折花奇談 (절화기담)
제1회. 이씨 집안의 할미가 좋은 인연을 소개하고, 방씨네 간난이는 연애의 꿈을 깨뜨린다.
임자년(1792년)1) 즈음에 이생이라는 사람이 모동2) 에서 잠시 살고 있었다. 이생은 준수하고 고상했으며 풍채가 빼어난 데다 시나 문장도 제법 잘 했으니 당시의 재주 있는 선비였다. 그러나 그는 집안 살림을 돌보는 데는 힘쓰지 않았다. 이웃에 사는 이씨의 집에 얹혀살았는데, 이웃인 이씨는 높고 유명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 집에는 돌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우물 앞에는 온 동네의 여종들이 북적대며 늘 모여 있어 그 뜰에서 물을 긷는 풍경은 꽤나 볼 만한 것이었다.
한 미인이 있었는데 이름은 순매(舜梅)라 하고, 나이는 이제 17살로, 얼굴을 꾸미지 않아도 온갖 자태가 부족한 데가 없었고, 몸은 단장하지 않아도 온갖 아름다움이 배어 나왔다. 버들가지 같은 가는 허리, 복숭아 빛 뺨, 앵두 같은 입술, 윤기 나는 검은 머리는 진정 절세미인이었다. 그녀는 방씨의 여종으로, 시집가서 머리를 얹은 지도 벌써 몇 해나 되었다. 이생이 한 번 그 얼굴을 본 뒤로 넋이 나가고 마음이 흔들려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봉래산이 겹겹이 가로막은 듯 만날 수 없어 그저 고당의 노래3) 만 읊조리고 있을 뿐 양대의 사랑4) 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면 늘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낙심한 가운데 마음속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종 하나가 대나무가 그려진 은 노리개를 하나 가지고 와서 말했다.
“이건 방씨 집 여종이 옷고름에 매고 있던 물건입니다. 제가 이 물건을 잠시 전당잡아 가지고 있는데, 상공께서 저 대신 상자 속에 보관해 주십시오.”
이생이 속으로 뛸 듯이 좋아하며 생각했다.
‘꿈에서도 그리던 사람의 좋은 물건이 생각지도 않게 내 손에 들어왔구나. 혹시 이걸 빌미로 만날 약속이 이루어지진 않을까?’
하루는 순매가 옅은 색의 얇은 감으로 된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항아리를 이고, 손에는 두레박을 들고 가볍게 사뿐사뿐 우물가로 걸어왔다. 순간 이생은 더 이상 욕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생은 말로 슬쩍 떠본 뒤 은 노리개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이게 누구의 노리개더라?”
순매가 놀라 물었다.
“이건 제가 아끼던 물건입니다. 전에 종놈에게 전당잡혔는데 어찌하여 상공의 손에 들어갔습니까?”
이생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네 물건이라면 내 마땅히 네게 물려줘야겠구나.”
순매가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이미 전당잡힌 물건인데 어찌 한 푼도 받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생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 하고 말했다.
“뜻밖에 노리개 하나로 이미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되었구나. 인생은 물거품 같고 풀 위의 이슬과 같은 것! 청춘은 다시 오기 어렵고 좋은 일도 늘 있는 것은 아니지. 그러니 하룻밤의 기약을 아끼지 말고 삼생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어떠하냐?”
그녀는 미소만 머금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물을 긷더니 바람처럼 가버렸다. 이생은 그저 바라만 볼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루는 이생이 이웃에 있는 친구와 이씨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래 이씨의 집에는 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무슨 일에든 참견하길 좋아하고 말을 잘 해서 사람을 소개하여 맺어주는 일에 본래부터 노련한 솜씨가 있었다. 술잔이 몇 차례 돌자 이생이 조용히 말했다.
“방씨 집의 여종을 할미도 잘 알고 있을 터. 나를 위해 소개해 줘서 하룻밤의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상하겠네.”
노파가 대답하였다.
“어렵습죠. 그녀는 스스로를 곧게 지키려는 절개가 있어, 이 늙은이의 둔한 말과 억지소리로는 꼬여낼 수가 없습니다. 한강의 얼음이 어느 세월에 단단하게 얼겠습니까? 쓸데없는 말로 헛되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생은 노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노파의 마음은 갈수록 돌이키기 어려웠다. 이생이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와 홀로 난간머리에 기대어 있는데 문득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리따운 모습은 과연 마음속에 그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순매가 지치고 나른한 모습으로 곧장 우물가로 다가가니 이생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은근히 그 뜻을 떠보았다. 그러나 순매는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얼른 물을 긷고 사라져갔다.
이때는 바로 봄에서 여름으로 막 접어드는 때로, 우물가의 오동나무는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화분의 석류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제비, 꾀꼬리가 지저귀는 소리는 근심 어린 사람의 생각을 한층 더해주는 듯하여 드디어 시 한 수를 읊어 그 마음을 풀어내었다.
봄이 되니 한 그루 매화나무 꽃은 무르녹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옥난간에 기대어 있네.
향기 찾아 날아든 나비는 도로 날아가고
나부의 꿈5) 깨어보니 달그림자만 휘영청.
붓을 잡아 써 놓고 나서 그 한 편을 읊조리니, 향기로운 묵으로 쓰여진 글씨는 마음 가득한 그리움과 간절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탄식을 다 그려내고 있었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동 틀 무렵 옷매무새를 고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창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놀라 일어나 보니, 바로 이씨 집에 있는 술집 노파였다. 이생이 말했다.
“이렇게 일찌감치 찾아와 주니 퍽이나 위로가 되는군. 어제 한 말을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겠지?”
“한 마디 말을 건네 상공의 은근한 정에 보답할 수만 있다면, 제가 어찌 그걸 아끼겠습니까마는 이 일에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순매는 성품이 깨끗해서 몸은 천하나 마음은 고귀하니, 그 뜻을 앗을 수 없는 게 첫 번째 어려움이지요. 또 간난이라는 이모가 있는데, 술을 좋아하고 남자를 좋아하는 데다 좋은 점은 적고 나쁜 점은 많습죠. 그런데 순매의 행동은 오로지 이 여자의 주장에 달려 있습니다. 순매는 꼬일 수 있는데, 간난이는 꼬일 수 없으니 이게 두 번째 어려움이지요. 같은 집에 있는 여종 복련이는 음란하고 말을 잘 둘러대며 남의 동정을 잘 엿보고 그 말은 믿을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 일이 들통 나면 쇤네에게 해가 많이 돌아오겠지요.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랍니다. 허나 세 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어렵지 않은 일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속담에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합죠. 돈이 많은즉 좋은 술로는 간난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잘 생긴 남자로는 복련이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일을 도모한다면 아마 열에 한둘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요. 동곡에 사는 방진사6) 는 재산으로, 묘동7) 에 사는 이상공은은 풍류로 순매와 주선해 주기를 원한 게 여러 차례였습니다만 쇤네는 그때마다 그러겠다고만 하고 아직까지 한 번도 방법을 아뢰거나 계획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상공께서는 진실한 군자임을 알았습니다. 약간의 돈을 제게 맡기시면 상공을 위해 일을 주선해 보지요.”
“그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할미는 힘써 일을 도모해 보게나.”
이생은 즉시 돈을 찾아 주며 단단히 부탁을 하고 보냈다.
며칠이 지난 뒤 노파가 다시 와서 물었다.
“순매의 은 노리개가 상공께 저당 잡혀 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어디서 그 말을 들었는가?”
“순매가 돈이 생겨 그 물건을 찾고 싶어 해서 알게 되었지요.”
“내가 그 노리개로 빌미를 삼아 한 번 만나보고 싶으니, 할미는 나를 위해 한 번 주선해 보게나.”
노파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를 하고 갔다.
이생은 굳게 믿고는 아름다운 기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며칠 뒤에 어떤 종이 갑자기 오더니 그 은 노리개를 찾았다. 이생은 오히려 머뭇머뭇 한 마디도 못 한 채 낙담해서 내어주고는 노파의 신용 없음을 원망할 뿐이었다. 이 날 밤 촛불을 켜고 홀로 앉아 있으니 순매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누가 오지 않나 멀리 바라보았지만 반가운 소식은 오지 않고, 저만치 둘러보아도 순매가 올 기미는 흔적조차 없었다.8)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쉬면서 자리를 옮겨 상에 기대어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아리따운 여인이 노리개를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붉은 입술을 열어 달콤한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저는 비천한 여자이옵니다. 낭군께서는 어째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시는지요?”
이생이 좋아서 가슴이 설레어 손을 잡고 사랑스레 어루만지며 그리워하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석류빛 치마를 풀어 해치고 비스듬히 원앙금침에 기대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 사랑하는 마음을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이생이 바로 수작을 걸었으나 한 번 건드려도 반응이 없고 다시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기지개를 켜다가 놀라 깨니, 아, 한바탕 꿈에 불과했다. 새벽닭은 아침을 재촉하고, 등잔불 하나가 깜박거릴 뿐이었다. 참한 모습에 눈에 삼삼해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생각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생각이 났다. 그래서 흰 종이를 펼치고 붓을 잡고는 <일념홍(一捻紅)> 한 곡조를 지었다.
그리움이 오래 되니 탄식도 길어
이 적막한 봄에 한(恨)만 가득하네
낙수9) , 무산10) 은 어디란 말이더냐
보고 싶어 애끓는 사람은 등잔 앞에 앉았네
그리움은 허망한 꿈꾸게도 하고
그리움은 그 꿈을 깨우기도 하네
근심을 다 흘려 낼 듯 눈물은 비 오듯 흐르는데
별과 달은 드문드문 빛나네.
이 일이 있은 뒤로 이생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하루가 삼 년 같이 느껴지고 그 아름다운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을 한탄했다. 열흘도 더 지나 노파가 찾아왔다. 이생은 몹시 기뻐하며 함께 차를 마신 뒤에 말했다.
“할미는 중매하는 수고를 사양하지 않아 놓고는 한 번 간 뒤로 어찌 그리 소식이 없었나? 며칠만 더 지나서 왔다면 나를 건어물 상점에서나 찾았을 것이네. 이번에 온 건 진짜 전할 소식이 있어서인가?”
