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에게
조 재 필
오랜만에 긴 글을 한편 올립니다
잘 쓰진 못한 글이지만 그냥 넘기지 말고 끝까지 읽어 주길바랍니다.
연휴에 시간 내셔서 가족과 함께 영화 한 편 보시는 게 어떠실지요. 제가 꼭 추천해 드리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사도'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보시고 이야기 나누어도 좋을 영화입니다
● 우리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 사도에서 우리는 그 이야기 깊숙한 곳에, 아버지와 아들의 어긋난 사랑이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보게 된다. 사도세자에게는 광기가 있었으며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방탕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정신이상 증세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영조의 선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역사가 어디까지 진실을 담고 있는지. 아직도 논란이 많다. 당시에는 노론과 소론이 대립을 하고 있었고 영조의 집권을 도왔던 노론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두 정파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세자는 대리청정을 수행하던 시기에 노론에 불리한 정책을 펼쳤으며 그로 인해 노론의 모함을 받아서 죽음까지 이르렀다는 관점도 있다.
영화에서 영조는 ‘나는 자식을 죽인 임금으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 영화는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다만, 영조임금과 사도세자의 비극적 역사라는 ‘텍스트’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엇나간 사랑이라는 ‘콘텍스트’를 찾으려는 것이다.
(1) ‘존재’로써의 자식과 ‘역할’로써의 자식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이복형 경종의 죽음(노론의 타살 가능성이 높은)이후 노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첫 아들을 보게 된 영조는 자신의 씨로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척 기뻐 했다.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의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에 학문과 예법에 있어서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기에 뒤늦게 얻은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불안한 왕권에 대한 방어의식이기도 했으리라. 영조는 군주는 실력이 있어야 신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세자에게 이야기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거라. 왕이라고 칼자루만 쥐고 신하라고 항상 칼끝만 쥐는게 아니다. 왕이라도 실력이 모자라면 칼끝을 쥔다.’
세자의 교육에 강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도한 기대는 불행의 씨앗을 낳았고 그 씨앗은 필연적으로 발아를 하게 된다.
어린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되었던 아들. 그러나 기질적으로 예술을 좋아하고 자유분망한 면을 가지고 있던 세자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지 못한다. 다그치기만 하고 못마땅해하는 영조의 바램과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는 경연에서 어린 세자가 영특한 모습을 보였을 때, 영조는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는 과연 자식을 통해 제왕로써의 혈통에 대한 자신의 체면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흐뭇했을까 아니면 어린 자식이 마냥 기특해서 흐뭇했을까.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자식은 ‘역할’로써의 자식과 ‘존재’로써의 자식의 통합체이다.
‘역할’로써의 자식은 종족 번식의 본능을 충족시키고 자신의 대를 잇는 ‘자식’이며, 자신이 늙고 힘이 없어지는 미래에 자신을 봉양하는 ‘자식’이기도 하다. 반면에 ‘존재’로써의 자식은 자신의 일부가 투영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그리하여 자신의 일부로 느껴지기도 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한 없는 사랑을 쏟는, ‘존재’ 그 자체로도 감사한 ‘자식’이다. 항상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와 한 순간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사도’의 비극적 역사는 어쩌면 자식의 ‘역할’과 ‘존재’라는 양면성의 모순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영조가 처한 왕권의 현실 속에서 발아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조에게는 '역할'로써의 자식만 있었을 뿐, '존재'로써의 자식은 없었던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세상에 아버지 없는 아들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며, 살고 죽는 과정 속에서 많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고, 상처를 겪습니다. 누구나 아픔을 지혜롭게 이겨내려고 노력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비극에 도달할 때도 있습니다. 꼭 ‘영조’와 ‘사도’ 그리고 ‘정조’, 3대에 걸친 비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아버지, 내 아들, 그리고 내 할아버지와 빗대어 보아도 유사한 심리와 감정들의 연속을 겪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감정들을 관객들과 함께 마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영화 <사도>를 연출하는 의도였습니다.”
‘사도’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자식이 반듯이 자라 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실력을 갖추어 주기를 바라는 부모. 자식의 완벽하지 못한 모습에 못마땅해 하고 때로는 다그치기도 하는 부모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영조가 세조에게 학문과 예법을 강조하고 신하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실력을 갖추도록 강요하는 것과 작금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공부를 시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의 콘텍스트는 무엇인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그건 어쩌면 자식을 부모 욕망의 대리충족을 위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 부모의 가치관으로 자식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일갈이 아니었을까.
