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世宗)조 초기에 대사헌(大司憲)과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던 정갑손(鄭甲孫) 선생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인 정오(鄭烏)는 효성이 지극하고 문재(文才)가 빼어났다.
정갑손(鄭甲孫)이 함길도(함경도의 옛 이름)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아들 오(烏)도 훤칠한 대장부(大丈夫)로 자라나 있었다.
정갑손 선생이 함경도 관찰사 재임 때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한양(漢陽)에서 한 달가량 머물다 함경도(咸境道)로 돌아와 밀려 있는 서류를 점검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發見)하였다. 그 사이에 치러진 향시(鄕試) 합격자 명단에 자기 아들인 '정오'의 이름이 ‘장원 급제자’로 적혀 있었다.
향시(鄕試)는 각 도 관찰부에서 치르는 지방 과거로, 향시에 급제하면 초시나 생원이 되어 한양(漢陽)에서 치르는 과거(科擧)에 응시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정갑손(鄭甲孫)은 즉각 향시의 출제위원들을 불러서 명령(命令)하였다.
“정오의 합격(合格)을 당장 취소(取消)하시오.”
그러자 출제와 채점을 하였던 위원(委員)들이 모두 항변하였다.
“채점은 공정했고 장원(壯元) 자격이 충분합니다.”
정갑손(鄭甲孫)의 태도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 관찰사(觀察使)로 있는 한 아들 '정오'는 합격(合格)시킬 수 없소이다.”
그날 밤 정갑손(鄭甲孫)은 셋째 아들을 조용히 불러 말하였다.
“정오야, 나는 네가 함길도 향시쯤이야 장원(壯元)을 하고도 남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들 ‘정오’ 역시 미소(微笑)로 답하였다.
“네, 아버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 후에 '정오'는 경상도(慶尙道) 외가(外家)로 잠시 내려갔고, 그곳의 향시에서 장원(壯元)을 하였으며 이듬해 한양에서 치러진 과거(科擧)에서 장원(壯元) 급제(及第)하여 어사화를 꽂고 함길도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