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대학원 신문에 실렸다는 글 하나를 포스팅한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2696
『연세대학원신문』 4월호(168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이 글의 직접적인 목표는 신문의 주독자인 대학원생들에게 랑시에르의 작업 전반을 소개하는 데에 있지만, 나는 여기서 보다 '개인적으로' 랑시에르를 읽는 하나의 간략한 '독서 지침'을 제공해 보고자 했다. 글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그 지침이란 '비교'와 '대조'라는 지극히 단순한 방법들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현대 이론의 지형 안에서 랑시에르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측량'해보는 데에 이만큼 간단하고 요긴한 방법론도 따로 없을 것 같다. 나는 독서에 있어 언제나 '전작주의자(全作主義者)'를 지향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작가에 한 번 '꽂히게' 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어 그의 저작들을 주제별로 혹은 연대순으로 일별해야 비로소 분이 풀리는(?) 이 악습에는 약도 없다(이에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낄 이들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악습이 '악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가장 '세속적'인 것, 곧 [이에 바쳐지는] 돈과 시간 때문일 것이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여유 시간'을 필요로 한다(일견 당연한 말이지만 '여유 시간'은 또한 '여유'와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로, 독서, 곧 책을 읽는 짓이란, 그 자체로 '철학/사유하는 자'와 '노동/생활하는 자' 사이의 괴리를 가장 첨예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혹은, 여기에 '예술/망상하는 자'라는 비뚤어진 자의식 역시나 함께 곁들여 씹어먹을 수도 있겠다). 나의 밤은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아니지만, 따라서 어쩌면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라고 눙치듯 말할 수도 없겠지만, 밤이라는 시간이 저 모든 사유/망상과 이성/감성과 말/몸이 섞이는 용광로임을 새삼스럽게 떠올려보면, 이 '뜨거운' 용광로가 어쩌면 이렇게까지도 '차가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끔씩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밤이다. 하여, 다시 옮겨놓는 글로 '억지로' 돌아오자면, 이 글의 주제는 사뭇 단순하다못해 극명하다: 읽자는 것. 하지만, 단순히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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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ㅡ '불화'의 관점에서 랑시에르를 읽는 한 방법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랑시에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의 방한 강연이 있었던 지난겨울 이후, 그리고 몇 종의 국역본들이 출간되었거나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새삼 문제가 되는 것은 일종의 '독서 지침'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랑시에르의 이름을 문제 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우리는 그의 책들을?'어떻게' 이전에?'왜' 읽어야 할까? 무릇 모든 독서가 그러하듯, 우리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랑시에르의 책을 펼쳐들고 거기서 그가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단어들이 어떻게 정의되고 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랑시에르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사실 저 '오래된 미래'의 단어들, 바로 '정치(politique)'와 '미학(esth?tique)'의 새로운 정의와 용법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역사, 미학, 정치와 평등 등의 주제와 함께 랑시에르를 읽는 몇 가지 독서 지침들을 공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방법에 대한 질문은 왜 읽는가라는 동기에 대한 질문을 이미 포함하게 되는 것. 비교와 대조를 통한 읽기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흔한 독서의 방법이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랑시에르의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식이?현대의 여타 이론들과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대립하면서?정확히 어디에 위치하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랑시에르 자신이 '불화'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역사 쓰기/읽기: 푸코와 함께 랑시에르를.
역사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개념과 함께 '정치와 미학의 관계'에 천착하는 랑시에르의 중심적 문제의식 안에서 하나의 이정표 혹은 출발점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찾는다고 하는, 곧 어떤 계급의식과 그 정체성의 성립을 탐색한다고 하는 순진하고도 직선적인 이론의 작업이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아포리아를 가장 수행적(遂行的)인 방식으로 전복하고 재정립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정체성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감성적/미학적' 해방의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가 쓰는 '노동자적'인 글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이 그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학적' 글쓰기의 형태들이며, 이러한 글들은 철학/사유하는 자에 대한 노동/생활하는 자의 '미학적' 해방의 주제를 드러내면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노동자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물론 어떤 계급의 정체성을 동일자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항상 대항계급과의 모방적/대립적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것은 어쩌면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차이'의 철학으로부터 랑시에르의 논의를 특별히 구분해주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해방'에 관한 담론이다. 가장 '미학적'인 것 안에, 곧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의문과 사유 안에 또한 가장 '정치적'인 혁명과 해방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랑시에르의 기본입장은 이미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정립되고 있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에서도 역시나 "노동자의 해방은 무엇보다 하나의 감성적/미학적 혁명"이었음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는 랑시에르가 편집한 『노동자의 말』과 『평민 철학자』를 함께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글을 뒤지는 랑시에르의 이미지는 여기서 광기와 감금의 역사적 기록들에 천착했던 푸코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 두 이름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우리는 '역사'라는 작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데, 기록물과 문서고 안에 거주하는 푸코와 랑시에르의 작업이 어디서 만나고 헤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 역시 독서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 재현과 숭고, 혹은 '분쟁'인가 '불화'인가: 칸트를 둘러싸고, 리요타르 對 랑시에르.
