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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 Doctor Zhivago

제작년도 :1965년

공동제작 겸 감독: David Lean

주연: Omar Sharif, Julie Christie, Geraldine Chaplin

음악: Maurice Jarre

Total running time : 197 min.


Maurice Jarre-Main theme & Lara's theme from the Dr, Zhivago


(한 두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좌우의 이념갈등이 사라진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자국에서 자기가 심혈을 기우려 쓴 소설을 출판조차도 하지 못하고, 또 외국에서 간신히 출판을 한 소설로 그 영광스러운 노벨상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정권의 압력으로 그 상을 받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 일로 해외추방의 위기까지 겪었다는 게 도대체 사실로 믿어지기나 할까?
그러나 1957년에 이태리에서 처음 출판이 된 소설, “Doctor Zhivago”의 저자,“Boris Pasternak”(1890-1960, 러시아 모스코바)에게는 이 모든 것이 (서글픈)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나쁜 점만을 강조하여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었고, 당시의 혁명의 주인이었던 인민들을 중상모략 하였다는 것이 1958년에 있었던 “Pasternak 탄핵운동”의요지였지만, 주겠다고 한 노벨상(1958 년) 수상은 고사하고, 작가동맹에서도 퇴출 시켰고, 국외로 추방시키자면서 먹고 살길마저 막아, 2년 후, 결국 남의 집에서 자신이 쓴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Zhivago”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병사하도록 만든 그 서슬이 시퍼렀던 사회주의 종주국의 공산당 정권 역시 이제는모두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했던 당시의 그 사람들이 그렇게 반대하였던 “Doctor Zhivago”는 1959년, “Pasternak”가 와병중일 때,
의외로 브라질에서 먼저 TV 시리즈(“Doutor Jivago”)로 방영이 되면서
일반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또 그가 죽은 지 5년 후, 1965년에 발표가 된 이 “David Lean“감독의 대작 영화, ”Doctor Zhivago” 로 해서
대부분의 전 세계인들이 알게 되는 명작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서글픈)역사의 증거물로서 영원히 우리들 곁에 남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경찰이었다가 지금은 장군이 된“Yevgraf Zhivago”(Alec Guinness, 1914-2000, 영국)(위의 사진)가 자기의 조카를 찾는 첫 장면이 바로 이 영화의 크나 큰 문을 열고 닫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그 조카(소녀)의 부모인 “Yuri Zhivago”(Omar Sharif, 1932, 이집트 알렉산드리아)“Lara Antipova”(Julie Christie, 1941, 인도/ 영국국적)의기구한 운명의 사연들이 소년 “Yuri Zhivago”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부터 (회상의 형식으로) 시작이 되는데, 나중에 부인이 되는 “Tonya”(Geraldine Chaplin, 1944, 미국 CA) 의 부모의 도움으로 커서 의사가 되는 “Zhivago”는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날리게 된다.

한편, 죽은 아버지의 친구로서 홀어머니를 도와주던
“Victor Komarovsky”(Rod Steiger, 1925-2002, 미국 뉴욕)
에게
처녀성을 상실한 17세의 “Lara”는 러시아의 혁명을 적극 지지하는 좌파 대학생, “Pasha”(Tom Courtenay, 1937 영국)를 사랑하고 또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이런 와중에서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들 모두를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게 된다.


 


(우랄산맥에 있는) “Gradov”에서 소박한 결혼 생활을 하던 “라라”.
어린 딸, "카차"를 남겨두고 입대한 남편, “파샤”를 찾기 위해, 종군 간호사로 자원을 하게 되고,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군의관 “지바고”를 만나 6개월간을 함께 지내며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그만 헤어지게 된다.

한편, 부인, “토냐“와 아들, “사샤”가 기다리는 모스코바로 돌아온 “지바고”는인민위원회가 접수를 하여 13가구가 함께 사는 집에서 변한 시류에 적응을 하지 못해 고생을 하다가, “부르주아의 방종”같다는 그의 시에 대한 악평 때문에 숙청의 대상이 되자, 이복 형, “Yevgraf Zhivago”의 도움을 받아 우랄산맥에 위치한 도시,“Yuriata인근의 “Varykino”로 피신을 하게 된다.
(이 때의 10일간의 대륙횡단 열차여행 장면들 역시 이 영화에서는 매우 중요하다.)그런데 기구한 운명은 “Yuriatan”의 도서관에서 “지바고”와 “라라“를 재회하게 만들“토냐“에게 죄의식을 느끼면서 마치 두 집 살림을 하듯 왕복을 하던 “지바고”는 어느 날 갑자기 의사가 필요한 (좌파)빨치산에 의해 납치가 되면서 또 다시 기나 긴 이별의 시간, 2년을 더 보내게 된다.