“제가 어찌 감히 힘을 쓰지 않겠습니까마는 가로막는 일이 있어서 아직도 그러고 있는 중입니다. 낭군의 귀하신 몸을 이 지경까지 축나게 했으니 황송하기 그지없군요. 저번 날 노리개를 돌려받을 때 절 거치지 않게 한 건 제가 끼면 괜히 에둘러 간다는 의심을 받을까 해서였습죠. 맡긴 사람이 찾아가도록 해서 다른 사람의 의심을 멀리 하여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순매가 급히 써야 할 데가 있어서 다시 은 노리개를 저당 잡혀 돈을 꾸고 싶답니다. 그래서 쇤네가 소매에 넣어 왔으니, 상공께서는 순매의 소원을 특별히 들어주셔서 한 번 만나볼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생은 은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애석해 마지않다가 즉시 약간의 돈을 노파에게 주며 말했다.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물건을 전당잡고 싶어서 노리개를 받아두는 게 아닐세. 내 뜻은 일이 이루어지는 데 있으니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네.”
노파가 응낙하고 갔다.
이생은 노리개를 가져다가 대나무 상자에 간수해 두고, 노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며칠 뒤에 노파가 다시 와서 웃으며 말했다.
“일이 이제 이뤄질 것 같습니다. 사람의 소원은 하늘이 반드시 들어주는 법이죠. 이 늙은이가 열심히 혀를 놀려 여러 가지 좋은 말로 설득한즉 순매가 상공께서 요즘 보이신 은근한 정에 대해 듣고 흔쾌히 허락하더군요. 그러니 하늘의 인연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정해진 날 어둠을 틈타 제가 상공을 모시러 올 테니, 상공께서는 그저 손꼽아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생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즉시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치하하니 노파가 인사를 하고 갔다. 이생은 이때부터 노파가 부르러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루는 이생이 근교에 일이 있어서 아침에 나갔다가 이틀 밤을 자고 돌아왔더니 노파가 길에서 맞으며 말했다.
“아쉽고도 안타깝습니다! 어제 저녁에 순매가 틈을 타서 왔기에 바로 상공을 모셔오라고 했는데 상공께서는 이미 출타하셨더군요. 좋은 인연을 그르치시다니, 이렇게 애석할 데가 있나! 순매는 이 늙은이와 술 몇 잔을 마시며 밤이 늦도록 회포를 풀면서 헛되이 하룻밤을 보냈답니다. 사랑의 깊은 맹세와 원앙의 좋은 꿈을 끝내 허사로 돌아가게 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이생이 이 말을 들으니 정신이 아찔한 것이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생이 노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사과하며 말했다.
“여러 날에 걸쳐 열심히 노력한 게 끝내 허망하게 되었구려. 생각해 봐야 공연히 마음만 상할 뿐일세. 이제부터의 계획은 오직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하는 데 있으니, 할미는 힘을 써 줘서 마음을 태우고 가슴을 졸이게 하지 않도록 해 주게나.”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고 갔다.
세월이 물 흐르듯 하여 늦가을이 다 가고, 한겨울이 되었다. 북풍은 쓸쓸히 불고 얼음 같은 눈은 펄펄 내리니, 이때는 곧 그믐날 저녁이었다. 이생이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고 있으려니 실망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파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순매가 제 집에 와서 벌써부터 상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이생은 미친 사람처럼 기뻐하며 문을 나서 노파를 따라갔다. 때는 초경 무렵11) 으로, 적막한 창문에는 외로운 등불만이 가물거렸다. 이생이 걸음을 재촉해 급히 앞으로 나아가 문을 열고 바라보니 즐거움이 손에 잡힐 듯하여, 두 손을 마주잡고 치마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순매야, 순매야. 어쩌면 그렇게 무정할 수가 있느냐? 내 근심 어린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그리운 마음은 여러 번 재가 되었단다. 다행히도 빨리 죽지 않아 오늘 이렇게 한 번 보게 되니, 하늘이 틈을 빌려주어 사람의 소원을 이뤄주는구나.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 할미의 한 가닥 기쁜 소식이 갑자기 내 안개 속 같이 답답한 가슴을 탁 트이게 해 주니, 마치 좋은 술이 속을 적시고 잘 드는 칼로 눈동자를 덮은 꺼풀을 벗겨주는 것 같더구나. 그 많은 날 그토록 그리워하던 정을 말로 다할 수가 있을까?”
순매가 옷깃을 여미고 대답했다.
“낭군께서 저를 그리워하고 잊지 않으심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목석같은 마음이라 해도 어찌 마음에 느껴지는 게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낭군께는 이미 아내가 있고 저에게도 남편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부처럼 깨끗한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건 한스럽지만, 탁문군이 스스로 사마상여를 찾아갔던 일12) 과 같은 것은 정말이지 저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생각이야 이렇게 간절했지만 낭군을 미처 뵙기 전엔 오히려 욕하고 꾸짖으며 멀리 하실 것만 같았으니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상공께 어여쁘게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보잘 것 없는 자질로 외람되이 상공의 사랑하심을 입고 보니, 만단으로 은근히 전하시는 마음을 계속 저버리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입니다. 정녀(靜女)처럼 몰래 낭군을 기다리니13) 참으로 남자를 만나기 위해 물을 건넌다는14) 혐의가 있군요.”
드디어 둘은 함께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노파는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냈다. 이생이 큰 잔으로 몇 잔을 마시자 홍조가 얼굴에 번져 오르고 봄바람이 얼굴 가득 퍼지듯 환한 표정이 되었다. 이생이 순매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은 노리개 하나가 먼저는 종을 통해 오고 나중에는 할미를 통해 내 손에 들어왔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들어 왔는가 하면 구하려고 노력해서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앞뒤 일들이 모두 하룻밤의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 냈구나. 생각해 보니 너에게는 나를 만나는 예물인 셈이로다. 이제 우리가 만났으니 내 마땅히 네게 보내는 예물이 있어야 좋지 않겠느냐?”
이생이 즉시 주머니에서 은 노리개를 더듬어 찾아 옷깃에 달아주고는 한 번 만지작거리고 또 재삼 어루만지며 소리 내어 즐겁게 웃었다. 순매가 말했다.
“낭군의 애타는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감히 이렇게 틈을 타서 약속을 지키러 오기는 했습니다만, 깊은 못가에 있는 듯 바늘방석에 앉은 듯, 마음은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같고 몸은 총알에 놀란 새와 같아서 잠시도 편안하게 마음을 높을 수가 없네요. 사나운 남편이 잠시 일이 없었는데, 요즘 승상부의 심부름꾼으로 충원되어 야간 통행금지에 구애받지 않고 다닐 수 있습니다. 만약 저를 찾아 여기 오면 그 화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 기회를 도모하는 게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생이 말했다.
“네가 벌써 여기에 왔는데 이리 좋은 밤을 그냥 보낼 수야 없지. 비록 허다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할미에게 무슨 도리가 있을 터이니 너는 걱정 마라. 술이나 몇 잔 더 하고, 즐거운 일을 펼쳐보자.”
그리고는 치마끈을 풀고 손을 놀려 더듬으니 우윳빛 젖가슴이 출렁이고 옥 같은 피부는 매끄러워서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일진일퇴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니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분 바른 뺨은 달아올랐다. 사랑의 꿈이 막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
“순매야, 어디 있니?”
제2회. 한 쌍의 원앙새가 만남의 꿈을 깨뜨리고 간난이는 중매하여 세 잔 술을 마시다.
바로 이때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순매의 이모인 간난이었다. 순매가 놀라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오자 간난이가 얼굴을 쳐다보며 꾸짖었다.
“네 남편이 지금 막 집에 돌아왔다. 너는 집에 없고, 앞뒷집에 물어봐도 자취가 묘연해서 내가 너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얼른 돌아가자.”
순매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할미가 절 위해 떡을 찌며 조금만 더 있으라고 권해서 늦어진 거예요. 의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둘은 나란히 휑하게 가버렸다. 이들이 가버린 것 같자 노파가 급히 숨을 헐떡이며 안에서 뛰어나와 말했다.
“상공! 상공! 일이 이리 되었으니 또한 어쩌겠습니까? 간난이는 눈치가 빠르고 교활한 애입죠. 방안에 사람이 있는가 의심했지만 끝까지 살피지 않은 건 혹시라도 늦어질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지금 만약 그 남편을 부추겨서 갑자기 찾으러 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상공께서는 얼른 피하셔서 불상사를 막으십시오.”
좋은 만남이 한참 이루어지던 중에 무산되어 버리자 이생은 나무인형이나 진흙 조각처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노파의 말을 듣고 보니 한층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당으로 걸어 나가니 거리에는 북소리가 세 번 울리고 북두성이 반작이고 있었다. 이생은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고 노파의 뒤를 따라 문을 나왔다. 집을 따라 담을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집에 오니, 문은 아직 잠겨 있지 않았다. 중당15) 으로 가서 촛불을 켜고 똑바로 앉아서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니, 멍한 게 한바탕 꿈 속 같았다. 만나기 전에는 그리움만이 더욱 절실했으나, 막상 만나고 나서는 기쁨이 극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헤어졌으니 걱정 근심 외에 두려운 마음까지 생기게 되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통행금지까지 어겼다는 사실을 깨닫자 도리어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이로 말미암아 좋은 기약이 뜬구름이 되어 버렸으니 억지로 마음을 크게 먹고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잊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붓, 벼루 등을 꺼내 사운시 한 수를 지어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 시는 이러하다.
만나서 애틋할 때는 선녀일까 싶더니
헤어져 원망스러우니 거문고 줄 끊어진 듯 하네
마음이 있어 연리나무16) 가 되고자 했지만
다정해도 나란히 필 연꽃17) 이 되기는 어렵다오
남녀의 만남18) 이 쉽다고 말하지 마오
월하노인의 은근한 인연19) 을 저버릴 수도 있으니
처량하고 가련하다 서로 떨어져 그리워 하니
나를 슬프게 하는 이는 여전히 꿈속에서 어여쁘네
이생이 쓰기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는데, 눈을 감으면 문득 눈앞에 순매가 아른거렸다. 산 같은 정과 바다 같은 마음을 만의 하나도 건네지 못했으니 입에서는 저절로 혀를 차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노파를 찾아가서 물었더니 노파가 맞이하며 말했다.
“지난 번 일은 참으로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순매를 만났더니 상공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어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상공을 한 번 뵈려던 참입니다. 제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상공께서 이렇게 오시니, 그 기미를 알고서 오신 거라 할 만 하군요. 지금 잠시 앉아 계시면, 제가 달려가서 순매를 불러옵죠.”
