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 > 청마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 유치환님의 사랑편지 그리고 정운 이영도님의 시조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황혼에 서서> / 이영도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입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情)
<낙화(落花)> -눈 내리는 군 묘지에서- 이영도
뜨겁게 목숨을 사르고
사모침은 돌로 섰네.
겨레와 더불어 푸르를
이 증언의 언덕 위에
감감히
하늘을 덮어
쌓이는 꽃잎,
꽃잎.
<석류(石榴)> - 이영도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청(秋晴),
한 가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언약(言約)> - 이영도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애모(愛慕)는 낙락히 나부끼고
투명(透明)을 절(切)한 수천(水天)을
한 점 밝혀 뜬 언약(言約)
그 자락
감감한 산하(山河)여
귀뚜리 예지(叡智)를 간(磨)다.
<그리움> - 정운(丁芸) 이영도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세월(歲月)> - 청마(靑馬) 유치환
끝내 올리 없는 올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 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 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우기(雨氣) 짙으량이면
자옥 기어 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
끝내 올리 없는 올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아지랑이> - 이영도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바람에게> - 유치환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 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 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마다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비> - 이영도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밤바람> - 유치환
너의 편지에
창밖의 저 바람소리마저
함께 봉하여 보낸다던 그 바람소리
잠결에도 외로와 깨어 이 한밤을 듣는다.
알수 없는 먼 먼데서 한사코
적막한 부르짖음 하고 달려와
또 어디론지 만리(萬里)나 날 이끌고 가는
고독한 저 소리!
너 또한 잠 못이루 대로 아득히 생각
이 한밤을 꼬박이 뜨고 밝히는가?
그리움을 모르는 이에겐
저 하늘의 푸름인들 무슨 뜻이리.
진정 밤 외로운 바람은
너와 나만을 위하여 있는 것.
아아 또 적막한 부르짖음 하고 저렇게
내게로 달려 오는 정녕 네 소리!
<탑(塔) 3> -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쳐
푸른 도로 굳어라.
<기다림> - 유치환
무척이나 무척이나 기다렸네라.
기다리다 기다리다 갔네라.
날에 날마다 속여 울던 뱃고동이
그제사 아니우는 빈 창머리
책상 위엔 쓰던 펜대도 종이도 그대로
눈 익은 검정 모자도 벽에 걸어 둔대로.
두번 다시 못올 길이었으매
홀홀히 어느 때고 떠나야 할 길이었으매
미래(未來) 없는 억만(億萬) 시간(時間)을
시간마다 기다리고 기다렸네라.
흐림 없는 그리움에 닦이고 닦이었기
하늘에 구름빨도 비취는대로
이름 없는 등성이에
백골(白骨)은 울어도.
그때사는 정녕
너는 아니 와도 좋으네라.
<황혼에 서서> - 이영도
산이여, 목메인듯
지긋이 숨 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라.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 유치환
마침내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무량한 안식을 거느린 저녁의 손길이
집도 새도 나무도 마음도 온갖 것을
소리 없이 포근히 껴안으며 껴안기며 -
그리하여 그지없이 안온한 상냥스럼 위에
아슬한 각달이 거리 위에 내걸리고
등들이 오르고
교회당 종이 소리를 흩뿌리고.
그립고 애달픔에 꾸겨진 혼 하나
이제 어디메에 숨 지우고 있어도.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귀를 막고 -
그리고 외로운 사람은
또한 그렇게 죽어 가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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