라고 하고 보니 목사牧使골인 큰나주 羅州의 극히 작은 일부 지명地名을 본관本貫으로 할 수 없어 인산麟山을 고쳐 나주羅州로 위관爲貫하면서 인산麟山은 압록강변 의주義州 근처에 있다고 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평안도平安道의 인주麟州나 의주義州는 우리 나주정씨羅州鄭氏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것 같다.

위의 사실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인산麟山이 평안도平安道의 의주義州 근처에 있다는 말은 전혀 믿기 어려운 말이다.

.가 .야

→介

→.린

산 (인살매)→麟

→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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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不義軒公 諱 初 行狀

본관本貫은 나주羅州 자字는 천옥天玉 호號는 삼불의헌三不義軒 관官은 호조판서戶曹判

書. 고考의 휘諱 문진文振으로 지보성군사 증자헌대부 이조판서知寶城郡事贈資憲大夫吏曹

判書, 비.는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도강김씨道康金氏 판전객시判典客寺 용현容顯의 여女

이다.

. 1345년(충목왕 원년) : 羅州 金鞍洞 水閣마을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준수하고 성품

이 활달하여 도량이 크시었다. 11살 때 錦城山神과의 일화가 있으니 다음에 소개

한다.

. 1393년(태조太祖2) :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다.

. 1395년(태조4) :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에 천거되고 차례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집

현전교리集賢殿校理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 등 화려한 벼슬을 지냈으며 이어서

. 1407년(태종太宗7)~1409(태종9) 3월 19일 : 제주목사 겸 안무사濟州牧使兼按撫使, 뒤

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다. 이때 제주에 큰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할

때 공公이 7주야를 하늘에 빌어서 큰 물줄기를 얻어 물이 콸콸 솟아나니 이를

정천鄭泉이라 했으며 그 들판을 정평鄭坪이라 하고 주민住民들은 기뻐하며 송덕비

頌德碑를 세웠다고 한다.

. 1409년(태종9) 10월 :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와 도진무都鎭撫(도총관都摠管)을

지냈음을 왕조실록王朝實錄 태종편太宗篇16(455쪽)에서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 1411년(태종11) : 한성판윤漢城判尹(현 서울특별시장)

. 1414년(태종14) :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의금부사資憲大夫戶曹

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義禁府事에 올랐으니 금성산신錦城山神의 예언이 딱 들어맞은 셈

이다. 공公은 집안이 번성할수록 몸을 낮추며 꽃씨를 뿌리고 대竹을 가꾸면서 의

리義理를 강론講論하고 후학後學을 장진.進했다.

. 1423년(세종世宗5) : 卒하니 享年79세. 金鞍洞 永安村 案山 酉坐에 禮葬했다. 配는 정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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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유씨 좌찬성 당의 여貞夫人茂松庾氏左贊成.女이며 이조참판吏曹.判 익益의 손孫,

병부상서兵部尙書 필弼의 후后이다. 온순정일溫順貞一하고 원유부덕苑有婦德하다.

공公과 금성산신錦城山神의 일화를 소개한다.

공이 어려서 금성산錦城山 중턱의 구룡재九龍齋에서 공부를 했는데 11살 되던 해

섣달 그믐날 밤에 공이 혼자서 서당을 지키며 공부하는데 밤중에 갑자기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오면서 덜컥 창문이 열리더니 키는 아홉 자 몸통은 다섯 아름이

나 되는 무서운 괴물이 들어와 한참 동안 공을 노려보고 섰다. 순식간에 촛불이

꺼져 공이 켜자 다시 꺼지고 다시 켜자 또 꺼지고를 거듭했다. 공이 싫은 기색

없이 태연한 척 호령하기를 “네가 여우냐, 귀신이냐.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썩 물러가지 못할까.”하고 소리쳤으나 목소리는 무서워서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괴물은 홀연히 사라지고 잠시 후에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뛰어난 노인老人이 지

팡이를 끌며 대청으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나는 금성산錦城山을 지키는 산신山神이

다. 너의 도량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처음에 세 차례나 촛불을 껐어도 싫은

기색이 없어 정승政丞의 재목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말소리가 떨리며 두려워하는

눈치가 보였으니 판서判書 재목이다.” 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공公의 호號가 삼불의헌三不義軒인데 이 호號는 공이 스스로 지은 호號다. 그 뜻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공이 스스로 주객主客의 입장이 되어 문답을 하였다.

삼의三義

. 앞뜰에 동백꽃이 만발할 때 새가 와서 꽃을 쪼으면 꽃을 보호하기 위해 새를

쫓는다(愛物之義 : 꽃을 사랑하는 마음).

. 홍매화가 아름답게 피었을 때 꽃나무에 말을 매어 놓으면 백마 등에 꽃잎이 떨

어지는 것을 즐긴다(賞心之義 :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

. 부엌 종이 반찬거리가 떨어졌다고 고하면 대밭에서 죽순을 끊어다가 반찬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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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安貧之義 : 가난도 편안하게 여기는 마음)

삼불의三不義

. 새들이 날아와서 꽃을 쪼으며 노는 것 또한 꽃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인데

이 새를 쫓는 것은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非及物之恕).

. 꽃나무에 말을 매어 꽃이 떨어지는 것을 도왔으니 꽃만 즐기고 나무는 생각하지

않았다(非養物之道).

. 대竹에는 군자의 절개가 있는데 이것을 자라지 못하게 끊어버렸으니 생물을 사

랑하는 어진 마음이 없지 않은가(非愛物之仁). 그러면 삼의三義가 아니라 삼불

의三不義가 아닌가 하고 삼불의헌三不義軒이라고 자호自號를 했으니 곧 자기의 허물

을 들으면 기탄없이 고치려는 마음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위의 삼불의헌공

三不義軒公 행장行狀은 공公의 외증손자外曾孫子인 이조판서吏曹判書 문절공文節公 송천

희宋千喜(여산인驪山人) 선생이 지었다. 공公은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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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脈으로 본 戶曹判書 諱 初 先生

고관대작高官大爵에 충절忠節이 높은 친인척親姻戚이 많으며 왕실혼인王室婚姻도 했

다.

. 지芝는 극념克念의 손孫)며 호판공戶判公의 증손曾孫이다. 초휘初諱는 영. 호號는 졸

재拙齋 태종太宗1405년(을유乙酉)생 성균진사成均進士. 1457년(세조世祖3)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만나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사전

事前에 탄로나 화禍를 입어 자손子孫이 유리流離하다.

. 공公의 처남 유구산庾龜山(한성부윤漢城府尹)과 유오산庾鰲山(관찰사觀察使) 형제 역

시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탄로나 옥사獄死했고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

되었다.

. 공公의 사돈(극기克己의 장인)인 이조참판吏曹.判 정종성鄭宗誠은 문충공文忠公 정

몽주鄭夢周의 아들이다.

. 이조판서吏曹判書 문절공文節公 송천희宋千喜는 극종克從의 외손자外孫子이다.

. 태종太宗의 사부師傅인 원천석元天錫(극념克念의 사돈이며 수輸의 장인)은 태종이

그렇게 간곡히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다.

. 극념克念의 장인丈人인 의안대부義安大君 양소공襄昭公 이화李和는 태조대왕의 이모

제異母弟인데 개국1등공신이 되고 태조묘太祖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왕가王家와의 혼

인婚姻이었다.

.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시호諡號 문민文愍 개국1등공신 정총鄭摠도 극념克念의 장인丈

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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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軒公 申檣 先生 行狀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제부濟夫 호號는 암헌巖軒 고려 공조참의工曹參議 휘諱 포시

包翅의 아들이다.

. 1382년(우왕8) : 전라북도 남원부 호촌壺村에서 태어났다.

. 1402(태종2) :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문과급제文科及第.

. 1411년(태종11) :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사직辭職하고 금안동金鞍洞으로 퇴거退去하다

(30세 때).

. 1420년(세종2) :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 1431년(세종13) :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찬撰함. (왕王이 궁금하여 실록實錄의 내용을

보고자 하니 “사관史官의 직필直筆을 보장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公은 성

품이 온후하고 겸양하여 남을 미워하지 않았고 문장文章이 수려하고 필법筆法의

대가大家였다. 왕王의 특명特命으로 남산지곡南山之曲1)을 지어 올렸고 또 문무악장

文武樂章을 지어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공덕功德을 노래했다.

. 설재문정공雪齋文靖公의 행장行狀도 공公이 지었다. 공公이 평생平生 호주好酒하니 그

인품人品과 재주를 사랑하는 왕王도 공公을 아끼고 건강을 걱정하여 술을 좀 덜

들면 좋겠다고 일렀다는 기록이 있다. 공公은 오랫동안 대제학大提學이었다. 대제

학大提學의 임기는 본인이 사퇴하지 않는 한 종신終身토록 재임在任하였다. 부인夫

人은 정경부인貞敬夫人 나주정씨羅州鄭氏 지성천사知成川事 휘諱 유有의 여女이다. 공公

은 삼남三男 문충공文忠公 숙주叔舟의 귀貴로 순충적덕보조공신영의정純忠積德補祚功

臣領議政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고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 南山之曲 : 1432년(世宗14) 工曹參判이 되었을 때 南山之曲을 지었다. 公은 書藝에도 能해서 草書와

隸書를 잘 썼다.

33

景武公(諱軾) 畵像讚

正憲大夫行知敦寧府事 韓致應 讚 字.甫 號 .山 官 兵曹判書

中중

權권

1)嶽악

嶽악

2) 권력의 중심에서 위엄있고 강직하니

干간

城성

3)之지

彦언

나라를 지키는 큰선비라네

扈호

駕가

4)于우

溫온

온천행에 임금을 수행할제

.고

.건

5)後후

光광

궁시로 따르니 후광있네

黑흑

夜야

蒼창

黃황

어두운 밤에 당황하니

災재

延연

行행

殿전

행궁에 재앙이 뻗쳤네.

羽우

衛위

顚전

倒도

호위가 넘어지고 거꾸러지니

如여

警경

急급

變변

警戒가 급변했네

公공

來래

踏답

踏답

6) 공이 오는 말 발굽소리

奮분

迅신

7)如여

雷뢰

기세가 우레 같네

1) 中權 : 권력의 중심 2) 嶽嶽 : 위엄있고 강직함 3) 干城 : 방패와 성, 나라를 지키는 군인 4) 扈駕 :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함 5) .. : 활집과 전통 6) 踏踏 : 말 발굽소리 7) 奮迅 : 떨쳐 일어나 기세가 성함

34

頭두

額액

畵화

爛란

머리와 이마가 데어서 문드러지고

袍포

帶대

餘여

煽선

도포와 띠에도 불 붙었네

后후

用용

嘉가

乃내

임금의 등용이 아름다우니

寵총

喩유

實실

眷권

은총이 실로 알뜰했네

爰원

詔조

龍용

眠면

8) 이에 龍眠에게 조서하여(명하여)

繪회

厥궐

眞진

面면

그 眞面을 그리게 했네

惟유

肖초

七칠

分분

오직 칠푼만 닮았으니(아무리 능숙해도 다 그려낼 수 없으니)

莫막

狀장

一일

片편

한 조각에 다 형상할 수 없었다네

千천

古고

匪비

遠원

천고가 멀지 않으니

颯삽

爽상

如여

見견

당시의 시원한 모습 보는 것 같네

※ 이 글은 너무 어려워서 弦齋 金永雄 선생께 번역을 부탁했다.

8) 龍眠 : 옛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이름

35

景武公(諱軾)의 敎旨9)

다음의 교지敎旨 목록目錄은 1973년 10월 20일(陰 9월 25일 설재서원 제향시祭享

時) 현재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보존保存되어 있는 교지敎旨 13매를 기록해 둔 것이다.

공公은 1432년(세종14)에 문과급제文科及第했다.

① 宣

(종6품)

② 諭

使

1444년(세종26) 3월 19

③ 鄭

1)守

2)舍

3)(정4품)

④ 諭

使

1450년(세종

32) 9월 3일

⑤ 鄭

使

(종3품) (세조원년) 윤6월

23일

⑥ 鄭

使

使

1455년 (세조원년)

11월 4일

⑦ 鄭

4) 三

1455년 (세조원년)12월 27일

9) 敎旨 : 조선조 때 임금이 신하에게 주던 사령, 이 교지에는 施命之寶라는 御寶가 사용됨.