그리고는 바로 달려갔다. 이생은 홀로 창틀에 기대어 한참을 내다보고 있었다. 얼마 뒤에 신발 소리가 점점 아까워지더니 순매가 문 앞에서 활짝 웃으며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아직은 새 것인 녹색 저고리를 입고, 허리에는 연한 쪽빛 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꾸미지 않은 모습이 한층 더 아름다웠다. 이생은 그 모습에 그만 폭 빠져서 그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일전의 위급했던 상황을 다 이야기하자 순매가 말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 중에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더군요. 달빛이 어두웠기 때문에 떡을 쪄먹었다는 핑계로 말을 잘 해서 일단 넘어 갔습니다만, 오늘 만나는 것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띌까 두렵군요. 잠깐 얼굴이나 뵙고, 지난번에 경황 중에 헤어지게 된 이유와 저의 곡진한 마음을 아뢰고 싶어요. 이 달 21일은 주인댁 제삿날입니다. 그 날 저녁 때 틈을 보아 나올 테니, 낭군께서는 절대로 저버리지 마시고 여기에 먼저 와서 저를 기다려 주세요.”
이생도 거듭거듭 다짐하고는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헤어졌다. 이생이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손꼽아 그 날을 기다렸다. 약속한 날이 되어 술집 노파를 찾아가니 노파가 웃으며 말했다.
“순매를 만나기가 진짜 어렵군요. 촉으로 가는 길이 험하기는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고20) , 지금 순매를 만나는 어려움 역시 저 흰 구름 떠있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생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제가 지금 순매 집에서 오는 길인데 그 남편이 술에 취해 집에 와서는 제 멋대로 미친 듯이 술주정을 하고 있더군요. 순매가 눈짓을 보내는데 오늘 저녁 약속을 또 지키지 못할 것 같군요. 그러니 이 일을 또 어찌합니까?”
이생이 탄식을 하고, 한숨을 쉬면서 돌아갔다.
하루는 이생이 난간 끝에 기대어 앉아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노파가 난간 앞을 스치며 눈짓을 보내고 지나갔다. 이생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즉시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곧장 노파의 집으로 가 보니 순매는 방에 와서 기다린 지 벌써 오래였다. 이생이 다가가서 손을 잡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도대체 뭐기에 장부의 간장을 다 도려내느냐? 약속을 하고 오지 않았으니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차라리 약속을 안 하는 게 낫지. 너는 도대체 어떤 물건이며 어떤 사람이기에 나로 하여금 북망의 혼이 되게 하며, 황천의 원한 품은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냐? 내 가슴엔 벌써 산더미 같은 목마름이 생겼고, 천 층 불길은 내 심장과 폐를 다 불살라 버렸다. 죽였다 살리는 네 기술이 아니면, 나는 다시 일어나 사람답게 살날이 없을 것 같구나.나를 가련히 여겨다오.”
순매가 낯빛을 고치고 대답했다.
“제가 낭군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미루어, 낭군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 또한 알겠습니다. 제 비록 천한 몸이지만 저 역시 사람의 성품을 지녔으니 낭군께서 사랑해 주시는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형편상 자유롭지 못하답니다. 연약한 몸으로 용렬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비록 잠깐은 즐거웠지만 늘 타고난 운명에 대해 탄식하다가 한 번 낭군의 사랑을 받은 뒤로는 오로지 낭군을 섬기고 싶은 마음뿐 남편을 섬길 마음은 조금도 없어졌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 생각이 없고, 음식을 봐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아요. 이 한 몸의 생각은 오직 한 가지 낭군에게만 쏠려 있을 뿐. 밝은 달빛이 문을 비추며 들어오거나, 서늘한 바람이 발을 흔들 때면 은하수는 말갓말갓 반짝이고, 하늘은 아득히 높아지지요. 망루21) 의 북소리가 일경22) 을 지나 이경23) 을 알리면, 별원의 차가운 다듬이질 소리24) 는 천 번을 지나 만 번이 되어 갑니다. 이때에 짝 잃은 외기러기 울기를 다하면 님 그리는 아낙네 정을 품으며, 외로운 등불 홀로 깜박이면 아름다운 여인은 길이 탄식을 하지요. 애 끓는 그리움에 눈물 흘리며 이승의 경박한 즐거움을 탄식하면서 후세에는 낭군의 아내가 되어 수발 들 것을 꿈꿔 봅니다. 마음은 타는 듯하여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몸은 초췌해져 허리띠가 날로 헐거워졌지요. 낭군에게는 하루의 사랑이 저에게는 평생의 근심이 되니, 사랑은 원망과 짝이 되고 정은 도리어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생애, 이 세상에서는 이 한을 풀기 어려우니 다만 바라기는 죽어 개가 되고 말이 되어서라도 낭군의 지극한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데, 버들잎 같은 눈썹 사이로 한과 근심이 비구름 같이 서려 있었고, 복숭아 빛 뺨 위로는 사랑의 표정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이는 실로 이른바 ‘아름다운 흰 달은 정해진 모습이 없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옅은 구름은 바람을 막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 온갖 요염함과 나긋나긋함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생이 슬픔과 기쁨이 극에서 극으로 엇갈리며, 가까이 다가가서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었다. 이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밖에서 불렀다.
“순매 언니, 어디 있어요?”
순매가 놀라 일어나 손을 뿌리치고 나갔다. 원래 이 사람은 순매의 동생인 순덕(舜德)이었다. 순덕이 물었다.
“언니는 뭐하고 있어? 훤한 대낮에 무슨 건수를 만들고 있는 거유?”
순매가 대답했다.
“한가하게 별 일이 없어서 잠깐 이야기하러 온 거야.”
그리고 순덕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돌아갔다. 이생이 방안에서 숨을 죽이고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 나와서 참담한 심정으로 문을 나서는데,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이 멍하였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또 다시 섣달그믐이 되었다. 이생이 술집 노파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이 해도 다 끝나 가는데 좋은 기약이 여러 번 어그러졌으니 온갖 그리움을 누를 길이 없네. 이제 선물을 하나 보내려고 하니 자네는 나를 위해 잠시 이 말을 좀 전해 주게.”
노파가 즉시 이 말을 듣고 갔는데, 순매가 바로 노파를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이생이 이를 보고 생각지도 않던 일이라 몹시 기뻐하였다. 이생이 곧 섬세하게 만들어진 붉은 은장도와 옥 노리개를 주며 말했다.
“이건 청나라에서 제일 좋은 상점의 물건이다. 은에서는 그 깨끗함을 취하고, 옥에서는 그 윤기를 취하지. 옷깃 앞에 매어 두고 밤낮으로 지녀 이 마음을 부디부디 잊지 말아다오.”
순매가 받아서 이리저리 보니 화려한 기교를 한껏 다해 만든 물건인데, 초록과 쪽빛 비단실로 동심결 두 가닥을 바짝 묶어 둔 것이었다. 순매가 가슴 앞에 넣고는 감사해 마지않더니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묵은 해 묵은 약속은 이미 그림자를 잡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 되어 버렸으나, 새해 새 정은 마땅히 기약을 정하게 되겠지요. 낭군께서는 상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복 받으시라는 인사와 함께 훌쩍 가버렸다. 이생이 한 번 긴 한숨을 쉬고 나서는 한을 머금은 채 돌아왔다. 이날은 바로 섣달그믐이었다. 집집마다 부적25) 을 바꾸고, 폭죽으로 묵은 것들을 없애고, 진흙으로 만든 소26) 를 두들겨 깨고, 채색한 제비로는 상서로움을 표했다. 갑인년27) 신정이 되자 이생이 노파를 찾아가 물었다.
“그믐날 만나서 정월 대보름날 밤에 만나기로 분명히 약속은 했지만, 자네가 날 위해 다시 한 번 알아봐 주게.”
노파가 가더니 즉시 돌아와서 말했다.
“보름날에는 약속대로 한다고 합니다.”
이생이 이 말을 믿고 좋아하며 손가락을 꼽으면서 기다렸다. 이때 임금님께서 화성으로 행차하셨다가 돌아오시는 날이 마침 보름날이었다.28) 장안의 경비가 삼엄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일찍 금지시키자 이생은 혹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약속에 맞춰 가서 노파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노파가 말했다.
“매화! 매화! 파교 위의 갈매화, 유령의 봄 매화, 오월 강성(江城)에 떨어진 매화, 그 열매 일곱 개를 따주랴. 오늘 저녁의 약속은 또 어그러져 버렸습니다. 제가 힘을 쓰지 않은 게 아니나 또 어쩌겠습니까?”
“도중에 약속이 달라진 건 무엇 때문인가?”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데다가 사나운 남편이 옆에서 지키고 앉아 떨어지지 않으니 형편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하늘에는 달이 둥글고, 세상은 한가한데 이렇게 좋은 밤을 헛되이 보내다니. 좋은 사람과의 좋은 약속이 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나를 장차 기꺼이 서산의 굶어죽은 귀신이라도 만들 작정이란 말인가.”
그러자 노파가 위로하며 말했다.
“낭군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음달 초엿새 날은 한식날입니다. 전부터 이때는 간난이와 복련 두 사람이 산소에 올라가고 순매 혼자 집에 남아 집을 보게 되어 있지요. 이 날 좋은 기회를 도모해 볼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이생이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와서는 한식날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어느새 한식날이 다가오니, 이 절기는 이른 바 ‘청명한 시절 부슬부슬 비 내리니, 길 가는 행인은 넋이 끊어지는 듯하다’라고 일컬어지는 때였다. 이생이 노파를 찾아갔더니 노파는 아파 누운 지 벌써 며칠 째였다. 이생이 놀라 안부를 묻자 노파가 끙끙 앓으며 대답했다.
“제가 우연히 감기가 들어서 자리에 누운 것이 여러 날이라 순매 소식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상공께서 제 병에 차도가 있기를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나중에 다시 도모해 보겠습니다.”
이생이 급급히 안부만 묻고는 한탄하며 돌아왔다. 십여 일이 지나기를 기다려 또 가서 노파를 보니 노파가 말했다.