미학이란 무엇인가: 랑시에르에게서 미학은 항상 정치와 함께, 정치는 항상 미학과 함께 사유된다.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그의 논의는 예술의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일종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예술사회학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무엇보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문제,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분할하고 배분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는 미학에, 미학은 정치에 가닿는다. 『감성의 분할』과 『미학 안의 불편함』이 이러한 논의를 대표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랑시에르와 부르디외 사이의 차이에 주목해볼 수도 있지만, 그가 미학의 관점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철학자는 바로 리요타르이다. 리요타르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판은 결국 칸트에 대한 독해, 더 정확히는 『판단력 비판』의 독서와 숭고의 해석에 집중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칸트에게서 '숭고'가 능력들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라고 한다면, 리요타르에게서 그러한 숭고는 예술 안에 '실체화'된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비판의 요지이다. 재현할 수 없는 전복적 숭고의 힘을 긍정하는 어떤 '불가능성'의 사유와 예술은 정말 그 자체로 전복적인가? 아마도 랑시에르의 비판은 바로 이러한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에 대한 역사적이고 미학적인 '단절'의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게 하면서 다시금 우리에게 칸트에 대한 재독(再讀)을 종용한다. 또한 이러한 숭고의 개념과 관련하여 랑시에르는 재현 불가능한 것, 실재적인 것, '사물(la Chose)'의 힘을 강조하는 정신분석적 담론에 대립각을 세우며 예술의 미학적 체제 안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또한 랑시에르를 정신분석과의 불화와 대결 안에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이로부터 우리는 랑시에르의 미학 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비교 독서를 수행할 수 있다. 랑시에르를 정신분석과 함께 읽기, 그리고 랑시에르를 칸트와 함께 읽기가 바로 그것. 우리는 『감성의 분할』 외에도 이러한 맥락에서 또한 『미학적 무의식』, 『이미지들의 운명』 등을 읽을 수 있다.
▷ 발리바르의 '평등-자유'와 데리다의 '해체-정치' 사이에서 랑시에르를.
정치와 평등이란 무엇인가: 랑시에르 사유의 본령은 바로 이 주제 안으로 집약된다. 여기서는 소위 '차이와 타자의 윤리학'에 맞서는 '정치의 사유와 주체화의 과정'이 중심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불화'로서의 정치를 중시하는 랑시에르에게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회라는 어떤 이론적인 흐름은 그 자체로 징후적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에 대한 랑시에르의 논의를 레비나스의 윤리학이나 데리다의 정치철학과 비교 혹은 대조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법적이거나 제도적인 문제라기보다 다양한 주체화 과정들의 장소, 대립적이고 역설적인 행위의 방식 그 자체이다. 여기서 또한 미학은 정치와 함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핵심적 개념 안에서 정치는 무엇보다 미학적/감성적 분배 방식을 문제 삼는 과정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그리고 무엇보다 『불화』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후쿠야마 식의 정치와 역사의 종언에 대한 테제들, 그리고 슈미트를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 대한 테제들과의 만남 혹은 대결의 관점에서 랑시에르를 읽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러한 독서는 해방의 주제와 관련하여 라클라우나 무페 등 이른바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가들과의 비교도 가능케 한다. 그에게서 평등의 전제가 중요해지는 것도 그것이 바로 이러한 해방의 기획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해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방법의 측면뿐만 아니라, 해방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인식할 것인가 하는 정의의 측면에서 또한 우리는 랑시에르의 논의에 주목하게 된다. 해방과 관련하여 랑시에르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바로 지적 능력의 평등인데, 여기서 평등이란 불평등의 차이를 최대한 줄여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먼저 전제되어야 할 하나의 정치적 원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무지한 스승』과 『해방된 관객』을 읽을 수 있을 텐데, 과거 알튀세르의 자장 안에 함께 있었던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논의와 랑시에르의 '평등'을 비교해보는 일 또한 가능할 것이다.
▷ 적대와 불화, 혹은 '종언'인가 '귀환'인가: 라클라우와 무페를 엇걸어 랑시에르를.
비교와 대조를 통해 본 이러한 세 가지 독서의 방법은 각기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고 반복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독서는 가장 현재적이며 또한 가장 정세적인 요소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미학에 대한 독서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과 배분으로서의 정치 과정을 인식하게 하며, 그리고 정치와 평등에 대한 독서는 해방의 정의와 향방에 대한 물음을 내포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현재의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안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어떤 의지 안에 아마도 우리가 랑시에르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독서법이 존재할 것이다. 반복하자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또한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기에.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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