1) 朝散大夫 : 4품 2) 議政府 : 조선조 제일 높은 중앙행정관청 지금의 중앙청 3) 知製敎者 : 王에게 강론과 교서 등을 기초하여 바침 4) 原從功臣 : 정공신 외의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줌

36

⑧ 鄭

1458년(세조4) 10월 4일

⑨ 通

5)承

6)右

7) 經

8) 修

殿

9) 判

1459년(세조5) 3월 25일

⑩ 諭

使

10)無

11) 1459년(세조5) 9월 28일

⑪ 鄭

12)判

13)者

1461년(세조7) 7월 19일

⑫ 奉

使

使

祿

1463년(세조9) 正月 初六日(1년에 290석 국록을 받는 교지이다.)

⑬ 敎旨鄭軾爲資憲大夫知中樞院事者 1465년(세조11) 7월 27일

5) 通政大夫 : 당상관 6) 承政院 : 왕명의 출납 7) 右副承旨 : 정3품 8) 經筵參纂官 : 정3품 당상관 9) 編修官 : 정3품 10) 松骨 : =松.. 꿩 잡는 매 11) 이 교지는 함길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꿩잡는 매를 많이 잡아서 왕이 상을 내린 교지이다.

12) 資憲大夫 : 정2품 13) 漢城府事 :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37

景武公의 現存 敎旨

① 宣

(종6품)

② 諭

使

1444년(세종26) 3월 19

③ 諭

使

1450년(세종

32) 9월 3일

⑧ 鄭

1458년(세조4) 10월 4일

⑩ 諭

使

1)無

2) 1459년(세조5) 9월 28일

경무공의 敎旨 13장이 卒後 506년 동안 (1973년 10월 20일 제1차 확인) 잘 보존

해 왔는데 지금부터 약 7년 전에 총 13장 敎旨 중 8장을 도난당하고(2008년 4월

1일에 도난 소식을 들었음) 敎旨 5매만이 남아있다. (2015년 1월 18일 제2차 확

인) 우리 문중의 귀중한 선조님의 유산을 이처럼 분실하고 보니 先祖님께 송구할

따름이다. 이제 남은 5매의 敎旨만이라도 소중하게 보존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전해 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1) 松骨 : =松.. 꿩 잡는 매 2) 이 교지는 함길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꿩잡는 매를 많이 잡아서 왕이 상을 내린 교지이다.

38

故 鄭昞宇 族丈이 保管中인 景武公 敎旨 目錄

① 敎교

旨지

鄭정

軾식

爲위

朝조

散산

大대

夫부

議의

政정

府부

舍사

人인

兼겸

寶보

文문

閣각

知지

製제

敎교

兼겸

春춘

秋추

館관

記기

注주

官관

者자

景경泰태

元원

年년

七칠

月월

初초

六육

日일

(世

32年

1450年

년 )

② 敎교

旨지

鄭정

軾식

爲위

朝조

散산

大대

夫부

守수

知지

承승

文문

院원

事사

일 (端

1453年

년 )

③ 敎교

旨지

鄭정

軾식

爲위

知지

司사

諫간

院원

事사

者자

일 (端

년 1453년)

④ 敎교

旨지

鄭정

軾식

爲위

奉봉

正정

大대

夫부

寶보

城성

郡군

事사

兼겸

勸권

農농

兵병

馬마

團단

鍊련

使사者자 景

년 (端

2年

1454)

⑤ 敎교

旨지

鄭정

軾식

爲위

천통

政정

大대

夫부

承승

政정

院원

同동

副부

承승旨지經경

筵연

參참

贊찬

官관

寶보

文문

閣각

直직

提제

學학

知지

製제

敎교

兼겸

判판

司사

宰재

監감

事사

(世

3年

1457)

⑥ 敎교

旨지

鄭정

軾식

爲위

資자

憲헌

大대

夫부

司사

憲헌府부大대

司사

憲헌

者자

(世

7年

1461)

⑦ 鄭정

軾식

爲위

資자

憲헌

大대

夫부行행中중

樞추

府부

同동

知지

事사

兼겸

五오

衛위

都도

摠총

府부

都도

摠총

官관

者자

(世

12年

1466)

⑧ 鄭정

軾식爲위咸함

吉길

道도

都도

觀관

察찰

使사

때 王왕 의 敎교

諭유

文문

⑨ 鄭정

軾식

爲위

正정

憲헌

大대

夫부

者자

년 (世

13年

1467)

39

⑩ 鄭정

軾식

爲위

漢한

城성

府부

尹윤

: 이때 三

를 追

하는 敎

가 내렸다(追

차 )

自자

新신

敎교

旨지

. 鄭정

自자

新신

爲위

朝조

散산

大대

夫부

春춘

川천

者자

: 宣

(世

14年

1432)

. 鄭정

自자

新신

爲위

奉봉

列열

大대

夫부

知지

春춘

川천

都도

護호

府부

使사

兼겸

勸권

農농

兵병

馬마

團단

鍊련

副부

使사

(世

14年

이 해에 景

공 文

제 )

. 鄭정

自자

新신

贈증

資자

憲헌

大대

夫부

吏이

曹조

判판

書서

훈 天

(世

5年

1459)

鄭정

承승

賢현

敎교

旨지

鄭정

詳상

敎교

旨지

. 鄭정

詳상

爲위

振진

勇용

校교

威위

將장

軍군

行행

忠충

武무

衛위

副부

司사

勇용者자 萬

력 18年

(宣

23庚

1590)

. 鄭정

詳상

爲위

宣선

略략

將장

軍군

行행

忠충

佐좌

衛위副부

司사

勇용

者자

(宣

23年

4月

1590)

. 鄭정

詳상

爲위

奉봉

直직

大대

夫부

敎교授수兼겸

提제

督독

屬속

校교

官관

者자

력 19年

(宣

24 1591)

40

이 保

인 敎

. 景

공 (諱

식 )敎

지 : 10장

. 自

지 : 3장

. 承

지 : 1장

. 滄

(諱

)敎

: 3장

17장

41

景武公(諱軾)의 御書閣, 影堂, 永慕齋

어서각御書閣

경무공景武公(휘諱 식軾)이 평안함길도平安咸吉道 도순찰사종사관都巡察使從事官으로

있을 때 공公의 대부인大夫人이 병환病患으로 위독하니 속히 올라와서 뵈어라 하고

두 차례나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수찰手札1)을 보냈으니 1444년(세종26)과 1450년(세

종32)이었다. 이 수찰을 봉안奉安하고 있는 곳이 어서각御書閣이다.

영당影堂

경무공景武公이 세조대왕의 온천溫泉 행궁行宮에 호가扈駕했을 때 행궁에 불이 나서

백관百官이 놀라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무섭게 번지는 불 속에서 왕王을 업고 나

오니 옷과 신발 수염이 타고 얼굴과 이마에도 화상火傷을 입었다. 왕은 공公의 공로

를 가상히 여기고 왕을 업은 채 화상畵像을 그리라고 하셨다. 공은 너무 황공스럽

다고 극력 사양하여 당시의 형상에 왕의 시녀侍女가 술을 따르는 영정影幀을 내렸

다. 이는 영원히 잊지 못할 영광이었다. 그 영정을 모신 곳이 영당影堂이다. 또 충

남 노성 화곡리忠南魯城禾谷里에도 영당影堂을 중건重建하여 영정影幀을 모셨다.

영모재永慕齋 경무공景武公의 영정影幀 및 교지敎旨의 포쇄曝.2)와 제관祭官이 재숙齋宿3)을 하

는 곳이다. 모두 금안동金鞍洞의 영안永安 마을에 위치한다. 영모재永慕齋에는 겸산

이병수 선생兼山李炳壽先生의 영모재기永慕齋記가 걸려 있다. 공公은 실로 충忠과 효孝를

몸소 실천하시고 귀감龜鑑이 되신 위대한 조상祖上이시다.

1) 手札 : 손수 쓴 글 2) 曝. : 바람을 쐬고 볕에 말림 3) 齋宿 : 祭官들이 齋戒하면서 하룻밤을 보냄

42

默齋公 諱 訥 行狀

공公의 히諱는 눌訥 자字는 경여景汝 호號는 묵재默齋이고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문인門人이다. 경무공景武公의 현손玄孫이며 사례당공思禮堂公 염조念祖의 장자長子인데

출계백부出系伯父하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온화하며 순수하였다. 효성孝誠

이 지극하여 정성스럽게 지체志體를 받드니 시인時人이 탄복하여 “오! 정생鄭生이

여! 하늘이 낸 효孝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했다. 따라서 문정공文靖公과

경무공景武公의 후예後裔로서 사례당思禮堂과 묵재공默齋公의 효孝가 있으니 가위可謂

충효상전忠孝相傳이라 했다. 아우인 일헌逸軒과 창주滄洲와 더불어 효경孝經 및 출사표

出師表를 강론講論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충효忠孝와 시례詩禮 세업世業의 정훈庭訓을 이

어받아 사친事親을 증자曾子처럼 사군은 무후武帿(제갈량)처럼 해야 진정한 효孝와

충忠이라 했다. 학행學行으로 숭인전참봉崇仁殿參奉이 제수除授되고 후에 나주도훈장羅

州都訓長이 되어 후학後學들에게 학업學業을 권장勸.하면서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고

기강紀綱을 바로잡으며 옥석玉石을 가리니 상대방이 시기猜忌한바 되었다. 이때 향

교鄕校 앞에 있던 은행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니 이것으로 제기祭器를 만들었는데 여

러 사람의 입방아에 올랐다. 이 무렵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는데 종묘서령宗

廟署令의 임명에도 부임하지 않으니 정순붕鄭順鵬의 탄핵을 받아 경상도 함양慶尙道咸

陽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슬하膝下의 자녀子女가 모두 어린데 슬피 울며 뒤를 따

랐으니 온 집안이 타향 길 변방으로 옮기게 되어 조상祖上의 제사를 적소謫所(귀양

살이 하는 곳)에서 모실 수 없어서 중제仲弟인 일헌공逸軒公이 선영先塋을 받들게 되

었다. 공公은 자녀에게 유언하되 “향사鄕事에 참여하지 말고 남의 시기猜忌함을 조

심하라.”하였다. 선영을 받들지 못하는 한恨과 부모父母님을 앞서가는 불효不孝를 저

지르며 관棺으로 돌아오니 비록 혼백魂魄이라도 어찌 가슴이 메지 않았으랴! 그러

나 반장返葬함은 당연한 이치니 이 원한을 현사제賢舍弟 정랑正郞, 서천舒川에게 전하

면 이 백골의 원한을 풀어주리라 하였다. 묘지는 새로운 산山을 택했으니 나주羅州

43

북문北門밖의 마안치馬鞍峙 동향원東向原이다. 연산 갑자(1504) 7월 9일생이요 명종明

宗 무신戊申(1548) 3월 13일 졸卒하니 향년享年 45세이다. 배配는 유인창녕성씨孺人昌

寧成氏이며 부父는 참봉參奉 수재壽載 조祖는 장령掌令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근覲이며 증

조曾祖는 문장文壯 전한典翰 진晉, 화천부원군花泉府院君 대용大庸의 7세손이다. 연산 임

술(1502) 9월 7일생이요 선조 임신(1572) 5월 11일 졸卒하니 향년享年 71세이며 묘

墓는 쌍조雙兆이다.

묵재공默齋公 일헌공逸軒公 창주공滄洲公 3형제분兄弟分이 살아계실 때는 우애友愛가

매우 돈독敦篤했음을 여러 기록記錄에서 살필 수 있다. 1988년에 호조판서戶曹判書

휘諱 초初와 함께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44

寄呈義兵從事之行

일헌공逸軒公 휘諱 심諶(1520-1602)

이 글은 일헌공逸軒公(휘諱 심諶)께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출정出征에 즈음하여

사기를 진작 . 격려하기 위해 쓰신 글이다. 원문原文은 생략하고 번역문만 올린다.

