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南道 정자기행(743)-나주 설재서원의 영모재(永慕齋)


출처 한국매일                        
뉴스일자: 2013년11월16일 13시35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649에 있는 설재서원(雪齋書院)은 마을과는 떨어져 있어 주변이 한적했다. 일대에는 은행·동백·잣나무 등이 우거져 있다. 

이곳은 문정공 정가신(鄭可臣:1224~1298)을 배향하기 위하여, 1688년(숙종 14) 노안면 금안동에 최초로 창건되었다. 현재 9위(位), 즉 정식(鄭軾)·신장(申檣)·정심(鄭諶)·정상(鄭詳)·정여린(鄭如麟)·정란(鄭瀾)·정초(鄭初)·정눌(鄭訥)이 추배되어 1712년 향사우(享祀宇)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 그후 1723년(경종 3)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모재를 건립하였다. 

영모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전면과 남쪽 편으로는 반 칸 폭의 퇴(退)를 두었다. 중앙으로 2칸의 대청을 두고, 그 양측으로 온돌방을 꾸몄다. 남쪽 편 온돌방 앞으로는 높이 50cm 정도의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 방주(전면 퇴주는 두리기둥)를 세운 납도리형이다.

내에는 겸산( 兼山) 이병수(李炳壽 1855~1941)의 영모재기(永慕齋記)가 걸려 있다. 

정승의 사당을 어느 곳에서 찾을꼬 丞相祠堂何處尋
금성관 성 밖에 측백이 우거졌네  錦館城外柏森森 

마을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예처럼 여전하고 巷柳園桃依舊在 
어서御書와 보배로운 갑옷은 지금까지 전해오네 御書寶甲尙存傳

시조 정해의 증손자 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나주 사람으로 자는 남헌, 호는 설재(雪齋),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상경하여 1259년(고려 고종 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에 봉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를 거쳐 추서윤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열왕 6년) 승지가 되었다. 1284년(충열왕 10년) 밀직학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에 다녀 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판삼사사를 역임한 후 1290(고려 충렬왕 16년)년 정당문학정당문학(政當文學)으로 사의(師儀)가 되어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절사로서 3차례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이사가 되었으며 그 후로 벼슬이 여러번 승배되었는데 특히 그는 명문장가로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청렴결백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예문지(藝文志)에 "고려의 정가신이 세자를 따라서 원나라에 갔을 때, 자단전(紫檀殿)에서 소대(召對)하고는 시를 읊게 하였다. 정가신은 동국에 있으면서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살펴보건대, 고려사의 정가신열전을 보면, 정가신의 자(字)는 헌지(獻之)이고 나주인(羅州人)이며,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일찍이 《천추금경록》을 찬하였다"다고 적고 있다.

필자적(必闍赤)이라는 특수기구의 구성원이 되어서는, 관료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국왕의 사명(辭命)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그의 시 몇 편이 실려 전하는데, 그 중 하나를 들어보면 그의 절묘한 표현이 납득이 간다.

한평생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을 어찌 헤아리리,벽 가운데 푸른 등 걸어놓은 밤 마음마저 서늘하구나.
만호의 풍진은 어찌 저리 분주한고,한 숲의 연기와 달은 아득하기만 한데
平生出處若爲量 半壁靑燈夜意凉 萬戶風塵何擾擾 一林煙月奈茫茫 

골짜기 산짐승은 좌선하는 바위에 스스럼없이 걸터앉고,강해오라기는 때맞춰 주소註疏짓는 당堂으로 날아드네.
어느 해 벼슬 버리고 구름 속 찾아 누워, 한 물병 한 석장으로 내 살림 삼으리.
洞猿不避安禪石 江鷺時來撰疏堂 雲臥他年拂衣去 好於甁錫付閑忙
정가신이 충렬왕 때 세자를 따라 원(元) 나라로 가 거기에서 세조(世祖) 황제가 중히 여기게 되어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정가신를 평하기를  "해동(海東)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산 아래 우리 집은 초가 수간(數間)이라네. 골목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내가 심은 것인데, 봄 바람에 주인 오기를 응당 고대할 것이로다."라는 시가 전하고 있다.그 융숭한 대우는 계속된다.