“지난 번 앓던 게 이제 나아서 그 사이 한 번 순매에게 가서 물어보려고 했습죠. 그랬더니 순매도 병이 들어 누운 지가 며칠 째라고 합니다. 상공께서 약값을 약간 주신다면 제가 당장에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이생이 즉시 얼마간의 엽전을 주었다. 이로부터 이생이 여러 번 노파에게 갔으나, 가면 일이 어그러지곤 하였다. 달포쯤 지나 다시 가보니, 노파가 잔뜩 성이 나서 소리를 지르고 화난 빛으로 말했다.
“이후로 다시는 순매년의 말일랑은 제게 하지 마십시오.”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이렇게 야박하게 대하는 것인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침을 튀기며 노파가 말했다.
“큰 매화, 작은 매화는 그만두고라도 상공 때문에 제가 공연히 간난, 복련 같은 도둑년들에게 의심을 당했단 말씀입니다. 상공께서 저희 집에 자주 들락거리시는 바람에 소문이 퍼져서 다섯 사람만 모여도 이야기해 대고 열 사람이 모이면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내가 죽을 때가 다 된 나이게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간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의 의심을 산단 말입니까? 저는 오로지 상공의 한결 같은 마음 때문에 작은 힘이나마 내서 세 번의 만남을 도모한 것인데 그 뜻도 이루지 못했으니 하늘이 정한 인연이 아니라는 걸 또한 알 수 있습죠. 이제 다시는 제게 순매년 따위는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말이 끝났는데 그 어투나 기색이 몹시 사나웠다. 이생이 재삼 마음을 풀라고 했으나 도저히 마음을 돌이킬 희망이 없어서 처참한 기분으로 머뭇거리다가 하릴없이 돌아왔다. 이때는 바로 늦봄 삼월 보름이었다. 푸른 버드나무 가지에서 꾀꼬리는 벗을 부르고, 붉은 살구꽃 위로는 흰나비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곳곳마다 예전 난정에서의 모임29) 을 기억하고 사람들마나 시를 읊조리며 옛 사람들의 풍류를 따라했다. 이에 임금님은 대신들30)과 여러 신하들을 명하여 궁궐에서 꽃과 버드나무를 감상하며 즐기도록 하였고, 물시계가 한 번 울린 뒤에도 야간통행을 금하지 않아서, 온 성안의 남녀들이 몹시 즐거워하며 구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생도 두세 명의 벗들과 함께 흥이 나서 달빛을 받으며 주막에서 술을 마셨는데, 제5교 입구에는 달빛이 대낮처럼 환히 비추고, 상림원31) 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이 잇달아 연주되고 있었다. 이런 경치를 대하자 이생은 마음이 동하여 순매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이생은 곧 벗들과 헤어져 지름길을 택해 자기 동네로 가서는 길을 돌아 노파를 찾아갔다. 때는 한밤중이라 사람의 자취라고는 없었다. 이생이 문을 밀고 곧장 들어가자 노파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상공께서 갑자기 깊은 밤중에 여기에 오시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는지요?”
“오랫동안 자네를 못 봤더니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서 이렇게 왔다네. 특별히 한 번 만났으니 술이나 실컷 마시면서 한편으로는 자네를 위로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 마음을 달래고자 하네. 자네는 어쩌면 이다지도 박정하단 말인가?”
노파가 감사하며 말했다.
“상공이 지금 오신 것은 순매 때문이지 저 때문이 아니시지요. 어찌 저 때문에 오셨다고 하십니까? 하지만 밤도 깊은데 이렇게 오셨으니 어찌 감히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곧바로 술을 따라 건네며 마시기를 권하자 이생이 술잔을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동안 보여준 각별한 뜻은 마음에 새겨져 있고 뼈에 사무쳤다네. 그런데 갑자기 도중에 일이 그르쳐지니, 타던 악기의 줄이 끊어진 것 같고, 물을 건너던 배가 그만 가라앉아 버린 것과 같고, 천리마 꼬리에 붙어 가던 파리32) 가 중간에 떨어진 것과 같고, 자벌레33) 가 하루 종일을 가도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한 것과 같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바라건대 할미는 다시 한 번 좋은 마음을 내서 다 죽어 가는 목숨을 구해 주오.”
노파가 한참을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이 늙은이가 요즈음 귀가 잘 안 들려 큰 소리든 작은 소리든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 한답니다. 상공께서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이생이 다시 큰 소리로 말을 하고 나서야 노파가 비로소 반쯤이나 알아듣고 말했다.
“제가 단단히 부탁드렸던 것은 ‘매(梅)’라는 한 마디 말을 입에 올려 말씀하지 마시라는 것이었지요. 이제 낭군께서 저의 당부를 들어주셔서 ‘매(梅)’자를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낭군께서는 역시 믿을만한 선비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매’자를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단어마다 ‘매’가 나오지 않음이 없고, 글자마다 도무지 ‘매’를 잊지 않으시는군요. 낭군은 가히 직접 말하지 않고도 웅변을 전하는 그런 선비십니다요. 낭군의 정성이 참으로 안되셨습니다. 이제 써 볼 만한 계책이 하나 있긴 한데, 글쎄……. 상공께서 허락하실는지요?”
“계책이라니, 어떤 계책이오?”
“이제 한 가지 계책이란 범저34) 가 말한 것처럼 멀리 있는 나라와는 외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는 그런 방법이고, 또 백리해35) 가 이른 것처럼 길을 빌려주고 괵땅을 얻는 그런 계책이지요.36) 간난이는 술을 마시면 곧 취하는데, 그때 말하면 반드시 들어줍니다. 제가 간난이를 집에 오게 한 뒤 상공을 모셔올 테니, 상공께서는 먼저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를 준비했다가 함께 마음껏 마시며 잘 대해 주십시오. 작은 인정이라도 보이시면 그 아이는 반드시 상공편이 될 겁니다. 상공께서는 겉으로 부드럽게 잘 대해 주시는 것처럼 하시면서 속으로는 마루를 빌려 안방으로 들어가신다면 상대방은 반드시 은혜에 감격 할겝니다. 그런 뒤에 상공이 바라는 일을 행하면 일이 혹시 누설되더라도 큰 질책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계책이 어떠합니까?”
이생이 기뻐하며 말했다.
“할미는 꾀주머니요 생각 보따리일세. 그 작은 뱃속에 이런 조화 속을 지니고 있다니! 만약에 할미가 삼국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족히 여자 책략가가 되었을 것을!”
이생은 바로 얼마간의 돈을 노파에게 쥐어주며 술과 안주를 준비할 비용으로 쓰게 하고는 노파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이생이 옷을 떨쳐입고 갓을 털어 쓰고는 말쑥한 모습으로 노파에게 가니, 노파는 그때 마침 간난이와 마주앉아 있었는데, 웃고 말하는 소리가 낭랑했다. 이생이 앞으로 가자 간난이가 말했다.
“상공께서는 어지껏 술자리에 어울리는 법이 없으시더니, 어찌 주막에 오셨습니까?”
“내가 본래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너와 함께 마시는 술이라면 큰 사발로 열 잔이라도 내 사양하지 않겠다.”
노파가 즉시 안주와 술병을 들고 와서 마루에 놓았다. 이생이 한 잔을 쭉 들이키고 남은 술을 간난이에게 넘기니 간난이가 한 입에 다 마시고는 바로 한 잔을 가득 따라 이생에게 올렸다. 이는 실로 ‘세 잔 술에 꽃이 합하여지고, 두 잔 술이 사람을 맺어준다’는 것과 같았다. 이생이 술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따라서 간난이에게 주며 말했다.
“속담에 ‘한 잔 술에 일이 이루어지고, 두 잔 술에 합환을 이룬다’고 했으니, 너는 이 술을 마시고 나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내어다오.”
간난이가 술잔을 들고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온몸으로 받들고자 하는데, 작은 힘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파가 옆에서 눈짓을 주니 이생이 웃으며 얼버무렸다.
“내가 너무 취해서 실언을 했구나.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그러자 간난이는 더욱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릴 뿐이었다. 이생이 취한 척 하며 작별을 고하자 간난이도 뒤이어 돌아갔다.
다음날 이생이 노파를 찾아가니 노파가 말했다.
“어제 간난이의 마음은 온통 상공께 있던데, 그쪽을 먼저 도모해 보시지요.”
이생이 화를 내며 말했다.
“조카와 만나려 하는데, 또 그 이모를 소개하는 것은 짐승도 하지 않는 일이네.”
그러자 노파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 한 말은 농담입니다. 어제 거짓말로 간난이를 꼬이면서 ‘뒷집의 상공께서 낭자를 한 번 보고 싶어 하시네.’라고 했습죠. 처음에는 짐짓 완강히 거절하더니 나중에는 흔쾌히 허락하면서 ‘내가 규방 안의 과부도 아닌데, 동쪽 담장의 여자37) 가된들 무슨 해가 있겠소? 라고 하더군요. 상공께서는 앞으로 간난이를 만나시면 반드시 잘 해주는 척 하십시오. 간난이가 그 사이에 기미를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계획이 있고 또 성공시킬 방도가 있으니, 조심하셔서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이생이 그 말대로 순순히 따르는 척 해주니, 간난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파의 집으로 왔다. 어떤 때는 은근한 정으로 맞이하고, 또 어떤 때는 길에서 아양 떠는 웃음으로 맞이하니, 좋은 일에 훼방꾼이 낀 것이었다. 이생이 계속해서 몹시 싫어하니 노파가 말했다.
“이 계책이 꺼림칙하기는 해도 위장 계책으로는 이보다 좋은 게 없습니다. 낮에는 방법이 없지만 밤에는 시간이 많으니 제가 일을 도모해 보지요. 상공께서는 조금도 염려하거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루는 노파가 이생에게 와서,
“내일 새벽종이 울리면 순매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러 올 테니 상공께서는 종이 치기를 기다렸다가 오십시오.”
하니, 이생이 여러 번 다짐하고 돌아갔다. 이 날 밤, 이생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등잔불을 돋운 채 오경38) 이 너무도 더디 오는 것을 한하면서 한잠도 자지 않았다. 마음이 심란하니 시상이 떠올라 여러 편을 읊조리고 나서, <계지향(桂枝香)> 한 수를 지었다.
