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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許政1896.4.81988.9.18)

정치가부산시 동구 초량동 출생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 1919년 31운동 당시 직접 시위에 참여하였고이어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세계적인 안목을 넓히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갔으며그 곳에서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이 되었고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뉴욕에서 공부도 하면서 생업에 종사하였고특히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직접 도왔다.

1922년 미국의 한인교민총단장이 되었으며미국 교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창간된 [31신보]의 사장이 되었다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관여하였으며 좌익에 맞서 우익의 표적인 정객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 부산 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교통부장관이 되었으며이어 19501952년에는 사회부장관으로 전시의 혼란기에 수많은 이재민과 고아들을 돕는 정부의 정책에 헌신하였다. 19511952년에는 국무총리서리, 1957195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또한자유당 말기인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활약하였다그의 정치활동 중 가장 각광을 받았던 것은 1960년 419혁명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을 때였다.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 이 시기 한국정치사회의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과도정부 내각수반으로 국정의 공백을 처리하게 되었는데한편으로는 이승만 등 자유당인사들에 대한 학생들의 강경한 처벌의 주장과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 정치세력들이 요구하는 정권이양 등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국가의 기강과 정통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먼저 하야한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정치의 소용돌이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선거를 치렀고 새로이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419혁명 이후 그가 보여준 정치적 행동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갈래로 이해되고 있지만혁명의 불길을 개혁의 성격으로 전환시키면서 사회를 안정시켰다는 기여를 지적할 수 있다.

1963년 박정희 군정이 민정으로 이양되려던 시기에 [국민의 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이되어 대통령후보로 내정되었으나 야당후보단일화를 위하여 윤보선(尹潽善)에게 양보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이 패배한 뒤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969년부터 1984년까지 통일원고문, 1980년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일하였다청렴 강직한 성격은 몇 안 되는 한국정계의 원로로 대우받게 하였다. 1985년 인촌문화상(仁村文化賞), 1988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장지 국립묘지내 국가유공자 묘역.

약력

1932 재불한인거류민회 회장

1942 삼일신보 사장

1945 한민당 총무

1948 국정자문위원회 위원(1966)

1948 국토통일원 고문(1966)

1948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1966)

1948 한민당 제헌의회 의원(1949)

1949 2대 교통부 장관(1949)

1949 3대 교통부 장관(1953)

1951 국무총리 서리(1952)

1953 과도내각 수반(1955)

1953 5대 외무부 장관(1955)

1954 대통령 직무대행(1954)

1955 6대 국무총리(1961)

1957 대통령 직무대행

1957 8대 서울특별시 시장(1959)

1958 국민의당 대표최고의원

1961 민중당 최고위원(1971)

저서】 <나의 회고록>(한국일보.1972.10.4.11.14)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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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의 생애

한국 근대사의 파란과 아픔의 격랑 속에서 그 중심자리를 흔들림 없이 지켜온 정치인 아닌 정치인을 든다면 허정(許政, 1896-1988) 과정수반(過政首班)을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왕조로부터 일제 강점으로또 해방과 이승만 박사의 자유당독재와 박정희 군사정권의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데 그의 역할이 더없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1961년 419혁명으로 전국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무렵 이승만대통령의 계속된 권유로 허정은 외무부장관에 취임한다그러나 취임 하루만인 26일 이대통령이 전격 하야함으로써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권한 대행이라는 뜻밖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그로부터 같은 해 8월 8일 제2공화국의 민주당정부가 들어서기까지 1백 5일간 허정내각수반은 정국안정과 평화적 정권이양 그리고 민주정부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명쾌하게 완수했다 

허정을 지칭해서 정치인 아닌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까닭은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것을 제외하고는 30여년의 정치생활 가운데서 한 번도 스스로 자리를 탐해본 적 없이 오직 정치와 정치기술을 명확하게 구별했고 그 신조를 끝까지 지켜왔기 때문이다.