아― 하찮은 남자의 부르짖음도 하늘에 감동함이 있거늘 하물며 이제 우리 동

지들의 의거는 그 원수됨이 나의 부모형제 혈속에게 있음에랴! 이에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선령들이 의지할 바를 잃었으며 만백성이 죽임을 당하여 그 원혼이

강산을 덮었으니 통곡함이 어찌 정을 베푸는 데만 있을 것이며 슬피 우는 것이

설움을 발설함에 무관하리요. 다만 하늘만을 원망함은 보탬이 없고, 천정을 쳐다

보며 탄식만 하는 것도 보탬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손이 묶여 대책이 없으니 후

회함이 이를 데 없도다. 오늘의 행사는 의리를 각기 분발함에 있으니 어찌 권유함

을 기다리랴! 우선 혈서로 당장唐將에게 급한 사정을 알리고 원군을 청하여 빨리

달려와서 돕게 하고 우리 군은 진격만이 있고 물러남이 없어야 하니 발의 피를

싸맬 틈이 없고 배고파도 먹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때를 잃지 않고 급히 나아가

싸워야 하는 기회를 잃지 말지니 위로는 임금님의 압도적인 지지를 업고 다음으로

는 제장들의 협력을 얻어내며 그 다음엔 피를 토하는 충성만이 있을 것이니 생각

컨대 여러 군자君子들은 하늘에서 타고난 재주를 하나하나 오늘에 다하지 아니하

랴! 돌아보건대 나는 늙고 병든 몸이 사조四朝에 살아남아 난리를 만난 지 6년이니

모양은 죽고 마음만 살아서 이제 장군을 뵈올 날에 당하여 능히 서둘러 나아가지

못하고 장군의 진에 성공만을 빌며 난리를 당한 이후 읊은바 시詩 세 수를 아울러

써서 그간 끊어진 소식을 전하고 의병출정에 즈음하여 칼을 주는 뜻에 부치노니

칼은 장군의 수중에 있고 시詩는 나의 폐간肺肝에서 나옴이라. 이 시詩를 주는 뜻이

고금에 일반이고 피차에 다름이 없으니 바라건대 제군자諸君子는 감동하여 충정을

같이 하리라 믿는다.

45

逸軒公 諱 諶이 아우 滄洲公에게 보낸 편지글

창주공滄洲公의 무주현감茂朱縣監 재직기간在職期間이 1579년 11월부터 1582년 9월

까지 2년 10개월이니까 약 433년 전후의 돈독敦篤한 형제분의 우애友愛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書서

送송

舍사

弟제

1) 滄창洲주

아우 창주滄洲에게 써 보내다

病병

吟음

開개

戶호

望망

병중에 문을 열고 바라보니

花화

富부

在재

今금

朝조

오늘 아침 꽃이 만발하였구나

溪계

水수

無무

橫횡

酌작

시냇물도 마음대로 잔질할 수 없으니

思사

君군

不불

敢감

招초

그대 그리우나 감히 부르지를 못하네

舍사

弟제

仲중

愼신

生생辰진

酌작

아우 중신의 생신에 술잔을 들다

君군

家가

美미

酒주

倒도

春춘缸항 그대 집

좋은 술

항아리 기울여

流유

入입

愁수

城성陳진

陳진

降강

가슴에 들이키니 시원도 하구려

1) 舍弟 : 자기의 아우를 부를 때 舍弟라 하고 형을 부를 때 舍兄이라 함

46

洗세

盡진

八팔

年년

兵병

火화

苦고

8년의 병고兵苦가 씻은 듯 없어지니

自자

今금

長장

作작

醉취

無무

雙쌍

이제부턴 길게 취해 볼거나.

雨우

霽제

步보

庭정

書서

送송

滄창

洲주

비 갠 뜰을 거닐며 아우에게 써 보내다

紅홍

綠록

林림

中중

弄롱

歲세

華화

2) 붉고 푸른 숲속에 세월이 흐르니

杖장

履리

3)忙망

處처

又우

肩견

.사

4) 내가 사는 바쁜 곳에 또 도롱이 입었다네

山산

城성

督독

築축

無무

眉미

展전

5) 성 쌓기를 독촉함에 눈썹 펼 날 없는데

多다

事사

春춘

光광

入입

我아

家가

따스한 봄볕이 일 많은 우리집에 드누나

茂무

朱주

三삼

淸청

閣각

舍사

弟제

守수

宰재

時시

아우가 원으로 있는 무주茂朱 삼청각에서

翠취

崖애

丹단

.장

訪방

仙선

居거

6) 붉고 푸른 산 속의 원님 집에 찾아드니

好호

意의

扁편

隨수

客객

路로

初초

호의로 초행길을 인도하여 주었네

2) 歲華 : 세월, 광음, 햇빛 3) 杖履 : 훌륭한 어른들이 머무른 곳 4) 肩. : 도롱이(우장)를 걸치다 5) 眉展 : 찡그렸던 눈썹을 펴다 6) 仙居 : 청아한 주거, 아름다운 집

47

雲운

過과

繡수

簾렴

朝조

放방

鶴학

구름 지난 바단주렴 아침엔 학이 날고

月월

陰음

江강

閣각

夜야

聞문

漁어

달 어두운 강집 밤엔 어부 노래 들리네

灘탄

聲성

.오

石석

驚경

幽유

夢몽

돌을 치는 여울소리 깊은 잠을 깨우고

鈴령

유어

7)因인

風풍

送송

碧벽

虛허

8) 바람 불어 풍경소리 허공에 퍼지네

一일

入입

瓊경

樓루

9)三삼

夜야

宿숙

옥루에 한번 들어 사흘 밤을 잤으니

他타

年년

.당

得득

更갱

招초

書서

이후에도 혹 다시 불러주려나

7) 鈴語 : 풍경소리 8) 碧虛 : 푸른 하늘 9) 瓊樓 : 옥으로 장식한 집

48

.統制使李忠武

창주공滄洲公 (휘諱 상詳 1533-1609)

이충무공李忠武公이 전사戰死했을 때 창주공滄洲公이 만사輓詞를 지어 조문弔問했는

데 그 애절哀切한 글의 제목이다. 글이 매우 길어 원문原文은 생략하고 번역문만 싣

는다.

하늘은 신령을 모으고 땅은 잉태하여 영웅을 낳았도다. 벼락 같은 기개에 귀신

도 놀랐으니 파목頗牧의 지혜에 손오孫吳의 병법兵法이라, 일찍이 무술을 익히고 벼

슬길에 이름이 높았도다. 원이 되어 남쪽으로 왔다 잠깐 뒤에 수사水使 되네. 왜놈

이 침범하니 임진년壬辰年 여름이라.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양산陽山과 밀양密陽도 이어

서 떨어졌네.

그들은 돼지일까 구렁이일까 바다와 육지를 덮치고 승승장구하니 우리의 삼경三

京을 잃었도다. 임금은 몽진蒙塵하고 적세가 위급하니 방백수령方伯守令들이 항복하

고 달아났네. 공은 명을 받고 큰 배로 남하하여 군사를 주둔하고 적의 칼날을 막

아냈으니 백일白日을 뚫는 충성이요 일편단심 가득한 담력이며 하늘을 찌를 듯한

용기와 서릿발 같은 위엄이라.

창해에서 북을 치며 돛대를 달고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니 이름과 공훈을 시기

하는 자가 많고 훌륭한 업적을 도리어 거짓으로 꾸미고 남 몰래 뒤에서 해를 속이

며 원한을 품고 나타나지 않으니 하늘은 크게 노하고 군세는 억울했다. 보통사람

으로 책임을 대신하니(원균元均) 전략은 실패하여 군사는 줄어들고 한산閑山의 진

무너지니 영남에서 호남까지 위태로움 가득했네. 만백성의 주검이 길을 덮고 무서

운 불길은 하늘은 태웠으니 정유년丁酉年엔 전쟁이 더욱 참혹하더라.

그런 후에 다시 장군에게 책임을 명하니 공이 군권을 다시 잡고 자리에 오르더

라. 노를 고치고 돛대를 손 보며 식량을 갖추고 갑옷을 수선했다.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니 지원군이 도착하여 아군을 돕고 성원해도 적군은 구름처럼 많아서 이를

49

갈고 입술을 깨물며 재기를 노리고 요동까지 침범할 기세이더니 무술년戊戌年

(1598) 11월 19일 새벽이라 아군은 배 천 척을 노량에 배치하고 대기중이었으나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세였다. 그러나 장군은 약한 형상을 숨기고 자취를 두렵게

하여 휘하에 명을 내리니 모두가 죽음을 맹세하며 받들었다. 군사들은 삶을 잊고

죽음을 각오하니 사기가 충천했다. 돌격하는 함성에 일제히 돛을 달고 벼락천둥처

럼 공격하니 아군이 가는 곳마다 용이 오르고 호랑이가 뛰는 기세였네. 해신海神도

무서워서 떨고 지신地神도 넋을 잃었네. 피가 끓어 파도 되니 시체는 모기처럼 쌓

이고 겨우 배를 끌고 달아난 적 천백千百 중 일一이로다.

이처럼 부모형제와 백성들의 원수를 갚고 나라가 당한 부끄러움을 씻었는데 어

찌 생각이나 했으랴! 제갈량의 진陳에 별이 떨어지고 악비岳飛의 군사들이 눈물 흘

릴 줄을! 패주하는 왜적들의 독포毒砲를 맞아 피하지 못하고 전사戰死하니 산도 슬

퍼하고 물도 사모하며 새도 놀라고 구름도 수심터라.

오! 슬프다. 신령神靈이여! 큰 공을 세웠으니 큰 복을 받을지니 공은 비록 우리

를 잊을지라도 하늘은 어찌 공을 잊으랴! 편지글도 새롭고 말소리도 귓전에 있네.

오! 슬프다. 신령이여! 산하 같은 기운으로 창칼을 휘두르며 잔악한 적 막아내

고 나라를 지켰으니 영남엔 맑은 바람 호남엔 갠 달일세. 영호남간에 사철 동안

신령이여, 다시 돌아오소서. 자고로 누군들 생사가 없을까마는 살아서는 즐겁고

죽어서는 영화로운 자 몇몇이나 될 거나? 거동과 형체가 한번 막힌 뒤로는 찾을

곳이 없으니 몸은 비록 갔으나 이름은 영원하리!

상여소리 재촉하니 상여는 길을 뜨네. 곡哭을 하며 묘지 향해 오래도록 머물러

섰으니 오! 슬프도다. 흠향하소서.

50

滄洲公 逝去에 睡隱諱姜沆先生 輓詞로 弔問하다

창주공滄洲公께서 돌아가시니 수은휘강항1) 선생睡隱諱姜沆先生이 만사輓詞를 지어

친히 와서 조문弔問했다. 계곡휘장유谿谷諱張維2) 선생의 만사輓詞는 유실했다.

姜강

睡수

隱은

輓만

강수은姜睡隱이 만사輓詞를 지어 조문弔問하다

密밀

直직

昆곤

雲운

3)世세

有유

賢현

밀직(벼슬이름)의 후손들 대대로 어짊이 있으니

似사

公공

兄형

弟제

孰숙

隨수

肩견

공의 형제 같은 이 누가 어깨를 겨루랴

龍용

頭두

4)高고

選선

聲성

名명

重중

장원에 높이 뽑혀 성명聲名이 진중하고

虎호

節절

5)專전

城성

6)蕙혜

化화

傳전

금 부절 원님으로 은혜로운 교화가 전해지네

粉분

署서

早조

抛포

7)郞랑

吏리

筆필

관아에서 일찍이 벼슬을 던져버리고

白백

頭두

還환

坐좌

廣광

文문

氈전

8) 늙어서는 돌아와 고명한 스승 되었네

欒란

范범

9)向향

來래

10)同동

出출

自자

란欒과 범范이 본래 한 곳에서 나왔으니

計계

來래

淸청

淚루

濕습

秋추

天천

생각함에 맑은 눈물이 가을하늘 적시네.

1) 姜沆 : 1567-1618 字 太初 號 睡隱 官 工. 刑曹佐郞 文科及第 大儒學者 丁酉再亂 때 義兵將2) 張維 : 1587-1638 字持國 號 谿谷 諡號 文忠 朝鮮 中期의 名臣, 靖社功臣 新豊君 吏曹判書 大提學

右議政을 지냄 3) 昆雲 : 後孫4) 龍頭 : 壯元及第5) 虎節 : 금으로 된 부절 6) 專城 : 한 고을의 원 7) 早抛 : 일찍 버림 8) 文氈 : 학문하는 자리 9) 欒과 范 : 밝히지 못했다.