 


한편, 이 사이에 “토냐“와 식구들은 “빠리”로 추방이 되고, 좌파인 赤軍의 사령관이된 “파샤”(“Strelnikov”장군)의 갑작스런 숙청으로 “라라“역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빨치산부대에서 탈출을 하여 흰 눈벌판을 걸어서 “라라“에게 다시 돌아온 “지바고”.“Varykino”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라라“를 위한 시집 집필을 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깐,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라라“를 평생을 그녀를 괴롭혀 온 ”Komarovsky”와 함께 극동으로 또 다시 떠나보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된(얼음궁전 같은 이층으로 얼른 뛰어가 창문을 깨고 흰 지평선 위로 사라져가는 썰매를 쳐다보던 이때의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인 이 영화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아래사진)

1920년에 내전이 모두 끝나고, 8년의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의 모스코바. 가족이 있는 “빠리”로 가지 않고 사랑하는 조국에 그냥 남아 모스코바의 한 병원에근무를 하던 건강이 약화된 “지바고”는 우연히 “라라”를 길에서 발견하고 그녀를 급히 뒤쫓아 가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만 쓰러지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 1918년 11월)이 발발하고, 또 전쟁 중인 1917년에 일어난 2월과 10월의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으로 야기된 내전,
즉, “Lenin"(1870-1924) 과 ”Trotskiy”(1879-1940)가 주도하던 적군(Red/좌파)과 서방국가가 지원하던 백군(White/우파)이 싸우던 내전(1917-1920)과 같은 시대적배경을 참조 하면, 그 Ural 산맥의 눈부신 설원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 등이 더욱 쉽게 이해가 되는 이 대하드라마는 놀랍게도 바로 비운의 작가, “Pasternak”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약 80%) 담겨져 있다.

유태인 중산층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모스코바/ 화가였던 아버지는 “라흐마니노”와 ”톨스토이“와도 친구사이였다는데, 이 ”톨스토이”는 “Pasternak”의 생애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27세의 나이에 첫 시집을 내자마자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지바고”같이 (1930년대의 출판금지 처분 등의)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Pasternak” 자신도 "토냐"로 묘사가 된 부인, “지나이다”와 함께 살면서, 1946년에 실제의 “라라”라고 할 수 있는 여인, “Olga Ivinskaya”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어 1956년도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이 대하소설을 완성하였다 하는데, “올가”는 “Pasternak”와의 관계로 인해 두 번씩이나 (대리 처벌로) 감옥에도 갔었다고 한다(1990년대 중반, 서방 언론과 인터뷰한 기록).“Il Dottor Zivago”라는 이태리어 제목으로 (1957년에) 출간이 되었던 이 소설은 “Pasternak”가 그토록 떠나기 싫어했던 조국에선 “고르바초프”가 집권을 하고난1988년에서야 모국어로 정식 출간이 되었다.(이 영화는 1994년에 개봉)


 


“Lawrence Of Arabia”(1962)의 촬영을 끝내자마자 “Pasternak”의 소설을 읽고,막 바로 다시 (前作과) 같은 팀을 구성해 제작에 착수한 “David Lean“(1908-1991, 영국) 감독(卿)은 이태리의 명배우, “Sophia Loren”의 남편이자 거물 제작자(이 영화의 공동제작자)인“Carlo Ponti”(1912, 이태리)가 요구한 “Sophia Loren”의 "라라"역 기용을 그 큰 키 때문에 단번에 거절하였다고 하지만, “토냐”가 역에서 입었던 분홍색 코트도직접 고르는 등, 아주 세밀한 분야까지 일일이 다 신경을 쓰고, 또 700 P. 분량의 원작소설을 284 P.로 각색(“Robert Bolt”가 미국 아카데미 각본상)하는 데만 1년을 소요할 정도로 모든 작업에 완벽한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1964년12월부터 1965년10월까지 촬영, 같은 해 12월22일 처음 개봉)
혁명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들 보다는 한 인간, "지바고"의 러브스토리에 더욱 초점을 맞춘 “Lean“감독의 예상은 적중하여 초기의 평단의 악평에도 불구하고대대적인 흥행성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66년, 제38회 미국아카데미상에서, 비록 감독상과 작품상을 “The Sound Of Music”(1965)에 넘겨주었지만, 5개의 상을 휩쓸면서 “David Lean“ 생애의 최고의 대표작이 되었고, 1991년의 그의 장례식에서도 바로 이 영화의 대사가 낭송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타악기 주자로 음악을 시작한 “Maurice Jarre”(1924, 프랑스 는 “David Lean“감독과 “Lawrence Of Arabia”로 이미 1963년에 손을 맞잡고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바있지만, 3년 후, 이 영화로 또 다시 그 영예를 누리게 된다.

처음에는 “지바고”와 러시아의 이미지로만 작곡을 한 여러 곡의 주제음악들이 전부 “Lean“감독의 불합격 통지를 받자, 포커스를 ”라라“에게 맞추고 등산을 하면서 산 정상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 드디어 OK 사인을 받은 Main Theme,



"Lara's Theme"은 정말로 유명해 질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훌륭한 영화음악의 걸작이다. 그리고 이 Theme을 기조로 하여 만든 전체적인 Original Score 도 “Overture”나 “Intermission”, “Entr'Acte”시간을 통하여 별도로도 들을 수가 있지만 마치 잘 만든 하나의 교향곡 같은 느낌을 준다.
이 "Lara's Theme"은 영화가 개봉을 하고 나서 이후, “Somewhere My Love”라는 제목으로 “Ray Coniff & The Singers”를(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많이 방송이 되었던 버전/아래 음악) 비롯하여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부른 인기 팝송이 되기도 하였다.