허정은 1896년 4월 8일 경상남도 부산시 초량동 19() 10()에서 아버지 허문일(許文逸)과 어머니 김술이(金述伊)의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가업(家業)은 물산객주(物産客主)로 요즈음의 말로 하면 무역중개업이었다울산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선친 때 부산으로 옮겨와 초량에 자리를 잡고 물산객주업을 시작했다말이 물산객주이지 규모가 아주 작아서 간신히 생계나 유지하는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상당한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이름에 대하여 집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허정은 회고록에서 아버지 이름을 문일(文逸)’로 적고 있으나 그의 호적부에는 문일(文日)’로 되어있어 그의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회고록 저술편집과정에서의 착오였는지 명확하지 않다허정(許政)이라는 이름도 본래는 허성수(許聖壽)로 불리어졌다그가 중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배를 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중국여권에 본래의 이름인 성수(聖壽)’ 대신 허정(許政)’으로 기재하기 시작했고광복 후인 1947년 서울지방법원심리원(지금의 서울지방법원)에서 정식 개명판정을 받게 되었다. 

나라 잃은 비극과 울분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유년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그는 어려서 당시의 관례대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여섯 살 되던 해 영국선교사가 초량에 교회를 세우고거기에 세운 양국서당(洋國書堂)에 들어가서 신교육을 받게 된다이때부터 그는 크리스천이 되면서 신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와 서양과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이 있기 1년 전인 8세가 되던 해 공립학교를 마다하고 민족혼이 살아있는 초량사립학교(草梁私立學校)에 입학하게 된다초량학교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개화운동을 벌였던 최유붕(崔有鵬)이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이다양국서당은 그에게 신학문과 함께 서양에는 동양에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막연한 이상을 갖게 했고 초량사립학교는 민족과 구국이라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 무렵 소년은 주시경(周時經)선생이 쓴 <잔다르크전>을 읽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나도 잔다르크 같은 위인이 되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한다또 소년은 남순(南巡)길에 나선 순종황제(純宗皇帝)가 부산항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을 참관하러 가는 도중 지금의 자갈치시장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치욕감과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그 나라 잃은 치욕 울분은 소년의 가슴에 평생을 두고 민족적 분노로 쌓여갔다. 

소년은 초량학교를 졸업한 14세 때 서울로 올라가서 보성중학교에 입학한다그 해 여름 마지막 더위가 한풀 꺾여 가는 8월 29일 아침 학교로 가는 길목의 게시판에서 나라를 일본에 완전히 넘겨주는 <한일합방조서>를 읽게 된다치욕의 역사에 분개하면서 눈물과 허기로 중학교 3년을 마친 뒤이어서 지금의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한다.

보성전문을 졸업한 뒤 그는 일단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아버지사업을 돕는다. 24세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났다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했다피 끓는 청년의 가슴에는 더 이상 가사에만 매달리고 있을 수 없다는 결의로 가득 찬다. 1919년 7월 어느 날 밤 그는 지금의 부산역인 초량역에서 북행열차에 몸을 싣는다. 

상해 프랑스 미국으로

어느 듯 압록강을 건너가는 기차는 천지를 진동하는 기적을 밤하늘에 토해낸다나라를 잃고 일제에 짓밟히는 조국이 한없이 서러웠다부모형제를 두고 밤 열차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가는 자신이 한편으로는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잠이 올 리 없다눈만 감으면 아른거리는 일본인들의 만행이 갈수록 머리를 무겁게 짓누른다부산과 동래 양산에서 거리로 질질 끌려나와 공개처형 당하던 의병들의 모습살기를 내뿜던 일인순사들의 모습어느 것 하나 몸서리쳐지지 않는 것이 없다약소국도 서러운 것인데 거기에 망국의 설움이라니새삼 피가 거꾸로 치솟는 울분을 삭이기 어려웠다.