10) 向來 : 이제까지 종래

51

雙溪亭에서

쌍계정雙溪亭에서 일헌공逸軒公, 사암공思庵公, 창주공滄洲公 세 선생先生이 한날 한

자리에서 읊으신 글의 내용을 음미해 보고 세 선생先生이 쌍계정雙溪亭에서 만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1. 일헌공逸軒公 휘諱 심諶의 시詩(박사암朴思庵 선생과 함께)

2. 박사암朴思庵 휘諱 순淳 선생先生의 시詩 (쌍계정에서)

3. 창주공滄洲公 휘諱 상詳의 시詩(박정승朴政丞 사암선생思庵先生과 함께)

4. 세 선생先生(일헌공逸軒公, 박사암朴思庵, 창주공滄洲公)이 쌍계정에서 시詩를 읊

을 때의 연대年代 추정推定(1581)

5. 세 선생先生의 생졸生卒 연대年代와 시회詩會 당시의 연세年歲를 비교해 본다.

1. 逸일

軒헌

公공

諱휘

인심

의 詩시

(思사庵암

先선

生생

諱휘

朴박

淳순 과 함께)

城성

北북

牛우

鳴명

隔격

洞동

門문

성북, 소 우는 곳에 洞

이 열렸는데

亭정

中중

節절

日일

聚취

全전

村촌

명절엔 정자에 온 마을이 모였네.

桑상

麻마

只지

是시

輸수

閒한

話화

전원에선 한가로이 옛 이야기 오가고

魚어

菜채

髓수

宜의

辦판

野야.손 생선과 채소로 알맞게 음식을 갖추었네.

學학

士사

風풍流류傳전

聲성

遠원

학사들의 풍류는 멀리멀리 전해지고

壯장元원

名명

價가

.병

聲성

存존

과거에 장원한 이름은 풍류와 더불어 함께 있네.

52

兒아

孫손

扶부

醉취

看간

頭두

角각

손자들은 취하신 할아버지 모시며 의관을 살피고

一일

一일

修수

容용

入입

禮례

園원

일일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니 예의바른 동산일세.

. 굵은 자字는 운자韻字임

2. 朴박

淳순

思사庵암 先선生생 詩시

臨임

溪계

亭정

敞창

對대

山산

門문

시냇가의 정자는 산문山門을 향해 열렸는데

好호

會회

尋심

常상

自자

一일

村촌

평소에 좋은 모임 온 마을이 함께하네.

.재

宜의

稻도

梁량

供공

野야

酌작

마땅히 곡식은 들 잔치에 이바지하고

祇기

收수

蔬소

筍순

備비

盤반

.손

채소와 죽순을 거두어 밥상을 갖추었네.

丹단

砂사

1)有유

井정

人인

多다

壽수

단사에 우물 있어 동네 사람들은 오래살고

黃황

甲갑

標표

名명

俗속

尙상

存존

과거에 이름 올려 풍속은 옛날 그대로일세.

我아

欲욕

從종

君군

同동

結결

社사

나는 그대들과 결사를 함께하고자 하니

幸행

分분

花화

竹죽

與여

連련

園원 다행히 화죽花

함께 동산에 연

있네.

1) 丹沙 : 수은과 유황이 화합하여 된 붉은 빛깔의 흙, 황토

53

3. 滄창

洲주

公공

諱휘

詳상

詩시

滿만

.첨

新신

綠록

鎖쇄

溪계

門문

처마에 가득한 신록은 시내 문을 가리우고

幽유

境경

依의

依의

避피

世세

村촌

깊숙하고 고요한 경치 예처럼 속세를 피해 있네.

枕침

石석

午오

眠면

消소

盛성

煥환

돌베개로 낮잠 자며 더운 볕을 식히는데

鳴명

絲사

夜야

醉취

飽포

珍진

.손

거문고에 취한 밤 성찬에 배불렀네.

錦금

峯봉

春춘

色색

烟연

華화

逗두

금성산 봉우리엔 봄 안개 아름답게 머무르며

玉옥

澗간

閃섬

光광

月월

影영

存존

백옥처럼 빛나는 물빛에 달그림자 거기 있네.

誰수

道도

休휴

官관

2)無무

見견

一일

그 누가 이르던가 벼슬을 쉬는 이에 볼 것 하나 없다고

晩만

來래

投투

.불

是시

吾오

園원

늘그막에 벼슬을 버리면 이곳이 곧 나의 동산일세.

2) 休官 : 이 휴관은 1581년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세 분의 모임은 1581년이라고 추정한다.

54

逸軒公, 朴思庵, 滄洲公의 雙溪亭詩會 年代 推定

창주공 시詩의 8구句 중 7구句에 휴관休官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벼슬을 잠깐

쉬는 동안인데 휴관休官 중에 모임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창주공은 언제 휴관

休官이 있었을까? 공의 연보年譜를 살펴보면 1580년∼1582년(만2년간) 휴관休官이

있었다. 그러면 세 선생의 시회詩會는 1581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 선생의 생졸년대生卒年代와 시회詩會 당시의 연세年歲를 추정한다.

여기에 반환공盤桓公 홍천경洪千璟 선생을 추가했다.

일헌공逸軒公(휘심諶)께서 송간松磵(홍천경洪千璟) 선생이 과거科擧 보러 갈 때 보

낸 시詩(일헌공께서 송간 선생보다 33세 수상手上이다.)

贈증

洪홍松송

磵간

千천璟경 會회試시

之지行행

說설

貧빈

詩시

不불

艶염

구차함을 노래하는 시는 곱지 않으나

嘯소

憤분

.일

生생

.망

분발하면 둔한 칼에서 예리한 칼날이 나오네.

行행

轍철

應응無무.억 행차함에 험한 산(어려움)이

없고

春춘風풍入입

洛낙

陽양

봄바람은 한양으로 불어오네.

네 先生1581年 詩會 當時의 年歲

(1520∼1602)83 62세:吏曹正郞을 사임하고 있을 때임

(1523∼1589)67 59세:思庵선생은 1579년에 이미 領議政이 되었다.

(1533∼1609)77 49세:滄洲公은 당시 茂朱縣監이었다.

(1553∼1641)89

29세:盤桓公은 49세에 進士, 57세에 文科 壯元及第했

으니 盤桓公은 이때 아직 進士도 되지 않았다.

55

壽亭은 누구일까

호금공護錦公 정여린鄭如麟 장군將軍(1564-1640, 77세)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정승이 호금공護錦公(휘諱 여린如麟)에게 드린 시詩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有유

眼안

初초

見견

公공

공을 처음 대해 보니

堂당

堂당

丈장

夫부

風풍

당당한 장부의 풍채로다

角각

鬚수

壽수

亭정

似사

긴 수염은 수정과 같고

虎호

首수

司사

馬마

同동

범 같은 머리는 사마의 같네

有유

意의

天천

必필

挺정

하늘은 뜻이 있어 이 분을 내었으니

無무

憂우

國국

將장

隆융

나라에 근심은 없어지고 융성하리라

得득

人인

賀하

元원

帥수

인재를 얻었음을 원수에게 축하하니

早조

晩만

成성

大대

功공

장차 큰 공을 세우리라 라고 읊었다.

위의 글만 봐도 호금공護錦公의 비범한 풍채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글에서

수정壽亭은 누구일까를 알고 싶어 여러 해를 찾았다. 십팔사략十八史., 춘추좌전春秋

左傳 등 중국사기를 들춰보고 여기저기 물어봤으나 수정壽亭이 누구인지를 알아내

지 못하다가 1979년 8월30일 삼국지三國志를 읽으면서 수정壽亭이 누구인지를 알게

56

되었다. 수정壽亭은 유비 현덕, 장비와 함께 도원에서 결의형제를 맺은 관우關羽 운

장雲長의 호號였다. 관우 운장은 아름답고 긴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와서 미염공

美髥公이라 했다고 한다. 호금공護錦公의 수염도 이처럼 길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호금공이 선조대왕을 배알할 때 공公이 그 긴 수염을 옷섶에 감추었다. 왕王이 이

것을 보시고 물었다.

“왜 수염을 감추었는가.”

“어전御前에서 차마 수염을 드리울 수 없었나이다.”

왕은 수염을 내어보라 명命하시고는 그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보고 놀라시며

“그 자랑스런 수염을 감추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또 윗글에 나오는 사마司馬는 위魏의 대장군 사마의司馬懿를 이름이니 이는 촉한蜀

漢의 제갈공명과 재주와 지혜를 겨루던 분이다. 호금공護錦公을 이처럼 관운장과 사

마의에 비긴 것만 보아도 공公의 특출한 인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7

護錦公 軒號 發見

지금까지 도호부사휘여린공都護府使諱如麟公의 헌호軒號를 몰랐다. 그것은 아마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와 그 이후에 남해바다를 중심으로 약 20년, 또 여진족을 막아

내기 위해 북쪽 국경지대에서 약 20년을 국난國難의 최전방을 지키면서 마지막 임

지인 경원慶源에서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 재임再任으로 이곳에서만도 만 10년을

복무하였기에 고향에서는 호號를 부를 기회가 없어서 임지명任地名을 따서 정경원

댁鄭慶源宅으로 또는 경원공慶源公으로 경원慶源이 호號인 것처럼 지금까지 전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2003년 6월에 인산정씨세록麟山鄭氏世祿을 읽어보던 중 나주정씨羅州

鄭氏 현조顯祖의 헌호軒號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하였다.

“諱 可臣-號 雪齋, 諱 初 號 三不義, 諱 軾 號 永慕亭, 諱 念祖 號 思禮堂, 諱

訥 號 默齋, 諱 諶 號 逸軒, 諱 詳 號 滄洲, 諱 如麟 號 護錦”이라는 기록이었다.

필자는 이 호금護錦이라는 호에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정여린鄭如麟 장군께

서는 당시에 항상 호남湖南을 대표하셨는데 나주의 금성산은 호남의 상징이었다.

호금護錦은 곧 금성산錦城山, 즉 호남湖南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홍반환공洪盤桓公(휘諱

천경千璟)께서도 공이 돌아가시자 “公在鞍洞重公歸錦城輕”이라 읊었다. 이 글의

뜻은 “공이 계실 때에는 금안동이 무겁더니, 공이 가시니 금성산도 가벼워졌네.”

라는 뜻이다. 이 글만 보아도 공公이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늦게

나마 호號를 발견했으니 이 호號를 불러드려야 옳을 것이다.

58

護錦公諱如麟 將軍의 갑옷에 붙은 鐵鱗을 챙기다

1971년 1월 3일이었다. 이 날은 영안촌永安村 영모재永慕齋에서 연말年末 문중회의

門中會議가 열리는 날이었다. 우리 문중門中에서는 귀중貴重한 문화재인 호금護錦공의

‘투구철갑’을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보관해 오고 있으나 관리 소홀로 ‘銀투구’는 중년

中年에 분실하고 ‘갑옷’만 남았는데 역시 또 관리 소홀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서원書院에 가보면 제명문齊明門의 오른쪽 처마 밑에 가마를 놓

아두었고 그 안에 ‘갑옷’을 보관했는데 비가 들쳐도 아무렇게나 함부로 놓아두었

다. 그때만 해도 남색의 두꺼운 천에 철린鐵鱗이 많이 붙어있는 낡은 ‘갑옷’이 있었

는데 그때는 어릴 때였기에 그렇게 귀중한 물건인 줄을 몰랐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갑옷’을 찾아보았으나 그나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원출입書院出入을 많이 한 분에게 물어봤더니 영모재永慕齋 방안 벽장에 있을 것이

라 해서 벽장문을 열어봤더니 완전히 버려진 채 철린鐵鱗만 여기저기 몇 개가 흩어

져 있었다. 귀중한 문화재를 그렇게 소홀히 취급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나는 철린鐵鱗 13개를 수습하여 소중하게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날 밤은

매우 춥고 눈보라가 몰아쳤으나 그 철린鐵鱗에서는 훈훈한 기운이 솟아나 따뜻하

게 나를 감싸주었다.

영모재永慕齋의 기둥에는 이런 현판이 붙어 있다.

丞승

相상

祠사

堂당

何하處처尋심 정승의 사당을 어느 곳에서 찾을꼬

錦금

館관

城성外외

柏백

森삼

森삼

금성관 성 밖에 측백이 우거졌네

59

巷항

柳류

園원

桃도

依의

舊구

在재

마을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예처럼 여전하고

御어

書서

寶보

甲갑

尙상

存존

傳전

어서御書와 보배로운 갑옷은 지금까지 전해오네

위의 글로 봐서 우리 문중에 전해오는 어서御書와 호금공護錦公의 갑옷을 얼마나

귀중한 유산遺産으로 받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보관은 그렇게 허술했던

것이다.