달 같은 모습, 꽃 같은 얼굴 예쁘기는 하지만
젊은 날은 스무 해를 넘지 못하네
윤기 나는 검은 머리 두 갈래로 늘어뜨리고
한 점 붉은 입술은 곱고 향기로운데
애석하구나 세상에 천한 몸으로 태어났으니
개가하여 좋은 사람 따르게 하는 일이
어찌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는 것과 같으랴
발자국 소리 새벽잠을 깨우니
눈물 젖은 두 원앙 비에 젖은 듯하네
타고 남은 등잔 심지39) 아래 잠 못 이루고
남은 시간 안타까움으로 길기만 하네
사뿐사뿐 걷는 모습40) 보지 못하니
쓸데없는 말41) 공상만 하네
문을 꼭꼭 닫았으니 첩첩 막힌 산이나
산이 막아서도 근심 오는 길은 끊지 못하네
조금 있으니 새벽닭이 울고 북소리도 아스라이 그쳤다. 이생이 옷깃을 여미고 빠른 걸음으로 노파의 집으로 가니, 노파는 그때까지도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생이 안으로 들어가서 물었다.
“순매는 아직 오지 않았는가?”
“반드시 온다고 약속했습니다. 종소리가 이제 막 그쳤으니 상공께서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생이 문에 기대어 우두커니 기다렸으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니, 바라보는 눈은 뚫어질 것 같고 근심 어린 마음은 말라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어렵다’는 말도 있지만, 오늘밤에는 사람을 기다리는 어려움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다시 한 잔 술을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자니, 갑자기 창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도 어여쁜 목소리와 좋은 소리는 가려낼 수 없는 법. 이생이 급히 걸어 나가 문을 열고는 끌어안고 들어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한 덩어리가 되어 끌어당기면서 웃다가 말하다가 하였다.
“순매야, 순매야, 어쩌면 이다지도 무심하단 말이냐? 만약에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내가 병이 나 죽을 뻔했다. 하늘나라의 인간은 어디를 다니다가 이제와 왔느냐?”
“지나간 일은 말해야 소용없지요. 오늘 새벽에 온 것은 다만 약속을 지키려 온 것일 뿐, 낭군께 다른 기대를 갖게 하려는 건 아니랍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눈치를 챘거든요. 이제 날이 이미 밝았으니 누군가가 엿들을까 두렵군요. 내일 첫닭이 울 때 몰래 이리로 올 테니 낭군께서도 꼭 먼저 와서 기다려 주십시오.”
순매는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이생도 어쩔 수 없어서 탄식을 하고 보내면서,
“절대로 오늘 아침에 한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하니, 순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갔다. 이 날 밤 이생은 또 다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이 깊어져서야 잠이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하늘이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이생이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하여 문을 열고 내다보니, 아침 해가 아니라 밝고 밝은 달빛이었다. 이생이 뜰 앞으로 걸어 나와 느긋하게 배회하니 자기도 모르게 연이어 흥이 일어났다. 산보를 하며 곧장 노파의 집에 이르니, 달빛은 꽃잎을 어루만지고 바람은 버들잎을 흔들고 있었다. 이웃집 삽살개는 아따금 짖어대고 통금 해지를 알리는 북소리는 아직도 들려오고 있었다. 이생이 잠깐 처마 밑에서 쉬고 있자니, 닭이 울고 통금도 끝났다. 이생이 문 앞에서 노파를 불렀다.
“주무시는가?”
노파가 나와서 맞이하며 말했다.
“상공, 상공! 간밤에 불이 났었습니다.”
이생이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니, 노파가 웃으며 말했다.
“잠깐만 앉으십시오. 제가 자세히 말씀드립죠.”
제3회. 나이든 이생이 어린 순매를 만나고 소개받은 간난이는 도리어 훼방꾼이 되다.
한편, 노파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젯밤의 불은 다른 불이 아니라 그냥 일어난 화재42) 였습니다. 간밤에 부엌에서 난 불이 번져서 온 집이 다 탔답니다. 다행히 온 동네 사람들이 구해 주어 곧 불을 끌 수 있었지요. 순매도 도우러 와서 물을 긷느라 오고 간 것이 여러 번이라 돌아가서 곤히 잠들었을 게 분명하니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겝니다. 상공께서는 돌아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이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번 만나는 게 어쩌면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상공을 위해 만남을 다시 주선해 보지요.”
“새벽에 두 번이나 찾아갔는데도 한 번도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그 좋은 때를 다 보내 버렸으니 다시 언제를 기다린단 말인가?”
“하룻밤의 만남도 정해진 인연이 있는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상공께서는 훗날을 좀 기다려 주십쇼.”
이생은 한숨을 쉬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며칠이 지나 또 다시 노파를 찾아갔더니 방 안에서 애교 어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생이 속으로 기뻐하며 ‘순매가 나보다 먼저 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따운 듯한 미인이 웃으며 맞이하는데 보니, 순매가 아니라 간난이었다. 간난이가 일어나 맞이하며 말했다.
“일이 너무 바빠서 한 번도 상공을 뫼시지 못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이생이 또한 웃으며 은근히 몇 잔의 술을 주고받았는데, 간난이의 추태란 가히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생이 거짓으로 둘러대고는 곧 작별의 말을 건네고 돌아가니, 간난이도 불쾌해 하면서 돌아갔다.
봄이 다 가고 긴 여름이 막 시작되는 이때는 곧 4월 초순이었다. 해당화 가지 위로 꾀꼬리는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푸른 대나무 그늘에서는 제비들이 지지배배 지저귀고 있었으니, 이는 누군가가 ‘버들 빛은 흔들릴 때마다 신록이 새롭고, 꽃은 작년의 붉음보다 못하지 않네’라고 읊었던 바로 그런 때였다. 이생이 하얗게 표백한 얇은 베적삼을 입고, 허리에는 옥으로 장식된 띠를 두르고, 손에는 남평연시(南平連矢)43) 의 부채를 들고, 발에는 구름무늬 그려진 고운 빛깔의 신을 신고, 기분 좋게 슬슬 걸어서 노파를 찾았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이생이 말했다.
“요즘 와서 보고 싶은 마음을 더욱 억누를 수가 없는데 할미는 어찌 이렇게까지 신의가 없단 말인가?”
“순매가 지금 곧 올 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이생이 그 말대로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곧바로 순매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서로 반가워하며 부둥켜 잡고는 이생이 말했다.
“지난번에는 왜 약속을 어겼느냐? 얼굴을 보며 약속을 단단히 해놓고 도중에 그 마음을 바꾸다니, 차마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어찌 내 마음을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단 말이냐?”
순매가 웃으며 말했다.
“저 때문이 아니고 실은 불이 나서 그렇게 된 거랍니다. 제가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해서 약속을 어기겠습니까?”
“그렇다면 만나기 좋은 때가 언제냐?”
“내일 새벽에 지난 번 약속을 지키지요. 낭군께서도 절대로 어기지 마세요.”
“이제 네가 참으로 신의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지금 만났으니 이 기회를 그냥 놓쳐 버리고 싶지 않구나. 비록 눈앞에 화가 닥친다 해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차라리 네 치마폭에서 죽을지언정 너를 절대 그냥 놓아 보낼 수 없으니, 너는 미룰 생각 말아라.”
“낭군께서 저를 생각하심이 간절하다 해도 제가 그리워한 것보다는 도리어 못하실 걸요. 밥 때가 되어도 먹는 걸 잊어버리고 잠잘 때가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니 제 몸과 마음에는 오르지 상공의 얼굴만이 생각날 뿐이랍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데 어찌 감히 상공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저버리겠습니까? 오늘은 주인마님 시중을 드는 날인데 새벽닭이 울면 나올 수 있습니다. 편리한 때를 틈타서 곧바로 오면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겠죠. 새벽에 쨈을 내서 올 테니 상공께서는 조금도 걱정하거나 의심하지 마시고 여기 와서 기다려 주세요.”
이생이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저녁밥을 먹고 곧바로 노파의 집으로 가서는 창 아래 꼼짝 않고 앉아 기다렸다. 노파는 술과 안주를 자주 권하며 위로하고 그의 걱정을 덜어내어 불안감을 없애주려고 하였다. 방안은 쓸쓸하고 촛불은 가물가물한데 이웃집 닭이 세 번 울고 통금 해제를 알리는 북소리는 다섯 번이나 울렸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이생이 노파를 시켜 그 집 문밖에 가서 한참동안 엿보게 하였더니 노파가 돌아와 알려 주었다.
“문안에서 종종 기침소리가 들리는데, 분명 간난이와 복련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올까봐 그냥 정신없이 돌아왔습니다요. 마당이 이렇게 소란하면 순매가 편히 틈을 타 나올 수 없을 겝니다.”
이생은 그래도 문 밖에 나가 순매를 기다렸다. 조금 있으려니 새벽별도 사라지고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왔다. 이생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소매를 떨쳐 일어나며 말했다.
“대장부가 어찌 여자 하나에게 연연해한단 말인가? 이제부터는 맹세코 순매의 ‘매’자도 꺼내지 않겠네. 기가 막히고 한스러운 것은 자네가 밤낮으로 노력하던 뜻이 끝내 허사로 돌아간 것이로다.”
그러자 노파 또한 무안하여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생은 화를 누를 수가 없어 곧바로 성큼성큼 돌아갔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뒤에 노파가 찾아가니, 이생이 성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 무슨 일로 왔는가?”
노파가 대답했다.
“상공께서 이 늙은이를 박대하시다니,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분풀이하고, 안방에서 싸우고는 저자에서 얼굴을 붉히는 격이군요. 제가 그 동안 부지런히 상공을 위해 정성들인 것이 실로 적지 않은데, 상공께서 도리어 반갑게 일어나서 맞아주시지는 못할망정 제게 고마워하지도 않으시는군요. 특별히 찾아온 게 참으로 후회스럽습니다.”
“내가 자네에게 화풀이를 했네만 한편 생각해 보니 자네도 참 딱하구만. 한데 이제 와서 또 다시 만날 쾌가 있다고 하니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단 말인가? 자네, 내게 자세히 좀 말해 주게.”
“조금 전에 순매를 만났더니 잔뜩 화를 내면서 상공을 많이 원망하기에 이는 필시 상공께서 순매와 몰래 약속하시고서 제가 알지 못하도록 따돌리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제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지금 얼굴이나 보비고 속마음을 하소연하려고 온 겁니다.”
이 말에 이생이 깜짝 놀라 물었다.
“순매가 나를 원망하고 욕하다니 천만 뜻밖의 일일세. 일전에 자네 집에서 헤어진 뒤로는 얼굴이고 목소리고 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지금 따돌렸다는 말은 진정 사실이 아니라네. 머리에 하늘을 이고 발로는 땅을 밟고 있으면서 어찌 할미에게 숨길 수가 있단 말인가?”