기차는 달리고 달려서 봉천(奉天) - 북경(北京) - 천진(天津)을 거쳐 나흘만에 상해(上海)에 도착했다그때 마침 국민정부 요인들 중 장개라는 분이 있었는데그는 일본 유학생이었고 파리에서 유법근학회(留法勤學會)라는 것을 조직했다중국말로 프랑스를 법국(法國)이라 했는데 프랑스에서는 1차 대전 때 젊은이들이 대거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바람에 노동력이 태부족이었고 따라서 중국의 청년들이 노동을 하면서 고학을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다성수청년은 신규식(申圭植)선생을 통해 프랑스로 갈 수 있었다.

이때 이름을 허정(許政)으로 고쳐 적기 시작했고 우양(友洋)이란 아호도 스스로 만들게 되었다프랑스로 갈 때 조그마한 영국 화물선을 타고 갔는데 장장 40여 일이나 걸렸다지루한 갑판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청년은 가족과 친구들고향의 산하 그리고 빼앗긴 조국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본래 바다근처에서 살았고 바다를 좋아했다한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는 어머니의 품속을 생각했다꿈길 같은 다정함이었다바다를 벗 삼는다는 의미에서 자신을우양(友洋)’이라 부르고 싶어 했다파란만장했던 정치세파 속에서도 그는 어머니 품속 같은 바다를 그리는 뜻의 우양이라는 아호에 힘입어 지탱해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파리에는 이관용황기환(黃玘煥), 장택상(張澤相)등이 있었고조소앙(趙素昻), 윤해(尹海), 고창일(高昌一)이 대표로 있었다그 사람들과 러시아에서 온 동포들이 모여서 유법한인회(留法韓人會)를 조직해서 성수청년이 회장이 되었다한인회는 동포들에게 국어 역사 지리 등을 가르치면서 노동을 하고 프랑스어를 배웠지만 너무 힘이 들어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1920년 7월 미국에 도착한 허정(許政)은 서재필(徐載弼),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등 독립운동가들과 만날 수 있었다미국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하는 동지회가 있었고안창호선생 중심의 흥사단이 있었다동지회에는 하와이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 계층이 많았고 흥사단에는 학생지도층이 많았다당시 이 두 지도자가 이끄는 단체는 첨예한 분열과 대립을 보이고 있었으나 서재필박사는 중립적 위치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회의를 해도 따로 하고 예배를 봐도 따로 보는 등 분열과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허정은 21년 봄 재미동포를 대표하는 한인공동회(韓人公同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동포들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미주서 [삼일신문창간

그러나 두 파벌의 알력과 대립을 막지 못한 나머지 그 해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강대국들의 군축회의에 대표를 참석시키지도 못하는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이때의 군축회의는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일본을 견제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문제를 제기하고 호소하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허정이 조병옥(趙炳玉)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고 이들은 이원익(李元益), 곽임대(郭林大등과 함께 군중대회 준비위원으로 일했다한인회를 조직하고 보니까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해 나가야 모든 것이 능률적으로 되겠는데 그런 것을 조정할 홍보기능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그때 뉴욕에는 이미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를 위시해서 윤홍섭(尹弘燮), 김도연(金度演최준수가 머물고 있었다이들과 함께삼일신보를 내기에 이르렀다이기붕(李起鵬)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고 윤보선(尹普善)은 스코트랜드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삼일신보를 보고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당시는 미국경제도 대공황을 맞아 어려운 실정이었다허정은 1년쯤 신문을 내다가 고독한 마음을 달래기 어려워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미주를 떠나 하와이로 갔다그곳 동포들이 붙잡기도 하고 기후도 마음에 들어 그는 그곳에서 6개월을 머문다그 사이 교회와 학교 일을 도우면서 [태평양잡지]를 편집했다.

허정은 하와이 생활 6개월을 끝으로 귀국했다돌아와서는 37살 때 24살의 규수와 결혼했다부인은 이화(梨花)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고 일신여학교 음악교사로 있던 백귀란(白貴蘭)이다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허정은 그 뒤 일생동안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처가의 재력에 의지했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귀국과 함께 허정은 이기붕과 합작으로 충북 영동의 형석광이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했다일제는 대동아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광산에 대해서만은 자유롭게 방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허정은 서울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다음 날 오전 설산(雪山)장덕수를 찾아갔다허정보다 한 살 위인 설산(雪山)은 동아일보(東亞日報주간을 역임하다가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허정과 함께 삼일신보를 발간하면서 두 사람사이는 죽마고우처럼 두터워진 사이였다그는 이어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인촌(仁村김성수(金成洙), 고하(古下송진우(宋鎭禹), 김준연(金俊淵), 이인(李仁), 김병로(金炳魯),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안재홍(安在鴻), 김도연(金度演), 백관수(白寬洙), 김약수(金若水등 민족지도자들과 회동했다.