60

護錦公께서 忠祠逸에 配享된 經緯

충일사忠逸祠는 1800년(경신庚申)에 세워졌으며 충무공 이순신忠武公李舜臣, 용천방

어사 정여린龍川防禦使鄭如麟, 무숙공 최희량武肅公崔希亮 등 세 분 장군을 배향配享했다.

1788년(무신戊申)에 공公의 5세손 수일秀一, 해일海一, 한일漢一 택일澤一 등이 사우

祠宇 배향配享을 간청懇請하는 상소上疏를 올리고 1789년(기유己酉)에 도내道內 진사進

士 박찬혁朴燦赫, 염종신廉宗愼 등이 또다시 나주목사羅州牧使 이정모李廷模를 거쳐서 관

찰사觀察使 서용보徐龍輔(훗날 영의정領議政)를 통해서 조정朝廷으로 장계狀啓가 올라가

고 드디어 1804년(갑자甲子)에 충일사忠逸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이때의 상소문上疏文

에는 부산포주사호군로공도釜山浦舟師.軍勞功圖와 화왕성동고록火旺城同苦錄 등을 첨부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배향이 되었는데 1868년(고종5)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훼철령書院毁撤令에 따라 훼철毁撤된 후 지금까지 복설復設을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최희량 장군崔希亮將軍의 후손들이 단독으로 무숙사武肅祠를 복설復設했다.

충일사忠逸祠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다

공公의 8세손 휘諱 병순炳淳이 주간主幹하여 최씨崔氏측과 함께 충일사忠逸祠가 훼철

된 지 3년 후인 1871년에 충일사忠逸祠가 있던 그 자리에 비각碑閣과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오래도록 후세後世에 알리고자 했다. 지금은 그때의 유허비遺墟碑가 무숙사武肅

祠 경내로 옮겨져 있다. 1868년에 사당祠堂이 훼철되고 7년 후인 1875년 2월, 4월,

11월의 세 차례에 걸쳐 충일사忠逸祠의 위토답位土畓 6두락斗落을 최씨崔氏측 후손들

이 벌면서 내어주지 않아 소송이 있었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때 소송의 상대

방은 최광윤崔光胤, 최경국崔璟國이었다. 유허비遺墟碑를 세울 당시 휘 병순炳淳은 39

세, 휘 병현炳賢은 25세, 휘 병규炳規는 24세였다.

61

護錦公과 張晩都元帥의 關係 確認

1977년 12월 30일, 함평군咸平郡 사거리四巨里 나주정씨대동보수보소羅州鄭氏大同譜

修譜所를 찾았다. 마침 거기에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譜가 있었다. 평소에 한번

열람하고 싶었기에 대뜸 책을 들고 살펴보았다. 보고 싶은 내용은 호금공護錦公의

배위配位인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 할머니가 인동장씨仁同張氏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기

정麒禎의 여女로 되어있는데 이것을 직접 인동장씨仁同張氏 족보族譜에서 확인하고 싶

었던 것이다.

確認內容

麒기

禎정

字자

聖성

游유

生생

乙을

酉유

卒졸

甲갑

午오

享향

年년

七칠

十십

官관

至지

천통

訓훈

沔면

川천郡군守수

後후

第제

三삼

子자

晩만

元원

勳훈

推추

恩은

贈증

輔보

祚조

功공

臣신

領영

議의

政정

玉옥

城성

府부

院원

君군

張장

晩만

玉옥城성府부

院원

君군

女여金김

復부

慶경

慶경

州주

人인

女여鄭정

如여

麟린

羅나

州주

人인

子자

.즙

潑발

이와 같이 호금공護錦公과 장만도원수張晩都元帥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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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友堂 諱瀾先生 略歷

나주인羅州人 자字 양언陽彦 호號 죽우당竹友堂이며 일헌공逸軒公의 손자孫子이다.

. 1583년(선조16) : 금안동金鞍洞에서 출생出生하였다. 항시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재주가 출중하였다. 일찍이 집안에서 큰 가르침을 받으면서 문예文藝가 숙성夙成하니 조부祖父 일헌공逸軒公께서 매우 사랑하시며 집안의 큰 재목으로 기대했다. 여러 차례 과장科場에 나갔으나 운運이 따르지 않았다. 어버이를 정성으로 섬기고 또 백씨伯氏 덕천공德泉公(휘 미渼)를 부모처럼 섬겼다. 일찍이 송강松江 정선생鄭先生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涉獵하고 기옹홍명畸翁弘 溟과도의적道義的으로 사귀었다.

. 1636년(인조14) :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했을 때 공公은 54세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당숙堂叔 부사공府使公 여린 장군如麟將軍에게 고告하기를 “호적胡賊이 창궐猖獗하여 국세國勢가 창황하니 이때야말로 신하臣下로서 목숨을 바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부사공府使公이 충의忠義에 힘써라 하시며 갑옷과 투구를 주니 나주목사羅州牧使 죽남竹南 오준吳竣을 만나 무기武器를 배당

받아 북을 치고 깃발을 날리며 출정出征했다. 이때 뜻을 같이한 인물은 시서市西 김선金璇 홍진사남주洪進士南柱 나해봉羅海鳳 등과 재종제再從弟 양洋, 즙., 발潑 등 친족과 인근의 많은 의사義士들이었다. 이때가 1637년(인조15) 정월正月 13일이었으며 도호부사공都護府使公 여린 장군如麟將軍은 군량미軍糧米48석石을 보냈다. 그러나 치욕적인 화친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통곡北向痛哭하고 귀향했음

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올라 있다.

. 1656년(효7) : 6월 6일 졸卒하니 향년享年 74세였다. 돌아가시니 조산대부朝散大夫이조참의吏曹參議가 추증追贈되고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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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鄭氏門中의 及第하신 祖上님

. 문과급제文科及第

. 정가신鄭可臣 :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호號는 설재雪齋,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송수松壽의 자子. 고려 고종42년(1255)에 문과급제 첨의중찬僉議中贊(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해동금경록海東金鏡錄 : 역대 왕王의 치적을 밝히고 왕도王道정치를 권장했음)을 저술함. 중국에서는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존중했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82장에 설재공雪齋公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찬양하는 글이 올라 있으며 충선왕묘忠宣王廟에 배향配享됨.

. 정탁鄭倬 : 설재공雪齋公의 자子. 고려의 청백리淸白吏에 오르고 진주목사晉州牧使를거쳤음.

. 정경진鄭慶振 : 설재공雪齋公의 손자孫子. 충선왕忠宣王 때 등과하고 감찰監察이었음.

. 정초鄭初 : 설재공雪齋公의 증손자曾孫子. 1393년(계유癸酉)에 등제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름.

. 정식鄭軾 : 대호군大護軍 자신自新의 자子. 26세에 문과급제文科及第 41세에 중시重試에 합격함. 평안도체찰사平安都體察使 종사관從事官 때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수서手書가 두 차례 있었다(爾母得病上來相見). 세조世祖 때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야인평정野人平定에 큰 공功을 세움. 온천행궁溫泉行宮에 큰 불이 났을 때 왕王을 구해내 그 공로를 치하하고 왕王이 영정影幀을 하사함. 조정에서는 장덕위인長德衛人이라 했으며 나주북羅州北30리里 땅을 사패지賜牌地로 내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경무景武이다.

. 정심鄭諶 : 호號는 일헌逸軒 景武公의 玄孫 1568년(무진) 문과 급제. 吏曹正郞에 이르고 歸去來辭를 읊으며 사임함. 壬辰倭亂 때 의병에게 격려하는 글을 보냄.

. 정상鄭詳 : 호號는 창주滄洲 일헌공逸軒公의 제弟 1574년(갑술甲戌)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 봉정대부奉正大夫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이르고 1590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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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된 오현五賢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상소를 함.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모으는 격문檄文을 많이 쓰고 군량軍糧을 모으며 충무공忠武公 진陣에서 활약함.

. 정운형鄭運亨 : 호조판서戶曹判書 정초鄭初의 후예 극종克從의 7세손이며 임오壬午에 등과함. 현감縣監 청렴결백하여 어사御使의 포장을 받음. 3년간 벼슬살이에 낡은 옷만 한 벌 있었다.

. 정재교鄭再僑 : 극념克念의 13세손, 현감縣監. 정진鄭. : 棄齋公의 10세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무과급제武科及第

. 정석필鄭碩弼 : 판서判書 초初의 증손曾孫, 현감縣監. 정경조鄭敬祖 : 판서判書 식軾의 현손玄孫, 벼슬봉사奉事. 정여린鄭如麟 : 호號는 호금護錦 부사府使 상詳의 자子. 10년간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폐모廢母가 부당함을 상소上疏함. 固城 縣令으로 있으면서 고성향교固城鄕校를 중건重建함. 명明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행폐를 물리침.

. 정거세鄭巨世 : 대호군大護軍 전佺의 후예. 벼슬은 첨정僉正 임진란壬辰亂에 숙부 침琛백형伯兄 인세仁世와 함께 출전했다가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殉節함.

. 정령鄭. : 첨정僉正 거세巨世의 조카.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거세巨世와 함께 출전함.

. 정덕란鄭德蘭 : 경진慶振의 후예. 추파공의 자子, 벼슬은 판관判官. 정덕응鄭德應 : 덕란德蘭의 제弟. 벼슬은 첨정僉正. 정석鄭錫 : 판서判書 식軾의 후예. 종모재공終慕齋公(이상履常)의 현손玄孫. 교위校尉

. 정건鄭鍵 : 판서判書 식軾의 후예. 종모재공終慕齋公(이상履常)의 현손玄孫. 사과司果. 정종鄭鐘 : 판서判書 식軾의 후예. 종모재공終慕齋公(이상履常)의 현손玄孫. 선전宣傳. 정양鄭洋 : 호금공護錦公의 조카. 현감縣監. 정희서鄭羲瑞 : 호금공護錦公의 손자. 철원부사鐵原府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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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鄭僑 : 여해如海의 증손曾孫, 지중之中의 제弟. 사과司果. 정인숙鄭寅. : 부사府使 상詳의 증손曾孫. 교위校尉. 정석진鄭錫珍 : 판서判書 식軾의 후예.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에 도통장都統將으로 6전6승六戰六勝 해남군수海南郡守


.사마안司馬案 :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

. 정송수鄭松壽 : 설재공雪齋公의 아버지. 진사進士. 정춘신鄭春新 : 상서공 엄嚴의 증손. 진사進士. 정균鄭均 : 경무공景武公의 증손(근覲의 자) 1525년(중종20)급제. 생원生員 . 정효상鄭孝常 : 상서공의 7세손 1495년(22세) 급제. 문장으로 울림. 진사進士. 정심鄭諶 : 호號는 일헌逸軒 1552년 진사進士, 1568년 문과급제文科及第.

. 정이상鄭履常 : 균均의 자子, 호號는 종모재공終慕齋公, 1555년 급제, 효행지극孝行至

極, 마을이름 정시동鄭侍洞도 여기에서 유래함. 생원生員. 정미鄭渼 : 일헌공逸軒公의 손자孫子, 1616년(광해8) 급제, 생원生員. 정혼鄭渾 : 호號는 삼옥헌三玉軒, 일헌공逸軒公의 손자. 1618년 급제. 용모, 마음씨,

문장으로 삼옥三玉이라 호號하다. 진사進士. 정비鄭備 : 일헌공逸軒公의 현손(익서翼瑞 자子) 1691년 급제 자子 도연道淵 진사進士. 정운태鄭運泰 : 국菊의 9세손, 1681년(숙종7) 급제 효성지극 진사進士. 정언박鄭彦博 : 인우寅佑의 손자 1721년 급제, 생원生員. 정언복鄭彦復 : 호는 치옹 인백寅伯의 손자. 1723년 급제, 문장으로 크게 울림. 진

사進士 . 정언을鄭彦乙 : 인우寅佑의 손자 1726년(영조2) 급제, 생원生員. 정태운鄭泰運 : 일헌공(逸軒公) 후예(인서麟瑞의 현손) 1733년(영조29) 급제 진사進士. 정언승鄭彦升 : 인우寅佑의 손자 1738년(영조14) 급제, 진사進士. 정언제鄭彦濟 : 인백寅伯의 손자, 치옹의 제弟 1726년(영조2) 급제, 진사進士. 정하일鄭夏一 : 호금공護錦公의 5세손, 1834년 급제. 생원生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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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上님들의 行錄을 찾아서

제1차기간 : 1980년 1월 31일~2월 2일(3일간)

장소 : 서울대학교 도서관

발견한 사실

◎ 호조판서戶曹判書 정초鄭初 (1345-1423, 79)

. 1408년(태종8) : 당시 제주濟州에는 큰 흉년이 들었는데 제주목사濟州牧使 겸 안무사按撫使로 보직되었다. 유례없이 큰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하늘에 정성껏 제사를 올리며 기도하여 땅 속에서 큰 물줄기를 얻어 물이 솟아오르니 그 물을 정천鄭泉이라 했고 그 물로 큰 들이 생기니 정평鄭坪이라 부르며 백성들이 기뻐했다는 치적을 남겼다.