자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는 것, 삶의 주체는 자식 ‘본인’이며 부모도 그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음에 스스로 원하는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봐주는 것, 그리하여 ‘역할’로써의 자식이 아니라 ‘존재’로써의 자식을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역할이라는 것을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2) 깊은 슬픔은 깊은 외로움에서 온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라는 대사가 나온다.
인간은 날 때부터 ‘분리불안’을 격는다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엄마의 자궁속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 외부로부터의 위협도 없고 생존을 위한 모든 조건이 제공 된다. 안온하며 포근하다. 그러나 탄생의 과정에서는 갑자기 컴컴하고 좁으며 낮선 곳을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던져진 세상은 엄마 뱃속과는 모든 것이 딴판이다. ‘분리불안’을 아주 강하게 격으며 태어난 다는 것이다. 영아기 때 엄마의 품에서 익숙한 숨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그 ‘분리불안’을 조금씩 해소시켜 나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라 한다. 가끔 보면 엄지 손가락을 입으로 빠는 버릇을 어느 정도 자라날 때 까지 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분리불안’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 한 데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한다.
세 살 때 세자로 책봉된 ‘사도’는 이미 나아준 생모 영빈의 자식이 아니라 법적으로 중전의 자식이 된다. 생모 영빈은 어린 ‘사도’를 데리고 잘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혼이 난 ‘사도’가 손가락을 빨면서 엄마와 자고 싶다고 응석을 부리자 생모 영빈이 하룻밤만 데리고 자면 안되겠냐고 하는데 상궁은 궁중의 법도가 그럴 수 없는 거라며 내치는 장면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따뜻한 가슴도 아버지의 자애로움도 격지 못하며 자라날 수 밖에 없었던 세자 ‘사도’의 불행을 보여준다.
세 살 때 세자에 책봉되고 열다섯 살에 대리청정을 수행하며 국정을 책임지게 되는 ‘사도’에게는 정상적인 인격체로의 성장과정을 격는 성장기가 생략된다. 아동기를 아동답게 보내지 못한 ‘사도’에게 아동기와 성인기의 사이에 과도기적인 시기이자 감정적인 격동과 자유분망함이 어느 정도 용인 되어지는 청소년기조차 유실되어진 것이다. 이런 ‘사도’에게 아버지로부터의 끊임없는 질책과 무시는 내면적인 울화와 외로움의 응결을 유발하였을 것이다. 숙종대왕의 능으로 가던 행차에서 수행하던 세자에게 화를 내며 ‘넌 오지마’라며 매몰차게 대열에서 내쳤을 때에도 세자가 격었을 비애감이 어느 정도일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살부터 시작해서 뒤주에 갇혀 죽게 되는 28살, 대리청정을 수행하게 되는 이 시기에 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간다. 수 십년간 노론과 소론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이른바 탕평책을 펼쳐왔던 노회한 정치인인 영조에게 이제 갓 국정에 참가하게 된 세자의 정치력이 성에 찰 수가 없다. 경력과 실력이란 시행착오도 하며 배우고 스스로 느껴가는 과정이 필요할진데 뒤에서 간섭하고 때로는 방해하는 대리청정의 정치적 형태는 세자에게는 질곡과 같았을 것이다. 차라리 단독으로 국정을 운영해 갔다면 오히려 빠른 시일내에 자신만의 운영 노하우를 쌓아 나가고 개혁을 밀어 붙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전의 회갑잔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으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세자는 급기야 정신적인 분열증세를 보이게 된다.
조선 시대에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격었던 ‘사도세자’. 그러나 불운한 가족사로 인한 운명의 비극은 ‘사도’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아무 원한 관계도 없는 여인을 충남의 한 대형마트에서 납치해서는 잔인하게 살해한 후 시신을 피해자의 차 트렁크에 넣어 놓고 도주했다가 붙잡힌 김일곤이라는 사람도 중학교 때 가출한 후 혼자 살아왔고 사람을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전 내가 사는 동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결혼식을 앞두고 동거중인 여인을 현역 군인이 무참히 살해한 군인은 동거남에 제압당해 살해된 사건에서도 군인은 어렸을 때 부모는 이혼했고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던 그에게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던 젊은이는 군에 입대했고
휴가를 나온 그에겐 할아버지외엔 특별히 반겨주는 가족이 없었다. 그런 환경을 극복 못한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된
사건이다. 한해에만 약 900명이 넘는 살인사건, 즉 하루에도 전국 어딘가에서는 두 세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현재의 대한 민국에도, 정상적인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거치지 못한 채 내면에 쌓인 울화를 풀지 못하고 극도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비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맞이하는 현대판 ‘사도세자’가 도처에 있는 것은 아닌지.