 


어린 “Yuri Zhivago”는 어머니가 죽자, 그녀가 연주하던 삼각형의 악기하나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는데, 평생을 소중히 보관하던 이 악기를 “지바고”는 마지막에 극동으로 떠나는 “라라“에게 주면서 영화 줄거리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Balalaika” 라는 악기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속 현악기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Yevgraf Zhivago”가 찾는 조카소녀가 이 악기를아주 잘 연주한다는 대사도 나오지만, 중요한 장면들에서 여러 번 보여 진다.)
“Lute”와도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도 만돌린처럼 연주를 할 수 있는 이 악기를“Maurice Jarre”는 "Lara's Theme"에 사용을 하면서 음악적으로도 러시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만들었는데, MGM 오케스트라와의 OST 협연 녹음 때는 할리우드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교인들, 22명이 자발적인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좌파) 학생들이 붉은 기를 들고 봉기를 하는 장면에서 이들이 합창을 하던“마르크스주의 찬가”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촬영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였지만,우리가 잘 아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당연히 이 장면은 삭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Omar Sharif”(1932,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의오랜 연기 인생에서 이 “닥터 지바고” 역 이상의 배역은 또 없다.

그만큼 완벽하게 “지바고”의 역할을 소화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처음에
“파샤”정도의 역할만 기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Lawrence Of Arabia”에서그의 재능을 인정한 “Lean“감독은 곱슬머리를 감추는 가발을 씌우고, 전체 얼굴을 위로 올리는 특수 분장까지 시키면서 Main Roll 인 그에게 감정과 반응을 최대한 절제하는 완전 소극적인 연기(Nothing To Do)를 주문하고 지도함으로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지바고”의 명연기를 창조하였다.

또한 “Lean“감독은 신인배우보다는 발레리나로서 더욱 유명하였던 “채플린”의 딸, 당시 20살의 “Geraldine Chaplin“을 주인공으로 기용하는 파격과 함께 같은 해의 ”Darling“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는 “Julie Christie“를 진짜 ”라라“로 만들면서 “Sophia Loren”의 질투를 유발하였지만, 정작 그에게 행운의 부적 같은 존재는 “The Bridge On The River Kwai”(1957)부터 연속하여 히트하는 “Lean“감독의 대작들을 쭉 같이 한 "Alec Guinness"였다.


 


이 영화하면 제일먼저 연상이 되는 그 끝없는 흰 눈의 벌판이 알고 보면 거의 다  가짜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지바고”와 “라라”가 잠시 피신을 하기위해 영화 후반부에 다시 찾은 “Varykino”의 그 집이 혹한 속에 얼음궁전같이 보이는 장면 역시 흰 왁스를 부어 만든 정교한 가짜라는 점과 (위의 사진) 더군다나 섭씨 38도 정도의 무더위 속에서 전체가 희고 흰 그 장면을 촬영을 하였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데, 영하 40도의 “Finland”와 “Sweden”에서의 잠깐 촬영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대부분을 스페인의 “Soria”에서 4계절 모두를 찍었다.

또 크렘린 궁과 거리 그리고 전차 레일까지 세밀하게 재현해 낸 세트역시 마드리드 인근의 “Canillas”에서 18개월의 공사 끝에 완성을 하였다고 하는데("John Vox"가 미국 아카데미 미술상 수상), 우리가 알고 있던 것 같이 “70mm 수퍼 파나비전”이아니라 그냥 “35mm 파나비전”으로 촬영을 하였다고 한다.

"Gone With The Wind"(1939) 같은 대작의 계보를 이으면서 한편으로는“Ben - Hur”(1959), “Lawrence Of Arabia”(1962), “The Sound Of Music”(1965)같이 초대형 스크린을 통하여 우리들을 감동케 하였던 이 작품이 개봉이 된 1960년대.이 시절이 할리우드 영화계의 최고의 황금기라고 쉽게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그러나 영화를 영화답게 제대로 감상하였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러브스토리를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추구한 이 작품속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러 분쟁국가에서)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 영화의 Art Director, “John Vox”의 얼마 전의 회고는 상당한 의미의 여운을 남겨준다.


 
 
출처 : 김 제 건 의 영화음악 이야기

Somewhere, my love
There will be songs to sing
Although the snow
Covers the hope of spring
Somewhere a hill
Blossoms in green and gold
And there are dreams
All that your heart can hold

Someday we'll meet again, my love
Someday whenever the spring breaks through

You'll come to me out of the long ago
Warm as the wind, soft as the kiss of snow
Till then my sweet
Think of me now and then
God speed my love till you are mine again

Now on my own, think of me now and then
God speed my love till you are min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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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砅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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