. 1409년(태종9) :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 도진무에 보직함. 도절제사는 종2품 무관직으로 뒤에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이 한 건을 발견한 사실만으로도 매우 기뻤다.

. 1411년(태종11) : 한성판윤漢城判尹(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이 될 때 이숙번의 추천이 있었다고 왕조실록(王朝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 춘천부사春川府使 정자신鄭自新(1388-1440, 53) : 경무공景武公의 아버지시다.

. 1427(세종9) : 평안도의 경력1)으로 근무한 사실이 있음.

. 1431년(세종13) : 3월에 춘천부사春川府使로 재직 중 왕(王)이 비단옷 1벌, 노비,

1) 경력 : 조선조 때의 4품관직(관찰사의 행정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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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포 15필 여어리女.里 10필을 하사하였다. 이유는 꿩 잡는 매(송골松骨, 松.)를 많이 잡아서 나라에 바친 상이었다. 당시엔 각 도별로 매를 잡는 해청채포군海靑採捕軍이 조직되어 매를 잡게 했다. 공公의 아드님인 경무공景武公諱軾께서도 1459년(세조5)에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재직 중 송골松.을 많이 잡아서 나라에 바쳐 왕이 내관內官 이존李存을 보내어 비단옷 한 벌을 보내고 잔치를 크게 베풀어 공을 치하했다는 교지敎旨가 전해지고 있으니 부자父子분께서 같은 일로 상을 받은 매우 재미있는 일화이다.

제2차 기간 : 2002년 8월 20일~8월 23일(4일간)

장소 :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60-1), 규장각, 교

보도서관

다음과 같이 찾아낸 장소와 자료에 대해서 그 내용을 대략 기록한다.

1. 서울국립도서관(사료관)

1) 망우당忘憂堂 창의록倡義錄 서문序文(곽재우 장군 창의록 서문)

2)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1592년과 1593년의 군장병 명단 : 곽재우장군 휘하)

3)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 : 경남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며 생사를 같이한 명단

4) 화왕수성도火旺守城圖 : 화왕성을 죽음으로 지켜 낼 때의 상황을 그린 그림)

위 1), 2), 3), 4) 원본이 한 책으로 되어 있다. 내 집안에는 이 기록들의 필사본이 전해 내려왔는데, 이와 대조해 본즉 한 글자도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소장했던 기록이 더욱 소중함을 재삼 인식하였고, 이를 기록하신 5대조님께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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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의 창의록 서문은 관찰사觀察使 조현명趙顯命과 관찰사觀察使 김시형金始炯이 썼다. 그 글과 글씨가 천하 명문이고 명필이어서 더욱 소중했다.

2),3)번의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과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는 정여린鄭如麟 장군의 휘자諱字가 뚜렷하니 그 당시 영웅의 기상을 직접 뵙는 것 같았다.

4)번의 화왕수성도火旺守城圖는 내가 소장한 필사본에선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고 했는데, 그 그림을 살펴보니 당시에 화왕성火旺城을 사수死守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2.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에서 발견한 기록들

. 호금공護錦公 휘여린諱如麟께서는 평생에 세 번 정승의 천거를 받았다. 처음엔 오

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을 받았고, 두 번째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이

있었고, 세 번째는 좌의정左議政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이 있었다. 당시 좌의정左議政

정인홍鄭仁弘이 호금공護錦公을 왕에게 영남통제사(곽재우 장군의 후임)로 추천한

사실(왕조실록 광해7년11월12일자)을 발견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이는 곧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호금공護錦公을 동등한 인물로 추대

했다는 데 큰 뜻이 있다고 하겠다.

. 광해7년11월27일에는 왕王이 전교하기를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 정여린鄭如麟을

통훈대부에서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벼슬을 올림)하라 하였다.

. 광해13년10월30일에 용천방어사龍川防禦使 정여린鄭如麟에게 병력을 급히 충원하

여 당시 명나라 대도독 모문룡毛文龍이 피신해 있던 용천龍川 방위에 만전을 기하

라 전교했다. 이 또한 처음으로 발견한 귀중한 사료이다.

3. 규장각에서 찾아낸 기록

..휴와야담休窩野談..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내가 소장한 기록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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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광해7)에 공公은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가 되고 1617년에 정승政丞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광해군光海君의 패륜悖倫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귀양을 갔을 때, 이항복 선생과 공公이 만나서 국사를 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휴와야담休窩野談..에 실렸다면서 휴와休窩라는 號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규장각에서 도서를 열람하다가 ..휴와잡찬休窩雜纂..이라는 책을 발견하여 휴와休窩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휴와休窩는 임유후任有後의 호이며 자字는 효백孝伯 본관은 풍천, 선조34년(1601)생 24세에 생원, 진사, 양시합격 26세에 문과급제 관(官)은 부사府使 참판參判 도승지都承旨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냈다. 이번에도 장질長姪 우종遇鍾의 역할이 매우 컸다.

4. 인터넷을 통해 찾은 기록

서울의 장질長姪 우종遇鍾이가 인터넷을 통해서 호금공護錦公이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재직 시에 고성향교固城鄕校1)를 중건重建했음을 발견했으니 이 얼마나 장하고 통쾌한 일이던가.

1) 固城鄕校 : 이 향교를 護錦公께서 원님으로 있으면서 重建하였다.

소재지 : 고성군 고성읍 교사리(조선시대의 향교) 270-1

문화재 지정번호 : 경남 유형문화재 제219호 지정일자 : 1983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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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南의 名基 金鞍洞2)

逸軒公의 題 金鞍洞

일헌공휘심逸軒公諱諶께서는 금안동金鞍洞을 이렇게 읊었다.

學학

士사

遺유

.종

是시

舊구

村촌

학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우리 옛마을

家가

家가

苗묘

裔예

志지

行행

敦돈

집집마다 자손들의 뜻과 행동이 두텁구나

桃도

園원

柳유

巷항

依의

先선

樣양

복숭아와 버들동산은 예처럼 푸르고

樂락

事사

多다

稱칭

積적

致치

恩은

즐거운 일 많고 나라의 큰 은혜는 쌓였네

文문

靖정

當당

年년

仕사

大대

元원

문정공께서 옛적에 원元나라에 벼슬했고

華화

人인

爭쟁

慕모

願원

承승

言언

원元나라 사람들은 다투어 말씀 받들길 원했네

如여

今금

舊구

址지

多다

苗묘

裔예

지금까지도 옛터에 후손들이 많이 살고

山산

色색

溪계

聲성

昔석

日일

村촌

산빛과 시냇물 소리도 옛날과 같은 마을일세

2) 金鞍洞 : 羅州의 金鞍洞, 靈岩의 鳩林, 全北 新泰仁을 湖南의 三大名基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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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공휘상滄洲公諱詳께서도 금안동金鞍洞을 이렇게 읊었다.

“금안동金鞍洞은 옛날 나의 선조인 설재雪齋 문정공휘가신文靖公諱可臣께서 살으신곳이다. 공이 정승이 되어 금 안장과 백마로 마을을 출입했기에 마을 이름을 금안동金鞍洞이라 했다. 산과 물이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고 시내가 깊은 것은 마을의 형세요, 뜻이 돈독하여 글 읽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부지런함은 마을의 풍습이다. 좋은 절서와 좋은 계절을 만나면 젊은이와 어른들이 모두 모여 술동이를 옆에 놓고 녹음에서 활을 쏘니 이것이 군자의 다툼이로다. 맑은 물에서 술잔을 기울이되 덕장德將으로서 취함이 없고 쌍계정雙溪亭의 아름다운 경치와 두 못의 진상眞像은 주진촌朱陳村을 방불케 하며 무릉도원武陵桃源과 흡사하다. 어찌 보통의 다른 마을과 비교할 수 있으랴. 옛날부터 학자學者와 어진이가 많이 나서 벼슬이 이어지고 인후仁厚하고 순미淳美한 풍속을 이루니 난정수계蘭亭修.가 아니면 속세를 떠나 놀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청담淸談을 숭상할 뿐이로다. 문인재사文人才士가 전후하여 이어져 배출하니 가히 문헌文獻의 마을이라 하겠다.

위 글은 창주공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나주읍羅州邑에서 북쪽으로 15리 쯤에 명기名基 금안동金鞍洞이 자리 잡고 있다.

1897년 발간된 나주읍지羅州邑誌에서는 금안동金鞍洞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고려 때 정가신鄭可臣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원元나라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러 금안수축金鞍繡軸으로 고국에 돌아와 동네를 출입하므로 동네의 이름은 금안동金鞍洞이라 하였다.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우며 나무가 늙고 시내가 깊은 것은 마을의 형세요 시서詩書에 독실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부지런함은 마을의 풍속이다. 쌍계정雙溪亭의 좋은 경치와 두 시내溪의 아름다움은 주진촌朱陳村3)을 방불

3) 朱陳村 : 唐나라 白居易의 시 주진촌에 나오는 옛 마을 이름으로 화목하게 잘 지내는 마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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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 하며 무릉도원武陵桃源4)과 흡사하다. 인후仁厚하고 순미純美한 풍속을 이루니 난정수계蘭亭脩.5)가 아니면 속세를 떠나 놀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청담淸談을 숭상할 뿐이로다. 문인재사文人才士가 전후하여 이어져 배출하니 가히 문헌文獻6)의 마을이라 하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글은 창주공滄洲公의 글에서 따온 내용이다.

金금

鞍안

洞동

八팔景경

제1경 五오里리

林임

亭정

오리 길에 잇닿은 느티나무 길

제2경 千천年년

石석

柱주

금안동 어귀의 선돌인 천년의 돌기둥

제3경 半반月월

懸현

岩암

무잿봉의 큰 바위에 걸린 반달

제4경 雙쌍溪계

鳴명

瀨뢰

쌍계정 앞을 흐르는 여울물의 부딪치며 떨어지는 소리

제5경 山산店점

行행

人인

청산골을 돌아 떠나는 나그네

제6경 寶보寺사

歸귀

僧승

병풍산의 배뱅이골을 넘어 다보사로 가는 승려

제7경 錦금城성

紅홍

濕습

금성산 자락에 붉은 단풍과 저녁노을

제8경 瑞서石석

淸청

嵐람

무등산에서 피어오르는 맑은 아지랑이.

이 마을은 주씨와 진씨 두 성씨만이 살았는데, 서로서로 혼인을 맺어 대대로 화목하게 지냈다고 한다.

4) 武陵桃源 : 이 세상에 없는 별천지 즉 이상향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 아득한 옛날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중국의 명승지 5) 蘭亭脩. : 東晉의 書聖 王羲之 등 많은 명사들이 蘭亭에 모여 주연을 베풀고 詩를 읊던 모임 6) 文獻 : 옛날의 제도 문물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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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鞍洞에 있는 書院 및 祠宇와 亭子

◎ 서원書院

1. 설재서원雪齋書院

영평리 449번지 영안마을 위쪽 한적한 곳에 동향으로 위치한다. 이 서원은 설재雪齋 휘諱 정가신鄭可臣 선생을 모시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워졌으며 후에 호조판서戶曹判書 정초鄭初,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장申檣, 경무공景武公 정식鄭軾, 묵재공默齋公 정눌鄭訥, 일헌공逸軒公 정심鄭諶, 창주공滄洲公 정상鄭詳, 호금공護錦公 정여린鄭如麟, 죽우당竹友堂 정란鄭瀾을 배향配享하였다. 매년 음력 9월 25일에 유림행사儒林行祀가 이루어지며 1984년 2월29일 도유형문화재道有形文化財 93호로 지정되었다.

2. 경열사景烈祠

금안리 인천마을에 위치하며 고려말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낸 정지鄭地 장군을 모신 사당이며 1914년에 지었다.