이 과정에서 상해임시정부 환국국민환영대회(송진우장덕수김준연안재홍윤보선), 고려민주당(이인김병로조병옥),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인민당), 한국국민당(송진우조병옥김병로윤보선), 조선국민당(안재홍이렇게 많은 정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한국국민당에서 조선국민당이 떨어져 나가자 다시 당명을 한국민주당으로 개명하게 된다이리 하여 1945년 9월 16일 이승만김구이시영문창범서재필권동진오세창을 축으로 하는 한민당이 탄생한다한민당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신봉하는 여러 갈래의 민족진영 세력들이 하나로 집결한 최초의 정당으로 결성된 것이다이때 송진우가 수석총무를허정이 조직총무를 맡는 외에 김도연백관수 등 8명의 총무그리고 김약수가 조직부장장덕수가 외교부장곽상훈이 선전부원신도성이 문교부원을 맡는 등 한민당의 뿌리가 형성되었다이 한민당이 결국은 좌()와 우()우파는 또 여야(與野)로 분파(分派)와 정맥(政脈)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는 사이 이승만과 김구가 각각 귀국하였으나 이신동체(異身同體)로 표현되던 두 사람마저 결국 남한단독 정부수립과 남북협상의 정치이념의 갈등과 대립으로 나뉘는 바람에 민족분열의 비극적인 싹이 자리잡고 만다.

헌법위원으로 내각제 기초 마련 

한민당은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이라는 고집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고 허정은 출생지인 부산을(釜山乙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된다이어서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된 초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198명 가운데 180표로 당선된다이때 허정은 30명의 헌법기초위원 중 한 사람으로 헌법제정에 참여한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다음 날 인촌과 허정을 이화장으로 불러 총리 등 조각을 상의하면서 허정에게 상공부장관을 맡을 것을 제의한다허정도 찬성한다그러나 8월 4일 초대내각이 발표될 때 허정의 이름은 빠져있고 그 자리에는 임영신(任永信)이 들어 있었다. 8월 6일 이승만은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허정을 총무처장을 맡을 것을 권유했다허정은 국무회의에 표결권 없는 처장은 포부를 펼 수 없다며 사양한 뒤 2개월 여 만에 교통부장관으로 입각하게 된다.

장관으로서의 허정은 교통부 안에서 첨예한 대립을 겪고 있던 민애청(民愛靑)과 노총(勞總)의 좌우갈등을 원만히 수습하는 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다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국정전반에 걸쳐 폭넓은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장관자리를 김석진차관에게 내어주고 난 뒤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허정은 개인자격으로 부산까지 이승만대통령을 보좌했다.

1950년 11월 23일 부산임시수도에서 허정은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어 다시 입각했고, 1951년 11월 6일 장면(張勉)부총리가 유엔총회에 참석 차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게 됨에 따라 국무총리서리가 되었다그의 총리서리 시절 이른바 정치파동의 전조전이 일어난다같은 해 12월 초순 대통령은 허정을 불러 대통령간선제 헌법을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할 것을 지시한다국회는 이대통령을 배척하는 민주국민당(民國黨)이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민국당은 장면(張勉)을 제 2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허정은 이대통령의 개헌안 제출지시를 완강히 반대했으나 결국 이대통령의 고집에 못 이겨 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국무총리서리 자격으로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에 대한 제안 설명을 한다그러나 이 개헌안은 찬성 19 반대 1백 43표로 부결되고 만다.