(3) ‘원래 그런 것이야’ 에 대항하는 ‘다른 방식은 왜 안되?’ 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낡은 프레임의 견고성. “허공에 날아간 저 화살은 얼마나 떳떳하냐?”
사도세자가 과녁에 화살을 쏘다가 문득 하늘로 날려 버리고 난 후, 아들 ‘이산(훗날 정조)’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자신을 구속하는 예법이나 낡고 견고한 궁중의 질서, 혹은 비합리적인 정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도세자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리라. 한편으로는 항상 정해진 루트를 통해 과녁을 향해 날아가야만 하는데 그 경로를 벗어나 허공으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화살을 부러워한 것일 수도 있다.
어린시절 신하들과의 경연에서 경학을 게을리 한다고 꾸지럼을 받을 때, 세자를 가르치는 한 신하(체제공일 가능성이 높음)가 세자가 삼국지, 수호지등을 아주 좋아하며 책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는 세자가 딱딱한 유교 경전보다는 자유로운 이야기를 더 좋아했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댓님을 제대로 메지 못해서 영조에게 꾸지람을 받는 세자는 정해진 규정대로 하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정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세자를 낳아 주고도 후궁의 처지에서 평생 대접받지 못하고 살던 어머니를 위해 독자적인 회갑연을 마련해 놓고는, 임금이 알면 위험할지도 모를, 중전에게만 가능한 4배를 본인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강제로 하게 한다. 이렇듯 궁중의 낡은 형식에 얽매인 예법은 세자에게는 반드시 지켜야할 ‘그 어떤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낡은 프레임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가 영조와 ‘사도세자’를 가르는 기점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대리청정 첫 날, 기근으로 인한 백성들의 굶주림에 대하여 대응책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세자는 노론파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궁중에서도 곳간을 열테니 양반들도 곡식을 내놓으라고 한다. 한 번도 사례가 없었던 바이지만 세자는 추진을 한다.
영조의 집권을 돕고 그 보답으로써 막강한 세도를 누리던 노론세력들 에게는 이러한 세자의 성향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었다. 대리청정을 수행하면서 세자가 점차로 노론세력에게 반하는 정책을 펼치자 급기야는 세자를 페위하기 위해 모함을 하는 고변을 하게 된다.
훗날 정조가 왕이 된 후 첫 일성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였다는 것은 사도세자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가 이루려 했던, 그러나 그 견고성으로 인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낡은 프레임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정조대왕조차도 시장의 난전상인 하나 혁파하는데도 40년이 걸렸다. 재위 기간 내내 혁신을 추구 했지만, 그래서 세종과 더불어 조선 시대 가장 훌륭한 임금 중의 하나라고 칭송되며 대왕의 호칭까지도 득한 그 정조마저도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발을 쉽게 무마하지는 못 했던 것이다.
만약 사도세자가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집안인 노론의 등을 업고 노론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펼쳤더라면 저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불행은 ‘원래 그런 것이니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불편하게 굴지말고 그냥 받아들여’ 라는 기존의 낡은 질서가 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왜 꼭 그래야 하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 거야?’ 라는 새로운 혁신을 추구했던 것에 기인한 건지도 모른다.
술에 취해 있던 세자에게 스승이 “몇 년만 참으시면 될 것을, 몇 년만 참으시면 왕이 되실텐데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할 때, 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세자의 성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지 254년이 흐른 2015년의 대한민국.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대통령이 그토록 혁파하고자 했던 기득권 세력의 낡은 프레임은 더욱 공고화 되고 있고. 세상에는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각종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는 노론의 후예들이 장막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들은 더 고도화되고 더 교묘한 방법으로 뒤주를 짜고 있고, 그 슬픈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다.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영화 思悼를 더 슬프게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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