3. 월정서원月井書院

금안리 광곡마을 378번지에 東南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1868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뜯긴 뒤 197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원래 이 서원은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학덕을 추모해 지었으며 김계휘, 심의겸, 정철, 홍천경 등이 추배되었다. 유림 행사로 매년 음력 3월 6일 제사를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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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현서원景賢書院

이 서원은 영평리 영안마을 589번지 산기슭에 위치하며 원래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모시기 위해 나주 서문밖 대곡동에 지었다. 정여창, 조광조, 이황, 기대승, 김성일 선생을 추배했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77년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매년 음력 2월 15일 유림행사한다.

5. 송산사松山祠

용산리龍山里757번지 송정마을에 위치한다. 석전石田 이병수李炳壽 선생을 주벽으로 나병집, 이민선, 신동욱, 임언규 선생을 모시고 매년 음력 2월 26일에 유림행사한다.

※ 순서는 금안동에 건립된 차례대로이다.

◎ 정자亭子

1. 쌍계정雙溪亭

금안리金鞍里 수각水閣 마을에 있으며 설재공雪齋公 휘諱 정가신鄭可臣이 지었다. 이곳에서 문정공文靖公 정가신鄭可臣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 문현공文顯公 윤보尹珤 세 선생이 강도講道한 곳으로 삼현당三賢堂이라고도 한다. 조선조에 호조판서戶曹判書 정초鄭初, 예조판서禮曹判書 정극기鄭克己,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신장申檣, 현감縣監 정계함鄭繼咸, 병조판서兵曹判書 정식鄭軾, 성천부사成川府使 홍수洪樹, 함평현감咸平縣監 정서鄭鋤,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의 오형제, 도사都事 성진成晉, 감찰監察 정확鄭穫, 이조판서吏曹判書 송천희宋千喜, 왕자사부王子師傅 김건金鍵, 이조정랑吏曹正郞 정심鄭諶, 호조정랑戶曹正郞 정상鄭詳, 참판.判 홍심洪深, 참의參議 홍천경洪千璟, 경원도호부사慶源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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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府使 정여린鄭如麟, 남강 김려金礪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여기에서 강학하였다.

2. 태평정太平亭

관풍정觀豊亭이라고도 했으며 지금의 태평사太平寺 근처에 설재공雪齋公이 지었는데 전해지지 않음.

3. 영모재永慕齋

병조판서兵曹判書 정식鄭軾 선생을 위해 지었다.

4. 어서각御書閣

병조판서兵曹判書 정식鄭軾 선생에게 세종대왕이 주신 두 차례 수찰手札을 봉안했다.

5. 영당影堂

병조판서兵曹判書 정식鄭軾 선생이 온천행궁溫泉行宮에 불이 났을 때 세조世祖 임금을 불 속에서 구해낸 큰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내린 영정影幀을 모셨다.

6. 척서정陟西亭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인천마을에 있으며 1915년에 정해일鄭海鎰(하동인) 공公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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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효사재孝思齋

금안리 광곡마을에 있으며 1915년에 하동정씨 후손들이 지었다.

8. 영사재永思齋

금안리 광곡마을에 있으며 1918년에 성천부사成川府使 홍수洪樹(풍산인) 선생의시제를 모시기 위해 지었다.

9. 만향정晩香亭

영평리 영안마을에 있으며 1919년에 서흥인 김종섭金鍾燮 공公이 지었다.

10. 영수각永受閣

영평리 영안마을에 있으며 서흥김씨의 문각門閣이다.

11. 서륜당敍倫堂

금안리 반송마을에 있다. 1921년에 지었으며 풍산홍씨의 문각門閣이다.

12. 귀래정歸來亭

금안리 인천마을에 있으며 일헌공逸軒公 정심鄭諶 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었다.

※ 순서는 건립년대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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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鞍洞의 書堂 이야기

구룡동서당九龍洞書堂

영안永安마을의 북쪽에 구룡동九龍洞이 있는데 이곳에 아주 옛날부터 서당書堂이 있어 많은 인재人材를 길러냈다고 한다. 호조판서戶曹判書 정초鄭初(나주인)가 11살때 (1356년) 섣달 그믐날 밤에 혼자서 밤이 깊도록 책을 읽는데 금성산 산신이 내려와 선생의 기량을 시험했다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호판공戶判公은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에게서 수업受業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박메(광산구 임곡면 박산리) 양한림梁翰林(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정4품 거오재공據梧齋公 양만용梁曼容) 이야기도 있다. 양공梁公이 청소년靑少年 시절에 이 서당書堂에 다녔는데 하루는 서당書堂에 가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장소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 양지편 마을 뒷등이나 되었던가 싶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 초빈草殯1) 밑에 도사리고 있는데 귀신들이 하는 말이 “여보게, 아무개 집에 산고가 들었다니 첫국밥 얻어먹으러 가세.” 하니

다른 귀신이 대답하기를 “자네나 다녀오게. 나는 지금 귀하신 양한림梁翰林이 오셔서 못 가겠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소년 만용蔓容은 그 말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훗날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한림翰林 벼슬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구룡동九龍洞 최전崔琠 선생 묘墓

1994년 11월 6일 고 정갑면故鄭甲勉 교장校長 발인일發靷日 장지葬地에 가서 최선생崔先生의 묘지墓地를 답사했다. 이때 영안永安마을의 친구 이치옥李致玉 씨의 안내案內

1) 草殯 : 어떠한 사정으로 葬事를 지내지 못하고 임시로 관을 이엉 따위로 덮어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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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받았다.

묘비墓碑는 조그마한 체석인데 “天啓七年三月門人立 成均進士崔琠之墓”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천계天啓 7년이면 1627년 정묘丁卯년이다. 이때는 인조仁祖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던 해이며 지금부터 388년 전이다. 쌍계정지雙溪亭誌 구좌목舊座目에는 최전崔琠 선생은 화순인和順人이며 경인庚寅에 진사進士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쌍계정雙溪亭의 서당書堂

쌍계정에는 1663년에 쓴 유생안儒生案2)이 있다. 이 서당에는 금안동 출신은 물론 원근遠近에서 많은 지망자가 모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수업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송講頌3)

. 강송講頌은 매월 삭망(초하루와 보름)에 실시하며 외우지 못하면 종아리 15대를맞고 계속해서 외우지 못하면 종아리 30대를 맞았다.

. 글짓기는 매월 10회

. 년 1회 백일장白日場을 열어 글짓기를 장려한다.

. 유생儒生(학생)으로서 학업에 태만했을 때의 규제와 훈학청訓學廳(학교)의 질서를 문란케 했을 때의 벌칙을 정하고 있으며, 가정에서 효도와 우애를 가르치고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에서 추로유풍鄒魯遺風(공맹사상孔孟思想에서 끼친 풍속)을진작했다.

. 쌍계정雙溪亭에서 여러 선비가 과거보러 가는데 격려하는 창주공滄洲公 휘상諱詳

2) 儒生案 : 수업 내용과 수업 방법을 적은 것 3) 講頌 : 글을 강독하여 외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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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시詩가 있다.

亭정

中중

簫소

鼓고

動동

悲비

凉량

쌍계정에 퉁소와 북소리 비량悲凉함이 진동하는데

四사

朶타

金금

蓮련

起기

異이

香향

네 송이 황금연꽃 이향이 풍겨나네(네 분이 과거보러 갔던 모양)

遼요

想상

禮례

園원

風풍

雨우

夕석

요상컨대 예원(과장)은 풍우석 같으리니

錦금

城성

應응

占점

壯장

元원

郞랑

금성의 선비가 응당 장원을 차지하리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에게 퉁소와 북소리 울려 환송하며 장원하고 돌아오길 바

라는 마음을 노래했다.

송산松山精舍의 서당書堂

송산정사松山精舍에는 겸산兼山 또는 석전石田 이병수李炳壽(양성인陽城人) 선생이

있었다. 이 선생은 학덕學德이 높아 전국에 이름이 울리어 사방의 선비들이 구름처

럼 모여들었으며 여기에서 고명高名한 학사學士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송산정사

松山精舍는 나중에 송산사松山祠로 바뀌었으며 나주시 노안면 금안동 용산리 757번

지에 위치하고 이병수 선생을 주벽으로 모시고 나병집, 이민선, 신동욱, 임언규,

정우익 선생을 배향配享했으며 매년 음력 2월 26일 제사를 지낸다.

인천仁川마을의 금양재錦陽齋 서당書堂

이 금양재錦陽齋 서당書堂도 역시 금안동의 인천仁川마을에 있었으며 1922년 창건

했는데 이때 나의 선친先親(휘 국채國埰)께서 36세 되던 해였다. 당시 가정형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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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사정이었는데도 공사중 목공들의 숙식을 거의 다 나의 선친께서 제공했다고 한다. 그때 서당書堂집의 재목은 나주시 문평면 기동에 있던 집을 뜯어 와서 지었는데 종로宗老이신 정상회옹鄭相會翁(자子에 우용遇庸, 자子에 달면達勉)께서 나의 先親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가아家兒의 교육敎育을 위해 사양치 못하고 그 어려운 일을 끝까지 감당했으며 1927년에 서당계書堂契를 창계創契했는데, 창계創契 당시 선친先親의 출자금出資金이 7원이었다. 이 돈도 끼니마다 밥해 먹는 쌀에서 조금씩 좀도리 받아서 마련했다고 한다. 이때 나의 사백舍伯 휘諱 동자회東會는 11살이었고 종형 從兄님 휘諱 지자회芝會께서는 13살이었다. 두 분 형님께서 소년시절엔 이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성년成年이 되어서는 송산정사松山精舍의 겸산兼山 선생에게서 수학修學하였다.

필자筆者도 어려서는 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다가 소학교小學校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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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代 加錄 內容 省察

1. 9대代 가록加錄의 시대적時代的 배경背景

신해보辛亥譜가 1731년(영조7)에 이루어지면서 사례당思禮堂 염조念祖의 아드님 눌訥, 심諶, 상詳 3형제분 중 장자長子인 참봉공參奉公 휘 눌訥이 효조孝祖의 양자가 아니며 종통宗統을 이을 수가 없다고 하여 장자長子의 위치를 상실했다. 여기에 분개한 참봉공參奉公의 자손들이 1823년(계미癸未 순조23)에 시조 이상으로 9대를 가록加錄한 일이 일어났으며 그 후 8년간 1830년(경인庚寅)까지 송사訟事가 이어졌다. 이는 신해보辛亥譜 이후 93년째의 해이며 지금부터 192년 전의 일이다.

2. 9대代 가록加錄의 내용內容

一世 보유寶儒 문하태보門下太保 인산부원군麟山府院君 시호諡號 충의忠懿(정1품)

배配 평산신씨平山申氏 부父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

二世흠欽문하시중門下侍中 인원부원군麟原府院君 시호諡號 문정文貞 예장禮葬(정1품)

배配인동장씨仁同張氏 부父 태사太師 시호諡號 충헌忠獻 정필貞弼 

三世진기震紀문하도판사門下都判事 (종1품)

배配전의이씨全義李氏 부父 상서尙書 수영秀英 

四世 환桓 판예부상서判禮部尙書 문하태위門下太尉 시호諡號 충렬忠烈 (종1품)

배配 연안차씨延安車氏 부父 중랑장中郞將 유영有榮 예장禮葬

五世 동철棟鐵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인산백麟山伯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시호諡號 문장文莊(정1품)

배配 함양박씨咸陽朴氏 부父 상서尙書 선善

六世 지池 수문하찬성사守門下贊成事(정2품)

배配 청주한씨淸州韓氏 부父 특진상서特進尙書 좌복야左僕射 혁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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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사인思仁 판밀직학사判密直學士 치사致仕(정2품)

배配 금성정씨錦城丁氏 부父 중랑장中郞將 혁재奕材 조부祖父 대장군大將軍윤종允宗

八世 찬燦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동상서사同尙書事 식읍食邑 삼백호三百戶(정1품)

배配 백천유씨白川劉氏 부父 병부시랑兵部侍郞 윤경允慶

九世 방일邦一 판밀직부사判密直府使(정2품)

배配 해주최씨海州崔氏 부父 평장사平章事 시諡 문숙文淑 유청惟淸

十世 해諧 군기감軍器監

배配 용인이씨龍仁李氏 부父 봉어광보태사奉御光輔太師 길권吉卷 7세손世孫

十一世 종산宗産 예빈경禮賓卿

배配 남원양씨南原梁氏 부父 공부랑중工部郎中 득겸得謙

十二世 송수松壽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호號 취죽당醉竹堂

배配 부부인府夫人 청주정씨淸州鄭氏 부父 감찰어사監察御使 현. 조부祖父 대장군大將軍 의.

