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烈婦 豊山洪氏 紀行碑 / 샘내 마을
<碑 文>
歷百世聖王之治天下也以爲
冠冕于綱常者開太平萬世之幾
都在於是而爲人之道亦不外乎
此故若有一能行者則必褒而揚
之
來裔鑑則焉治南梨陽泉川居孝烈婦洪氏籍豊山承潑女舍人侃后在
家著孝順年十六歸于濟州梁會淑寔在一子惠康公學圃彭孫后性根柔嘉
事舅姑待君子極盡誠敬夫君性素不具不羨人之俊傑自處以命居數
姑偶得病藥餌禱天之誠無所不至無奈天命而竟不起喪葬奉祭情文俱臻未
幾夫偶橫死撫屍慟哭自誓同穴老舅在堂幡然回悟孝事偏舅無異於夫在
時命何多舛而舅忽臥病調藥救護十有餘年如一日晝則東往西奔夜則坐
睡不離勸飮搔
辛苦艱難 謂何如哉遂以天年終喪葬祭一如前喪以
姪繼后不絶夫祀年及就學擇師敎之勤儉全節家道漸舒咸稱兼行孝烈
歟壯哉鄕章甫闡其卓行近世旌褒無由欲其不忍湮滅懿蹟故將伐石鐫實
梁斯文會錫氏請余數行固辭益勤誼不敢牢辭銘曰
在家孝順適人移焉自矢靡他栢舟
焉樹之道周過者式焉
檀紀四千三百九年丙辰仲春 日
光山 李 炳 根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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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百世聖王之治天下也以爲 (역백세성왕지치천하야이위)
冠冕于綱常者開太平萬世之幾 (관면우강상자개태평만세지기)
都在於是而爲人之道亦不外乎 (도재어시이위인지도역불외호)
此故若有一能行者則必褒而揚 (차고약유일능행자칙필포이양)
之
○來裔鑑則焉治南梨陽泉川居孝烈婦洪氏籍豊山承潑女舍人侃后在
(래예감도칙언치남이양천천거효열부홍씨적풍산승발여사인간후재)
家著孝順年十六歸于濟州梁會淑寔在一子惠康公學圃彭孫后性根柔嘉
(가저효순년십육부우제주양회숙식재일자혜강공학포팽손후성근유가)
事舅姑待君子極盡誠敬夫君性素不具不羨人之俊傑自處以命居數
(사구고대군자극진성경부군성소불구불선인지준걸자처이명거수)
○姑偶得病藥餌禱天之誠無所不至無奈天命而竟不起喪葬奉祭情文俱臻未
(고우득병약이도천지성무소부지무내천명이경불기상장봉제정문구진미)
幾夫偶橫死撫屍慟哭自誓同穴老舅在堂幡然回悟孝事偏舅無異於夫在
(기부우횡사무시통곡자서동혈노구제당기연회오효사편구무이어미재)
時命何多舛而舅忽臥病調藥救護十有餘年如一日晝則東往西奔夜則坐
(시명하다천이구홀와병조약구호십유여년여일주칙동주서분야칙좌)
睡不離勸飮搔
(수불리권음소)
○辛苦艱難 謂何如哉遂以天年終喪葬
(신고간난 위하여재수이천년종상장)
○祭一如前喪以姪繼后不絶夫祀年及就學擇師敎之勤儉全節家道漸舒咸稱兼行孝烈
(제일여전상이질계후부절부사년급취학택사교지근검전절가도점서함칭행효열)
○歟壯哉鄕章甫闡其卓行近世旌褒無由欲其不忍湮滅懿蹟故將伐石鐫實
(여장재향장포천기탁행근세정포무유요기불인인멸의적고장벌석전실)
梁斯文會錫氏請余數行固辭益勤誼不敢牢辭銘曰
(양사문회석씨청여수행고사익근의불감뢰사명왈)
在家孝順適人移焉自矢靡他栢舟
(재가효순적인종언자시미타백주)
○焉樹之道周過者式焉
(언수지도 주과자식언)
檀紀四千三百九年丙辰仲春 日
光山 李 炳 根 撰
<번역>
지나온 수백년 동안 성왕(聖王)들의 천하(天下)를 다스린 것을 살펴보면 삼강(三綱) 오상(五常)을 으뜸으로 삼은 것은 천만세 태평의 기틀을 여는 것이 모두 이 강상(綱常)에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되는 도리(道理)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한 사람이라도 능히 행동한 자가 있다면 반드시 포양을 하여 태어날 후손들로 하여금 거울과 법으로 삼게 하고자 한것이다.
능주와 남쪽 이양땅 천천(샘내)에 거주한 효열부 홍씨(孝烈婦 洪氏)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승발(承潑)의 따님이요 사인(舍人)인 간(侃)의 후손이다. 친가에 있을 때부터 효녀로 알려졌고 나이 16세에 제주 양회숙(濟州梁會淑)에게 시집을 왔는데 회숙(會淑)은 재일(在一)의 아들 이요 시호는 혜강공(惠康公) 아호는 학포(學圃)인 팽손(彭孫)의 후손이다.
홍씨(洪氏)의 성격은 태어나면서부터 유순하여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은 접대할제 정성이 극진하였다.
남편이 본래 불구였으나 남의 준걸(俊傑)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으로 자처하였다.시부모의 명을 받들어 시집살이한지 두어해에 시어머니가 우연히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있자 약을 꺼리는가 하면 하늘에 기도를 하여 정성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늘의 명은 어찌할 수 없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출상 장례와 제사를 받듬에 있어 인정과 예절에 함께 지극하였다.그뒤 얼마 않되어 남편께서 횡사(橫死)하는 재앙을 만나니 부인은 시신을 어루만지며 통곡을 하고 함께 죽어갈 것을 맹세하였건만 늙은 시아버지가 생존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갑자기 생각을 돌리었다.
홀로된 시아버지를 효성으로 섬기기를 남편 생존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건만 무슨 운명이 이다지도 기박함이 많아 시아버지께서 갑자기 병석에 눕자 탕제를 올리여 간호하는데 10 여년을 한결같이 하였다.
낮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오가며 밤에는 곁에 앉아 졸면서 곁을 떠나지 않고 음식을 권고하며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으니 부인(夫人)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무어라고 이르겠는가.
결국 천명(天命)대로 살다가 삶을 마치시니 출상 장례와 담제(○祭)에 이르기까지 이전 초상때와 한결같았다.
조카로써 뒤를 계승하도록하여 남편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스승을 선택하여 글 공부를 가르쳤으며 근검절약한 결과 집안 형편이 점차 펴졌다. 모두다 효(孝)와 열(烈)을 겸전하였다고 하니 위대하기만하다.
고을 선비들이 그 특별한 행적을 들추어 내려하지만 최근에는 세상이 변하여 포양할 길이 없다.
그 아름다운 행적을 차마 묻쳐버리게 할 수 없는 까닭에 장차 돌을 갈고 갈아 그 실적을 새기기로 할제
양회석(梁會錫)씨가 나에게 간단히 두어글 글을 간청하기에 완고히 사양하였건만 권고가 더욱 거세자 정의상 감히 완전히 사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친정집에서 효도했던 마음을 시집에 가서도 그 효심을 옮겨 실천했네.
타인(他人)에게 개가해 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옛날 백주(栢舟)와 짝할만 하도다.큰 비석을 길 가에 세웠으니 오가는 길손들 허리를 굽힐 것이다.
1976(병진)년 2월에
광산(光山) 이병근(李炳根)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