노파가 화를 거두고는 빙그레 웃더니 말을 꺼냈다.
“아까 말은 농답이었습죠. 상공께서 어찌 나오시는지 보려고 한 번 해 본 겁니다. 아까 순매를 만났더니, 지난 번 저녁에 약속을 어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며, 가까이 있는 봉산(蓬山)인데 마치 첩첩이 가로막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요. 낭군의 괴로움과 한결 같은 마음을 저버린 건 오히려 순매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던 겝니다. 그래서 속마음을 한 번 털어놓아서 이생[此生]의 한을 씻으려고 오늘 저녁에 상공 댁으로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마루에 나와서 기다리시어 아녀자의 지극한 정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이생이 이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화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져서, 절하고 사례하며 말했다.
“그게 진짜인가? 자네가 나를 놀리려고 해 본 소리겠지. 첫 번째 약속하고 두 번째 약속하고 세 번째 부르고 네 번째 불러냈어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곧장 우리 집으로 온다니 이게 과연 꿈인가, 생신가? 자네는 분명한 말로 이 조급한 마음을 풀어 주게.”
노파가 장난스레 말했다.
“상공께서 믿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길은 멀리 있지 않다’는 말도 있으니, 상공께서는 그저 기다리고만 계십시오.”
이생이 바로 한 잔 술로 노파에게 치하하며 말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진 후에 마땅히 좋은 걸로 보답하리다.”
이에 노파가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생이 책방으로 돌아오니 곽영감이 와 있었다. 곽영감은 본래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이생은 방을 비워놓고 기다리려고 했으나, 마땅히 곽영감을 보낼 만한 곳도 없었다. 곰곰이 좋은 수가 없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곽영감이 문득 말을 꺼냈다.
“오늘은 우리 숙모님 기일이라서 나도 제사에 참여하러 가야 하나ㅔ. 자네 심심하지 않겠는가?”
이생이 웃으면서, “남은 음식이나 먹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곽영감은 그러마고 하고는 곧 나갔다. 이생이 속으로 다행히도 하늘이 기회를 주시니 참 신기하다고 여기며 바로 책방을 쓸고 닦고, 자리를 깨끗이 하고,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초경44) 무렵이 되자 눈썹 같이 가는 달이 막 떠올랐다. 이생이 문지방에 우두커니 서서 목을 빼고 멀리 바라보니, 달빛 흐르는 꽃들 옆으로 어렴풋하게 한 미인이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이생이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순매로구나.” 하고는 황급히 그 앞으로 가서 반갑게 인사하려 했는데, 보니 이웃집 여자가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생이 머쓱하여 하릴없이 머뭇거리다가 도로 물러 나왔다. 돌아와 문설주에 기대 반신반의하고 있자니, 갑자기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달빛에 자세히 보니, 과연 마음속에 둔 그 사람이었다. 이생이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손을 잡고 반기면서 말했다.
“네가 오니 내가 이제 살 것 같구나. 두 눈은 빠질 것 같고, 마음은 이미 다 타버렸다. 너라는 사람은 어떤 조화 속의 물건이기에 사내대장부의 애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게 하느냐?”
바로 손을 잡고 책방으로 들어가니, 고운 방석에 은촛대가 신방의 아름다움을 극진하게 해 주었다. 며칠이나 그리워하다가 실제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은 끝이 없고 기쁨도 다함이 없었다. 드디어 이부자리를 펴고 옷을 벗고 끌어안으니 마치 원앙새가 물에서 놀 듯, 난새와 봉황이 꽃 사이를 누비는 듯 했다. 연리지 가지 끝에는 봄빛이 유난하고, 동심대45) 위에는 흥취가 그윽하였다. 베갯머리에는 가쁜 숨이 쌓이고, 구름 같은 이불 사이로는 여자의 자그마한 발46) 이 보였다. 산과 바다를 두고 맹세하니 꾀꼬리 소리처럼 소곤소곤했으며, 수줍게 나누는 사랑의 소리는 제비의 지저귐처럼 그치지 않았다. 버들 같은 허리에는 한들한들 봄기운이 무르녹고, 앵두 같은 입술로는 가는 숨을 몰아쉬었다.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몽롱해지고 우윳빛 가슴이 출렁이니, 온갖 요염한 자태와 갖은 몸놀림은 이루 다 쓸 수가 없었다. 이는 이른 바 송옥이 신녀를 만나고47) , 군서가 앵앵을 만난 것48) 과 같으리라.이생이 이부자리에서 바로 <만정방>49) 한 곡조를 지으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새까만 귀밑머리, 초승달 같은 눈썹
살구씨 같은 눈, 앵도 같은 입술
은그릇 같은 뺨, 꽃가지 같은 몸에
가늘고도 희디흰 손이로다
사람을 놀래키는 미모는 남의 사랑을 받을 만한데
푸른 비단 소매, 금박 입힌 머리띠에
기쁨이 가득하니 쪽진 머리 살짝 헝클어지네
달 속의 항아가 세상에 내려온 듯하니
천금을 주고도 사기 어려워라
이날 밤에 함께 누린 즐거움은 이루 다 글로 쓸 수가 없다.
순매가 자리에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제 팔자가 기구하고 험해서 남편이란 자가 착하지 않습니다. 명색이 부부지, 사실 원수지요. 말만 하면 어긋나고, 움직일라 치면 헐뜯기만 합니다. 부부라면 신의를 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도타워야 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에요. 그런데 마침 이런 때 낭군께서 또 틈을 타서 이런 만남을 도모하시니, 한 가닥 살아 보려는 마음조차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군요. 비록 훌쩍 달아나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이랬다 저랬다 해서, 낭군께서도 무척이나 욕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좇아가기 어렵고, 엎어진 물은 다시 담기 어렵지요. 이 모든 게 낭군 때문인데, 낭군께서는 또한 어찌 굽어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세요? 지금이라도 부부로서의 의리를 끊고 정을 베어내어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따로 싶답니다. 그러나 염탐하고 막는 자들이 있고 담장에는 엿듣는 귀가 있으니, 진정 마음을 어쩔 수가 없는 형국이에요.”
“네 마음 또한 참으로 가련하구나. 예로부터 잘 나고 예쁜 사람들 중 행실을 바꾼 이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단다. 좋은 집에 살게 해 주는 것은 감히 약속할 수 없다만, 내 마땅히 조촐한 초가집 정도는 마련해 주마. 네 뜻이 어떠하냐?”
“부부의 정은 실로 잊을 수 없고 의리는 진실로 저버리기 어려우니, 이승에서의 기박한 운명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저승에서나마 남은 원을 이루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속담에도 ‘준마는 어리석은 사람을 태우고 가고, 미인은 늘 못난 남자와 짝이 되어 잠든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예쁜 여자는 예로부터 재앙을 부르고, 미인은 본래부터 박명한 것이지. 지금 와서 비록 한탄해도 이미 어쩔 수가 없구나. 내 너와 더불어 틈을 타서 즐거움을 맛보는 것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이어서 따뜻한 말과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으며 밤이 깊어가니, 다만 여름밤이 짧은 것을 원망할 뿐이었다. 조금 있으니, 이웃집 닭이 여러 번 울고 동쪽 창이 희미하게 밝아왔다. 순매가 치마를 잡아 띠를 두르고는 쓸쓸히 이별을 고했다. 이생이 손을 잡고서 언제 또 만날지를 은근히 다시 묻자 순매가 말했다.
“미리 정할 수가 없네요. 내일 밤 다시 시도해 보겠습니다만.”
두 사람은 정에 연연하여 차마 손을 놓지 못했다. 이생이 문 밖으로 나가 배웅하자, 순매 또한 다섯 걸음 가다 돌아보고 세 걸음 가다 또 뒤를 돌아보곤 하였다. 이생은 허전한 마음에 하릴없이 고요히 책상에 기대어 앉아 율시 두 편을 지어 마음을 담았다. 그 시는 이러하다.
나라를 망하게 한 미인50) 일까 의심하지 말아라
옥수(玉水)와 무운(巫雲)을 꿈꾼 것51) 또한 어리석지 않더냐
미인을 그리는 정이 사무치니 헌걸찬 장부의 뼈를 녹이고
친구의 우정52) 이 간절하니 미인이 애석하구나
부드러운 행동에 아름다운 넋이 사라져 버리니
그윽한 바람 앞에 달빛만 더욱 기이하다
보내고 나면 봄이 이렇게 쓸쓸할 줄을 알지 못 하여
시인은 이 밤에 그저 머뭇거리고 있구나
눈으로 보고 싶고 마음으로 기다려지는 건 그칠 수 없어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 누각에 기대어 서네
봄이 온 듯 미소 띤 뺨에, 꽃처럼 아리따운 얼굴
살짝 미간을 찡그리니, 버들 같이 가는 미인의 눈썹에 수심이 깃든 듯
밝은 달, 빛나는 별은 님 생각을 돋우고
얽힌 비와 구름53) 은 정념에 사무치게 하네
그 옛날 사마상여54) 도 사랑이 희미해져
괜스레 탁문군으로 하여금 <백두음>을 부르게 했지.55)
이 날은 바로 사월 초파일이었다. 집집마다 밝힌 등불이 온 마을에 밝게 비치고 수부56) 소리가 다투어 울렸다. 왕손의 흰 말은 해 저물녘에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놀고, 젊은 남녀57) 들은 서울 거리로 모여들었다. ‘임금이 즐겁고 신하도 즐거우니 만년토록 영원히 즐거우리로다. 달 밝고 등도 밝으니 천지가 모두 밝구나’ 하는 구절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생이 벗들을 불러 종소리도 듣고 연등도 구경하며 이리저리 거닐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순매가 생각나서 곧바로 노파를 찾아가니, 노파가 마침 방에 있다가 이생을 보고 말하였다.
“방금 순매가 왔었는데, 제가 있으라고 권하지를 못 했네요. 쇤네 생각에 상공께서는 구경 다니느라 오시지 않을 것 같았습죠. 이제 이렇게 오실 줄 알았더라면 기다리라고 할 걸 그러지 못한 게 한스럽습니다요. 순매도 상공께서 다시 안 오실 줄로 안 까닭으로 저 역시 인사를 하고 갔으니 오늘밤에는 다시 올 리가 없습니다.”