허정은 그 후 장총리가 귀국하자 총리서리에서 물러났고 이어서 이대통령은 그를 무임소장관으로 임명한다무임소장관 허정은 민국당과 이대통령과의 화해를 집요하게 주선했으나 이대통령의 고집과 야심은 끝내 그해 7월 4일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고,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이승만은 5백 23만여 표로 2위의 조봉암(曺奉岩)을 누르고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허정은 이승만과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954년 제3대 총선을 맞아 부산을(釜山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자유당의 저지공작 등으로 인해 낙선야인으로 돌아간다야인 허정은 생활고 등에 따라 오랫동안 살아온 신교동 집을 판 뒤집 뒤 산비탈에 자그마한 새집을 짓고 송풍정(松風亭)이라 부르며 한세월을 지낸다. 

선거가 끝나자 허정은 여당인 자유당은 물론 신익희조병옥 등 야당으로부터도 서로 참여할 것은 권유받지만 끝내 거절하고 은거하고 만다그러던 중 1957년 12월 14일 허정은 서울시장이 된다서울시장으로서의 허정은 세금체납에 대한 강제집행 등으로 시 재정을 흑자로또 부정비리공무원 척결 등으로 시정확립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내각수반으로 국정 수습

2년 뒤 서울시장에서 물러나 조용히 가족과 함께 쉬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그를 한일회담(韓日會談수석대표로 임명한다회담대표인 유진오(兪鎭午), 이호(李澔), 최규하(崔圭夏등과 일본 동경으로 날아간다회담의제는 재일동포북송(在日同胞北送)문제와 어로저지선획정(漁撈沮止線劃定)문제였다.

 

한일회담이 일본측의 무성의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사이 해가 바뀌어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이 터지자 이대통령은 또 다시 허정을 찾았다. 4월 22일의 일이다허정은 자유당이 지지른 부정을 낱낱이 열거하고이기붕의 부통령당선 무효화’,‘이대통령의 자유당 당수사임’,‘거국내각 구성등을 제의했다그러나 이 같은 요구는 대통령 측근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태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대통령은 다시 허정을 불러 입각할 것을 요구외무부장관을 맡게 된다장면 부통령을 비롯내각이 총사퇴한 상황에서 이승만대통령이 하야(下野)하자 바로 수석국무위원으로서 즉각 내각수반(內閣首班)이 되고 이어서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4월 26일 아침 이대통령 하야성명 발표 후 국회가 대통령권한대행 을 결의하게 된다.

5월 29일 허정은 김포공항에서 이승만을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보낸다그로써 허정과 이승만과의 정치적 동반역정은 막을 내린다. 

허정은 국회해산총선실시 등으로 뒤숭숭한 정국을 정리, 1960년 615일 내각제개헌을 통과시키고 7?29 총선, 8?8 5대 국회 개원, 8?12 국회에서의 대통령선거 등을 착실하게 진행시키는 등 정치일정을 단축시키는데 공헌을 세웠다허정은 윤보선(尹潽善)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그의 임무를 끝냈다.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8월 19일 장면을 총리로 선출했으나 신구파 대립과 분열로 인해 정국은 안정을 되찾지 못하는 사이 5?16군사 쿠데타를 맞는다. 1963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민정이양을 선언하자 허정은 신정당(新政黨창당에 앞장선다그러나 야권은 사분오열되어 정당난립시대를 맞는다허정은 민정(民政신정(新政민우당(民友黨등 야권을 통합한 국민의 당(國民의 )’을 결성한다.

국민의 당도 대통령선거 후보 선출 등에 얽힌 이해관계를 풀지 못하고 민정 민우당 일부가 이탈하게 되고 10?15 선거에서 국민의 당은 허정을민정당은 윤보선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그러나 허정은 야권후보 단일화를 위해 10월 2일 대통령후보를 사퇴하고 사실상 정계은퇴의 길을 밟는다허정은 1980년대 전두환(全斗煥)정부에서 통일관계 고문으로 위촉했으나 국정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은 채 거처인 송풍정(松風亭)에서 1988년 9월 18일 9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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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砅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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