十三世 가신可臣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예장禮葬

배配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 대부소경大府少卿 홍우녀洪祐女

9대代 가록加錄 내용이 위와 같으니 고위考位는 모두 일품一品이나 이품二品의 고관

高官이며 부원군府院君이 4분이고 2분은 예장禮葬했으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이 4분이다.

또 배위配位의 가문家門에 대해서 한국인韓國人의 족보譜)와 대조對照 비교比較해 보

니 다음과 같다.

一世 보유寶儒의 배위配位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始祖 (숭겸崇謙)가 부친父親이며

二世흠欽의 배위配位는 부부인府夫人 인동장씨仁同張氏의 도시조都始祖(정필貞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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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父親이며

三世진기震紀의 배위配位는 현부인縣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의 시조始祖 태사太師 도棹의 손孫 수영秀英이 부친父親임

四世 환桓의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 연안차씨延安車氏 중랑장中郞將 유영有榮이 부친父親이며(..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에선 못 찾음)

五世 동철棟鐵의 배위配位는 부부인府夫人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중시조中始祖 상서尙書 선善이 부친父親이며 

六世 지池의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가 란蘭이며 그의 증손曾孫 좌복야左僕射 혁奕이 부친父親이며

七世 사인思仁의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 금성정씨錦城丁氏 중랑장中郞將 혁재奕材(나주파羅州派의 이세二世)가 부친父親이며 대장군大將軍 윤종允宗의 손孫임

八世 찬燦의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 백천유씨白川劉氏 병부시랑兵部侍郞 윤경允慶이 부친父親이며(..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에선 못 찾음)

九世 방일邦一의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 해주최씨海州崔氏 평장사平章事 문숙공文淑公 유청惟淸이 부친父親임(..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에선 못 찾음)

十世 해諧의 배위配位는 현부인縣夫人 용인이씨龍仁李氏 봉어광보태사奉御光輔太師의 여女 시조始祖 길권吉卷의 7세손世孫

十一世 종산宗産의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 남원양씨南原梁氏 득겸得謙의 여女(공부랑파工部郎派의 이세二世)

3. 현現 족보와 대조 비교 및 이에 대하 소감所感

위와 같이 살펴볼 때 배위配位의 가문家門 역시 한결같이 남의 집 시조始祖나 혹은 중시조中始祖이며 현조顯祖이다. 고위考位나 배위配位의 가문家門이 이렇게 훌륭한 집안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몇 집이나 될까. 우리 나주정씨가문羅州鄭氏家門이 이토록 유례類例없이 좋아서 무엇이 나쁘겠는가마는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좀체 수긍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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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 나주정씨가문羅州鄭氏家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설재공雪齋公 한 분뿐인데 여기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네 분이며 다른 분도 모두 2품 이상의 고관高官이다.

둘째, 배위配位의 가문도 한결같이 훌륭하다.

셋째, 설재공雪齋公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설재공雪齋公의 장인丈人이신 안홍우安弘祐 공公이 설재공雪齋公을 사위로 맞으면서 “내 비록 가난하나 사족士族인데 어찌 향공鄕貢의 아들로 사위를 삼으요.”라고 한 기록이 있다.

넷째, 삼세三世인 송수松壽는 향공진사鄕貢進士이고 배위配位는 안의군부인安義郡夫人 정씨鄭氏 내전숭반內殿崇班 선瑄의 여女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전숭반內殿崇班은 고려 때 액정국掖庭局 남반南班4)의 종칠품從七品 벼슬이다. 위와 같이 고찰해 볼 때 우리 나주정문羅州鄭門의 상계上系가 그렇게 화려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현족보現族譜에는 시조始祖인 해諧와 이세二世인 종산宗産은 배위配位의 기록紀錄이 없는데 여기에는 기록이 있다.

여섯째, 삼세三世인 송수松壽의 배위配位는 안의군부인安義郡夫人 정씨鄭氏 내전숭반內殿崇班 선瑄의 여女인데 부부인府夫人 청주정씨淸州鄭氏 부父는 감찰어사監察御使 현.으로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4) 南班 : 고려 때 掖庭局과 內侍府에 딸린 관리. 東班 : 文官의 班列. 西班 : 武官의 班列. 朝賀(신하가

조정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하례함) 때 문관은 동쪽, 무관은 서쪽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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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克勤 先生의 人的事項을 알아내다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경무공景武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극근克勤이 경무공景武公의 스승인데 생전에 극진히 모셨으며 그의 사후死後에는 그 가족까지도 잘 돌봤다고 나와 있다.

나주인물지羅州人物誌의 사마안司馬案에서 극근克勤은 경주인慶州人이며 세종 계묘癸卯(1423)에 생원生員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나의 12대조 염조念祖의 빙부가 경주이씨 기묘명현己卯名賢 휘諱 해蟹이기에 그 가문家門의 기록을 살펴본바 극근克勤이 모산공茅山公 해蟹의 조부祖父였다.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서 1998년(무인戊寅) 9월 10일에 나주 영산동榮山洞에 있는 영강사榮江祠의 제관祭官으로 가게 된 기회에 경주이씨慶州李氏 족보族譜를 살펴 봤더니 해蟹(기묘명현)→석碩(부)→극근克勤(조부)이었으며 극근克勤은 “成均進士,墓 羅州 文平面 大道里 大將村 案山, 長城洞 乙坐 雙墳 有碣”이라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극근克勤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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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선생의 인적사항을 알아내다

필자筆者의 11대조 창주공滄洲公 휘諱 상詳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능양학사綾陽學士 정화鄭 선생이 창주공을 찬양하기를 “사방四方의 선비가 구름같이 모였으며 공을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분이 어떤 분인가를 오랫동안 찾았으나 알아내지 못하다가 1999년 8월 4일에야 알게 되었다.

서예원에서 글씨를 쓰다가 문득 능주향교지綾州鄕校誌를 발견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능양綾陽이 혹시 능주綾州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희망을 갖고 향교지鄕校誌의 인물편人物篇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정화 선생을 확인하였다.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정화鄭 : 자字는 증숙澄叔 광산인光山人 선조宣祖 을사乙巳(1605)에 진사進士 삼등三等 제오십구인자第五十九人者”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로써 선생은 능주綾州에 살았으며 능양綾陽이 능주綾州임도 알게 되었다. 우리 이웃집에 광주정씨光州鄭氏 노인老人이 살고 있어서 그 노인에게 가서 족보族譜를 빌려 정화鄭 선생의 기록을 찾아 재차 확인하였다. 선생의 휘자諱字인 화 자는 옥편玉篇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여서 무슨 자인지도 몰랐는데 족보에도 화 로기록되어 있으며 기록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정화鄭 : 자字는 증숙澄叔 선조宣祖 계묘癸卯(1603) 진사進士 수은睡隱 강항姜沆 만사중輓詞中 덕행가징德行可徵 배配는 순창조씨淳昌趙氏 부父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팽세彭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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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으로 보아 능양학사綾陽學士 정화鄭는 당시에 지체와 덕망이 높았으며수은睡隱 강항姜沆 선생과도 교제交際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창주공滄洲公 행장行狀에 오자誤字가 있음.

1992년(임신壬申)에 발간한 나주정씨대동보羅州鄭氏大同譜 권일卷一의 344쪽 창주공

滄洲公 행장行狀의 345쪽 12째줄 능양학사 정화鄭가 정매鄭.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매.는 틀렸으니 화 자로 고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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巡遠은 누구일까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때 경남慶南의 창원昌原에 있는 화왕성火旺城을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마침내 성城을 지켜낸 화왕성동고록火旺城同苦錄이 있어 여기에 실린 관찰사觀察使 김시형金始炯의 글을 번역하는데 제일 애를 먹은 것은 순원巡遠이 누구인지를 몰라서였다. 여러 모로 알아봤으나 알 길이 없었는데, 2008년 8월 27일(일요일) 순원巡遠이 누구인지를 알아냈기에 그 경위經緯를 밝힌다.

이런 구절이 있다. 한문공韓文公은 한유韓愈(768-824) 57세 중당中唐의 문호文豪 자字 퇴지退之 시호諡號 문공文公 당송唐宋의 팔대가八大家였다. 그러나 순원巡遠은 찾을 길이 없던 중 우연히 폐차蔽遮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다가 궁금하던 순원巡遠의 뜻까지 알 수가 있었다.

폐차蔽遮 : 막아내다, 가로막다.

宋송史사以이.수

陽양

蔽폐

遮차

江강

淮회

수양.陽은 당唐의 장순張巡의 별칭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성.陽城에 의거하여 안록산安祿山을 막았다. 이 두 분은 수양성.陽城을 사수死守하다가 성城이 함락陷落함에 따라 잡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꼭 알고 싶었던 순원巡遠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두 사람이며 당唐나라의 충신임도 알 수 있었다.

※ 강회江淮 :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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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賢堂의 發見

1972년 8월 25일이었다. 설재공雪齋公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문정공文靖公 휘諱 정가신鄭可臣과 문숙공文肅公 휘諱 김주정金周鼎, 문현공文顯公 휘諱 윤보尹珤 세 분 선생께서 함께 강학講學하신 삼현당三賢堂이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삼현당三賢堂이 어디인 줄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집에 전해오는 옛 문헌文獻을 살피다가 쌍계정雙溪亭을 바로 삼현당三賢堂이라 했다는 구절을 발견했다. 이후부터 쌍계정雙溪亭이 바로 삼현당三賢堂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듬해(1973년)에 쌍계정雙溪亭이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로 지정받을 때와 쌍계정지雙溪亭誌를 발간할 때 이 사실을 모두 기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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頗牧奇才요 日星忠義의 뜻을 알다

나의 9대조이신 효선공孝仙公 휘諱 발潑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으로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정철鄭澈의 자子) 진陳에 이르렀을 때 기옹畸翁이 효선공孝仙公을 향해 파목기재頗牧奇才요 일성충의日星忠義라 칭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파목기재頗牧奇才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는데 1999년 7월20일 천자天字책을 살펴보다가 “起.頗牧用軍最精”이란 구절에 이르렀다. 위의 글을 해석했는데 기起, 전., 파頗, 목牧은 군사를 매우 잘 다룬 장군이었다고 되어 있었다.

파頗는 염파廉頗, 목牧은 이목李牧이니 모두 조趙나라의 명장이었다.

염파廉頗는 BC240년 무렵 조趙나라의 명장으로 평신군平信君이었다. 이에 나는 그 어려운 말뜻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나의 9대조인 효선孝仙공에게 염파廉頗, 이목李牧과 같은 명장의 재질이 엿보이며 해와 별 같은 부자충성父子忠誠이라고 칭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연히 오래된 숙제를 풀게 되어 매우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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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禎 紀元後 .周甲의 計算法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後 5주갑周甲 계유癸酉라면 어느 때인가? 계산법은 다음과 같다.

① 숭정기원崇禎紀元 원년元年은 인조仁祖 6년(무진戊辰) 1628년이다.

② 숭정기원崇禎紀元 무진戊辰 이후의 첫 번째 계유년癸酉年 즉 1633년이 1주갑周甲이 되고, 거기에 60을 더한 1693년이 2주갑周甲, 또 60을 더한 1753년이 3주갑周甲, 또 60을 더한 1813년이 4주갑周甲, 또 60을 더한 1873년이 5주갑周甲이 된다. 그래서 숭정기원崇禎紀元 후後 5주갑周甲 계유癸酉는 1873년이다.


 著者 省菴 鄭吉會 略歷

. 全南 羅州市 老安面 金安里 出生

. 6 . 25 參戰勇士

. 敎職生活 40餘年

. 國民勳章 冬栢章 受勳

. 光州市展 推薦作家

. 韓國書家協會 會員

. 韓國美術協會 會員

. 羅州鄭氏大宗會 發展硏究委員長 歷任

 

羅州鄭氏 史錄 省察

2015년 5월 1일 펴냄

지은이 · 鄭 吉 會

펴낸이 · 金 善 植

펴낸곳 · 圖書出版 藝 苑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15

전화 (062) 222-7848, 070-7745-7848

FAX (062) 443-0860

http://www.yewonpub.com

E-mail:kssyw@hanmail.net

등록 · 1985년 9월 20일 제39호

省菴 鄭吉會

 


羅州鄭氏 史錄省察 鄭吉會 著.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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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砅涓鄭承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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