이생이 몹시 실망하여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와서는 등불을 돋우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한 번 순매 생각이 나자 잠은 문득 달아나 버리고 오로지 잊을 수 없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종이를 펼치고 붓을 잡고는 율시 한 편을 지어 근심스러운 마음을 써 내려갔다. 그 시는 이러하다.
자리를 펴니 담황색 무늬, 물결이 일어나는 듯 한데
그윽한 마음 스스로 느끼니 꿈도 이루기 어려워라
난간에 기대어 보니 바람이 부드러워
문을 열고 부끄러이 밝은 달을 기다리네
벌을 시켜 비밀한 뜻 전하렸더니
반딧불이 이별의 정 비추게 된 걸 돌이킬 수 없구나
가련한 저 직녀에게는 아름다운 기약이 있으나
은하수는 아홉 번이나 굽이치며 빗겨 있네
열흘쯤 지나 이생이 다시 노파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선녀 같은 얼굴을 한 번 이별한 후로는 더욱 멀어진 것 같고, 만단 그리워하는 마음을 다시 펴볼 길이 없구려. 자네가 나를 위해 한 번 만날 약속을 다시 잡아주지 않겠나?”
“제가 지금 당장 불러오지요. 상공께서는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파가 이생을 방안에 들어가 있게 하더니 자물쇠를 채우고 문을 닫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조금 있다가 순매가 밖에서 들어왔으나, 방문에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생이 이미 방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생 또한 순매가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고 짐작하고는 노파가 자물쇠를 풀어주기만을 기대하면서 숨죽여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낌새가 없던, 갑자기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다.
“순매가 왔을 텐데, 지금 어디 있지요?”
“순매가 문으로 들어오는 건 알았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네. 노파도 함께 온 걸로 생각했는데, 누가 먼저 오고 누가 뒤에 왔는지 알 수가 있나.”
노파가 다시 문 밖으로 나가 여러 번 두루 찾아보았으나, 도대체 행방이 묘연하였다. 노파가 돌아와서는,
“상공께서는 왜 방안에 있다고 먼저 알려주시지 않아,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신단 말입니까?”
하니 이생 또한 혀를 차며 탄식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원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 간난이가 마침 이 집에 왔다가 중문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순매가 달아난 것 또한 이 낌새를 채고 간 것이었다. 간난이가 몹시 화난 얼굴로 노파에게 다가와서 책망하였다.
“이 할망구야, 이 할망구야. 머리 허연 과부가 어찌 감히 입품을 팔고 손을 놀려 내 조카딸을 꾀였단 말이냐? 내가 눈치를 챈 것만 해도 여러 번이야. 내 이 할망구를 법으로 얽어 넣고야 말거야.”
간난이는 계속해서 이생을 향해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상공처럼 덕이 높으신 군자가 어찌 이렇게 의롭지 못한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이생이 말했다.
“이 무슨 말인고? 이 무슨 말인고? 네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내가 순매와 친하게 지낸 지는 여러 해가 되었다. 저번 날 너와 함께 술을 마신 것도 바로 네 입을 막고 눈을 가리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너는 도리어 동쪽, 서쪽도 구분하지 못하고 진짜, 가짜도 모른 채 이제 와서 책망하다니. 책망할 수 없는 처지에 책망하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이 계획을 짠 것도 바로 저 할미요, 네 눈을 속인 것도 저 할미다. 하나도 할미의 죄요, 둘도 할미의 죄니, 내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오늘 이후로 내 마땅히 너의 조카사위가 되는 걸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도처에 두루 다니며58) 나를 위해 편의를 봐준다면 얼마나 다행하겠느냐?”
말을 마친 뒤 이생은 큰 사발 하나에 술을 부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자59) 하였다. 간난이가 이 말을 듣고 나니, 너무 부끄러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마시려 하겠는가? 한사코 사양하며 마시지 않고는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물러 나왔다. 간난이는 그때부터 순매를 엄하게 감시하여 잠시도 문 밖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노파가 이생을 찾아와서 말했다.
“조금 전에 순매를 만났는데, 간난이가 감시하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비록 눈이 세 개고 입이 네 개고 두 모에 여덟 날개를 달고 있다고 해도 잠시라도 집을 나올 틈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는 백년가약이 이미 뜬구름이 되고, 흘러가 버린 물 같이 되었습니다. 상공께서는 부디부디 몸조심하시랍니다.”
이생도 이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에 시 한 편을 써서 정을 보내는 □60) 을 쓰고 영원히 이별하는 마음을 실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타고난 운명이 기구하여
변변찮은61) 못난 사람의 짝이 되었네
금정62) 에서의 첫 만남
한 번 봤는데도 마치 오래된 사이인 듯
은 노리개로 맺은 인연
두 번째 만나 다정해졌네
몸은 살지지도 마르지도 않아서
달을 그리고 아지랑이를 그려낸 듯 하고
태도는 덜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으니
분단장에, 옥을 다듬어 놓은 듯 하였네
초봄의 버들잎 같은 두 눈썹에는
늘 근심과 우수 머금어 있고
삼월의 복사꽃 같은 두 뺨에는
언제나 멋스런 정과 은근함을 띠고 있었지
지나가는 곳마다
꽃향기 살풋 날리고
앉고 서고 할 때마다
온갖 아름다움 다 갖추고 있었다네
얼굴이 이다지도 곱고 어여쁘니
몸맵시야 하물며 남고 모자라고 할 게 있겠느냐
말은 하루종일 지저귀는 앵무새 같고
허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 같았네
화려한 비단 옷 입고 자라지 않아
호사스러운 모습 싫어했고
비취 구슬 속에 자라지 않아
그녀는 담박하게 머리 빗고 단장했을 뿐이라네
아름다운 발걸음 사뿐사뿐 옮기니
예주63) 의 선녀 풍류가 있고
가지런히 주름진 연노랑 치마는
마치 수월관음64) 의 모습 같았지
물을 따라 흘러가는 꽃은
유정 무정한 탄식을 얼마나 끊어 냈을꼬
희미한 달빛 아래
사그라지는 등불로는
만나자 이별하는 탄식을 다하지 못한다네
봉래산이 멀리 가로막은 듯
가까운 곳도 멀게만 느껴지고
약수65) 건너 바라보듯
마디마디 끊어진 애는 여러 번 재가 되었다네
서상66) 의 꽃 그림자 몰래 움직이니
한 마리 개가 짖고
양대67) 의 봄꿈 처음 이루어지니
조각달이 둥글어지네
한스럽기는 봄밤이 너무 짧은 것이리
산과 바다에 맹세했건만
이생이 길지 않음을 느끼고
버드나무 꺾어 맹세하고 이듬해 꽃필 때 기약했건만
달은 무정하게도 서쪽으로 지는구나
닭은 속절없이 새벽을 재촉하나
그리는 마음을 억지로 잊기는 어려워
다시 만날 기약 없음을 슬퍼하네
어찌하여 어그러진 한 번의 만남이
졸지에 긴 이별이 되었단 말인가
깨진 거울은 어느 때 다시 합해지고
끊어진 거문고 줄은 어느 날 다시 이어질꼬
아아, 호사다마로구나
밝은 달이 이지러졌으니
마치 까마득히 높은 누각 속68) 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듯
은근한 꿈 속의 넋은 돌이키기 어렵네
저 술을 마시는 건 다만 답답한 이 내 속을 풀어보기 위함이고
이 시를 읊음은 마침 마음을 깃들이기에 족해서라오
그 모습은 꽃도 부끄러워할 만큼 아름다우니
하루라도 잊을 수가 없는데
재주는 글 잘 짓는 여자69) 에 못 미치니
만 마디 말로도 어기기 어려워라
아아, 훗날의 기약을 다시 도모할 수 없구나
외로운 베개만 쓰다듬으며 그리워할 뿐
타고난 운명이 이미 막혀 있으니
조각 구름 유유히 떠가는 것만 바라보네
스스로 인연을 끊어 영영 헤어짐을 마음 아파하고
그리움은 가이 없음을 탄식하노라
천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른다 해도
이 한은 풀리기 어렵고
세월이 흘러가도
이 사랑하는 마음 사라지지 않으리
평소의 내 마음을 조금 펼쳐
다만 내 붉은 마음을 보이니
말은 끝이 있으나
마음만은 끝낼 수가 없구나
1) 임자년 : 이 작품 속에 정조의 화성 생차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조 당시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2) 모동(帽洞) : 모곡동(帽谷洞). 지금의 종로 3가 일대.
3) 고당(高唐) : 초(楚)나라 때 운몽택(雲夢澤) 가운데 있던 누대(樓臺)의 이름으로, 무산(巫山)의 신녀(神女)가 나와 놀았다는 곳, 무산 신녀는 초나라 희(憘)왕이 고당에 갔을 때 꿈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선녀이다.
4) 양대(陽坮) : 陽臺.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나오는 누각의 이름.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소를 가리킨다. 양대의 꿈은 남녀가 만나 사랑을 이루는 꿈을 말한다.
5) 나부몽(羅浮夢) : 수나라의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에서 꿈에 매화나무 숲의 정령인 미녀 나부소녀를 만났다는 이야기의 고사.
6) 원문에는 진사(進賜)라고 되어 있는데 進士의 오기인 듯 하다.
7) 묘동(廟洞) : 지금 종로구 종묘 부근의 동네.
8) 남전(藍田) ․ 옥저(玉杵) : 남전은 옛날부터 좋은 옥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며, 이 주변에는 선굴(仙窟)이 있다고 한다. 남전현 동남쪽 남수(藍水) 위에 남교가 있는데, 남교는 당나라 배항이 남교에서 운영을 만난 곳으로, 또 미생이 여자를 기다리다 물이 불어나자 난간을 잡고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배항이 남교에서 운영을 만난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배항(裵航)이 남교역(藍橋驛)을 지나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구하다가 운영(雲英)이라는 여자를 보고는 예를 갖추어 아내를 삼았다. 그리고 옥으로 된 절구를 얻어 백일 동안 약을 만들었는데, 선녀가 배항을 맞이하여 아내를 데리고 오게 해서 함께 옥봉동(玉峯洞) 안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이생이 순매를 기다리는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9) 낙수(洛水) : 예(羿)와 복비(宓妃)가 사랑을 나눈 낙포(洛浦)를 말함. 예는 활을 잘 쏘는 사람으로 서왕모로부터 불사약을 훔쳐왔으나 그 아내인 항아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나 버렸다는 고사가 전하는 신화적 인물이고, 복비는 복희씨의 딸로 낙수에서 익사하여 낙수의 신이 되었다는 신화적 인물이다.