원주가 자단전(紫檀殿)에서 불러보고 마하발국(摩訶鉢國)에서 올린 낙타새 알[駱駝鳥卵]을 보이면서 정가신에게 시를 지으라 했더니, 즉석에서 지어 바쳤다. 원주가 이를 칭찬하며 자기가 먹던 국을 내려주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새알 커서 그 크기가 동이만 한데 / 有卵大如甕
늙지 않는 봄을 그 속에 간직하였네 / 中藏不老春
원하노니 이 천년의 장수를 누려서 / 願將千歲壽
술기운 고려(해동)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소서 / 醺及海東人/일하구문

인하여 패랭이[笠]를 벗으라 하며,“선비가 머리를 땋아서야 되겠느냐? 건(巾)을 쓰도록 하라.”하였다./동사강목(東史綱目)

고려 명신 정가신 명문장에 반한원 세조 쿠빌라이 특별하사품 옥대에 금金 안장 두른 백마 타고  설제雪齋 금의환향하니 고향동네는 금안동金鞍洞이라 불리더라 정가신 신숙주 홍천경 문인재사 이어나는 명현들의 고향 금안동 팔경이 펼쳐지는 명촌이 되었다.
 
그러나 충렬왕이 낮은 신분 출신을 중심으로 한 측근세력을 중용하면서부터 정가신과 국왕의 관계는 멀어져 갔다. 정가신은 문반유사文班儒士의 주도 아래 유교적 덕목에 따른 위민의 정치, 민생을 우선시하는 정치가 실현되기를 희망하였다.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충렬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훗날 정가신이 충선왕의 개혁정치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은 그와 같은 갈등의 결과였다. 

사림원(詞林院)의 신진학사들을 중심으로 충렬왕대 정치의 폐단을 쇄신하려던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정가신의 정치적 꿈을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충선왕의 개혁 시도는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충렬왕 측근세력의 방해 책동과 원의 내정간섭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근심어린 눈길로 지켜보던 정가신은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갈 것이 분명해지자 그만 음독자살(飮毒自殺)을 택했다.. 지방 출신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개혁을 추진하던 유능한 신진인사로서 기득권을 고집하는 구세력과 외세에 밀려 좌절하는 전형이 정가신이었다.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1344~1423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 1407~1467)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정기수(鄭麒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정봉수(鄭鳳壽),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정응(鄭應), 죽우당(竹友堂) 정란(鄭瀾. 1583~1656), 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가문을 대표하는 후손들이다.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1344~1423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식(鄭軾)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 (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집인데, 전면 반 칸은 개방되어 있다.원형의 가공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창방을 걸었다. 창방 위로는 3칸 모두 2소로 화반을 1구씩 설치하였다.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되었다.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에 1919년 일제강점기에 지은 만정(晩亭)도 있다.

이곳 금안동의 8경에 제 삼경은 산점행인山店行人이라, 천년을 배향해온 설제서원 비자나무 옷깃을 여미는데 영안 마을 청산골 돌아 떠나는 나그네 청산유수 화폭 속에 한 점 그림
 칠경은 금성홍습(錦城紅濕)이라 금성산 서쪽 자락에 펼쳐진 저녁노을 민초들 타는 목마름에 붉은 감로주 서방정토에 넘쳐흐르듯 일렁이는가제 팔경은 서석청람(瑞石淸嵐)이라. 금안동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득한 서석 무등골엔 무릉도원 신선이 노니는 듯 아지랑이 남실남실 피어오르네. 

영모재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는 금성산에는 700여년 전에도 피어오르는 구름(雲)이 오을도 펼쳐지고 있다. 그때의 정가신은 구름을 언중유골로 담았다.

한 조각이 겨우 진흙 위에서 생겨 / 어느새 동서남북에 퍼졌구나
장마비가 되어서 온갖 마른 생물을 살리리라 했더니 / 공연히 중천에 해와 달의 밝음만 가리누나
一片纔從泥上生 東西南北已縱橫 謂爲霖雨蘇群槁 空掩中天日月明/동문선 제20권

우리는 이러한 관경을 보고 '참 멋있어 죽겠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말에는 '죽겠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뻐 죽겠다. 미처 죽겠다. 좋아 죽겠다 등....정구(鄭逑)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나 죽어 나 죽어 어찌 할거나 / 그 소리 처량하게 끊어질 듯 이어지네.
모두들 죽음은 겁을 내는데 어찌하여 죽으려 하는 것인가 / 깊은 숲 속 나무 위에 둥지 틀고서
我死也何爲者 聲聲悽斷呌復止 問是怕死還欲死  幽林深樹好栖遲

금슬 좋게 살면서 날아 다니면 / 새장 속 물총새도 부러워 마지않을 텐데
즐거운 삶 놔두고서 왜 죽으려 하는고.....
雌雄飮啄飛相隨 籠中翡翠應羡爾 爾生可樂何死爲


728x90
반응형

'「예연잡 砅涓集」 > 「본관 (羅州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제사는 4대까지 지낼까?  (0) 2016.02.15
본관별-정(鄭)씨  (0) 2014.01.25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전문  (0) 2013.07.16
족보의 기원  (0) 2012.10.07
조문 예절  (0) 2008.05.17
Posted by 砅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