10) 무산(巫山) : 초나라 희왕이 고당에 가서 낮잠을 잤는데 꿈에 무산의 신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고 해서 이후에 남녀의 정사를 일컫는 말로 쓰임.
11) 초경(初更) :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12) 문군자매지행(文君自媒之行) : 탁문군(卓文君)이 스스로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찾아간 일을 말함. 탁문군은 한(漢)나라 촉군(蜀郡)의 부호인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이 과부가 되어 집에 와 있을 때 사마상여가 탁왕손의 잔치에 왔다가 거문고를 타면서 문군의 마음을 유혹하자 문군이 그 소리에 반해 밤에 집을 빠져나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
13) 정녀지사(靜女之俟) :『시경』, <패풍(邶風)>. ‘정녀기주 사아성우(靜女其姝 俟我城隅)’ - “정숙한 여자가 아름다웠다네, 그녀가 나를 성 모퉁이에서 기다린다네.”에서 온 말.
14) 섭진(涉溱) :『시경』, <정풍(鄭風)>. ‘건상섭진(蹇裳涉溱)’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치마를 걷고 진강이라도 건너 가겠어요.” 에서 나온 말.
15) 중당(中堂) : 마루. 제사 때 신주를 놓거나 또는 중요한 손님을 맞거나 의식을 거행하는 집 가운데의 마루.
16) 연리수(連理樹) : 뿌리와 줄기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 결이 연결되어 하나가 된 나무를 말함. 서로 깊이 좋아하는 부부나 남녀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7) 병두련(竝頭蓮) : 한 줄기에서 두 송이의 꽃이 피는 연꽃. 부부나 남녀의 사랑이 깊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18) 상중약(桑中約) : 뽕밭에서의 약속. 뽕밭은 사랑하는 남녀의 밀회 장소를 뜻한다.『시경(詩經)』에 있는 시제의 이름이며, 남녀의 사랑을 읊은 노래이다.
19) 월하연(月下緣) :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다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맺어주는 인연. 당나라의 위고(韋固)가 장가들기 전 송성(宋城)을 여행하다가 보니, 달빛 아래 한 노인이 주머니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주머니 속에 붉은 줄이 들어 있기에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부부의 발을 묶는 끈으로 서로 원수거나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 끈으로 묶으면 끝내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20) 촉도지난, 난어상청천(蜀道之難, 難於上靑天) : 이백의 <촉도난(蜀道難)> 첫 머리에 나오는 구절. 촉도는 사천성에 있는데 옛날 촉나라로 통하는 길로 몹시 험한 길이었다고 한다.
21) 초루(醮樓) : 성문 위에 세운 망루.
22) 일경(一更) :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23) 이경(二更) :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
24) 한침(寒砧) : 한저(寒杵). 차갑게 들리는 다듬이 소리. 추운 가운데 듣는 소리.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25) 도부(挑符) : 복숭아 나무로 만든 부적. 옛날에는 이것을 정월 초하루에 문에 붙였다.
26) 니우(泥牛) : 춘우(春牛). 진흙 또는 종이, 갈대로 만든 소. 입춘 전날 이것을 두드리며 봄을 맞이했다.
27) 본문의 갑인년은 1794년으로 보인다.
28) 정조가 화성, 즉 지금의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해 1월 12일에 대궐을 떠나 15일에 돌아온 일을 말한다.
29) 난정고사(蘭亭故事) : 진(晉)나라 영화 9년 3월 3일 황희지가 당시의 이름난 문사 41인과 함께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여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놀았다는 고사. 모두 시를 짓고 왕희지가 그 서문을 썼다.
30) 각신(閣臣) : 조선시대 규장각에 소속된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의 관원.
31) 상림원(上林園) : 장원서(掌苑署)의 본래 이름. 조선시대 금수를 기르던 동산과 화초, 과일나무를 기르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 한성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다고 한다.
32) 기미지승(驥尾之蠅) :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 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어 멀리까지 간다는 뜻으로 후배가 명망 있는 선배에 기대 덕과 이름을 얻는다는 데서 온 말이다.
33) 척지지충(尺地之虫) : 자벌레. 몸을 움츠렸다 폈다 하면서 기어가는 모양이 자로 땅을 재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34) 범저(范雎) :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 자는 숙(叔). 멀리 있는 나라와는 외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계속 공격하는 책략을 진나라 소양왕에게 진언하여 진나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데 공을 세워 재상이 되고, 응후에 봉해졌다.
35) 백리(百里) : 백리해(百里奚).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 처음에는 벼슬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길에서 걸식을 하기도 했으나 진나라 목공이 등용하여 국정을 맡겼다.
36) 가도취괵지계 : 도로를 다른 나라에 빌려주고 그 땅을 빼앗는 계획.
37) 동장지녀(東墻之女) : 송옥이 쓴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 나오는 미인. 동쪽 담장 안의 여인은초나라 대부 송옥(宋玉)의 집 동쪽에 살았다는 초나라 제일의 미인으로 담장 너머로 여러 번 송옥을 엿보았지만 송옥 자신은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38) 오경(五更) :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
39) 등화(燈花) : 불심지 끝이 타서 맺힌 불똥이 꽃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등화라 했다.
40) 능파보(凌波步) : 미인의 걸음걸이가 가벼운 모양을 표현하는 말.
41) 황어(簧語) : 황은 피리의 종류인데,『시경』<소아> “교언(巧言)” 장에 의거하여 쓸데없는 말, 교언, 망언의 뜻으로 보았다.
42) 회록지재(回祿之災) : 화재. ‘회록’은 불의 신으로, ‘회록지재’는 화재라는 뜻으로 쓰임.
43) 남평(南平) : 중국의 국명 또는 지명. 연시(連矢)는 미상.
44) 초경(初更) : 일경(一更).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45) 동심대(同心帶) : 머리를 묶는 방법. 굳은 약속을 비유하는 말.
46) 금련(金蓮) : 황금으로 만든 연꽃이라는 뜻인데, 여자의 작고 가는 발, 또는 전족한 발을 가리킨다. <금병매>의 반금련이라는 이름도 전족한 발이 몹시 작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47) 송옥투신녀(宋玉偸神女) : 송옥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의 궁정시인으로 굴원(屈原)에게 사사하여 초나라의 대부가 되었으나, 뒤에 실직하였다. 굴원 다음 가는 부(賦)의 작가로, 두 시인을 ‘굴송(屈宋)’이라 불렀다. 송옥이 지은 <고당부>에 무산의 신녀가 등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산 신녀는 초나라 희왕이 고당에 갔을 때 꿈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선녀이다.
48) 군서우앵랑 : 군서와 앵앵은 <서상기>에 등장하는 남녀 인물.
49) 만정방(滿庭芳) : 곡조의 이름.
50) 경성경국(傾城傾國) : 온 성을 기울게 하고 온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인이라는 뜻.
51) 초양왕의 고사를 참고할 것.
52) 금란(金蘭) : 마음이 맞는 친구의 사귐이 굳은 것은 금 같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것은 난의 향과 같다는 뜻으로 매우 친밀한 사귐을 비유한 말이다.
53) 체우우운(殢雨尤雲) : 남녀의 사랑 혹은 여자의 아름다운 자태를 가리킴.
54) 장경(長卿) :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킴. 장경은 그의 자. 사마상여는 중국 전한의 문인으로, 사천성 출생. 고향으로 돌아간 후 그는 가난하고 궁한 생활을 하며 <자허부>를 지었다. 그의 이야기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탁문군과의 연애사건이다. 고향에서 곤궁에 처해 있을 무렵 사천성의 부호 탁왕손에게 초대된 자리에서, 그 딸인 문군을 보자 연정을 품게 되어 성도로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 두 사람의 생활은 극도로 가난하고 궁하여 수레와 말을 팔아 선술집을 차렸다. 문군이 술을 팔고, 상여는 시중에 나가 접시닦이 일을 하였다고 한다. 훗날 재산을 분양받아 부유해진 상여는 정치적 야심은 없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섬서성 무릉에 칩거하였다.
55) 탁문군 : 한나라 촉군의 부호인 탁왕손의 딸. 과부가 되어 집에 와 있을 때 사마상여가 탁왕손의 잔치에 왔다가 거문고를 타면서 문군의 마음을 유혹하자 문군이 그 소리에 반해 밤에 집을 빠져나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 뒤에 사마상여가 다른 여자를 첩으로 삼으려 하자 <백두음>을 지어 이를 말렸다.
56) 수부(水缶) : 물장구.
57) 사녀청삼(士女靑衫) : ‘사녀’는 남녀(男女)를 가리키고, ‘청삼’은 청년을 뜻함.
58) 주장(周章) : 두루 다니다. 주유(周遊)와 같은 뜻.
59) 압경(壓驚) :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일.
60) 원문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미상 처리함.
61) 쾌(噲) : 변변찮은 무리.
62) 금정(金井) : 이생이 순매를 처음 본 우물을 가리키는 듯함.
63) 예주(蕊珠) : 꽃술이나 구슬로 장식한 궁전으로 신선이 머무는 곳. 선경(仙境).
64) 수월관음(水月觀音) : 삼십 삼 관음상 중의 하나. 하늘에 뜬 달이 물속에 비친다는 뜻으로 인생의 허무에서 나온 고난을 구제하여 달관하게 하는 사색적인 보살.
65) 약수(弱水) : 지금의 김숙성의 장액하(張掖河). 또는 선경(仙境)에 있다는, 홍모(鴻毛)도 가라앉는다고 하는 강. 약수 건너 바라 본다는 뜻은 약수지격에서 나온 말로 약수지격은 멀어서 도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66) 서상(西廂) : 집의 서쪽 편에 있는 방.
67) 양대(陽臺) : 송옥의 <고당부>에 나오는 누각의 이름.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소를 가리킨다.
68) 최외(崔嵬) : 까마득히 높은 산, 또는 집이나 누각이 높은 것을 말함.
69) 영서(咏絮) : 문재가 있는 여자를 일컫는 말. 진나라 왕응의 처 사씨가 눈을 버들 솜에 비유해서 순식간에 훌륭한 시를 지어냈다는 고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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