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의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이름난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었던 홍랑(洪娘)은 기생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위치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과 비석이 버젓이 있으며,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시제와 제사를 홍랑에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기생으로는 유일하게 사대부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홍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시대적 질곡을 뛰어넘어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홍랑의 이 무덤을 근거로 그녀의 애틋한 삶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역사속의 엄연한 현실로 각인된 한 여인의 지고한 사랑과 정신을 만날 수 있어서 그 감동은 더욱 커진다.
함남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누구나 다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로 머물지 않았다.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내뿜어지게 된다.
고죽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과거에 합격한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옛 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경성의 최고 기생이었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인데,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 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옆에 피어있는 산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지금도 외우고 있는 “묏버들 가려꺾어”이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앞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처럼 그가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바람에 바람을 타고 멀고 먼 경성의 홍랑에게도 들렸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곧 바로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찾아 갔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양계의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가 돌아가신지 1년이 채 안 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지만 최경창은 자신을 향한 홍랑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는데, 안타깝고 가여운 자신의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고 한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에 올라서 옛노래를 부르지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 했던 그녀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몸을 씻거나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홍랑은 또한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벙어리가 되어 스스로 병신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시묘살이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 덕분에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켰으니,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숨 막히는 사랑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최경창의 유작은 그 후「고죽집」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글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홍랑의 무덤 옆에는 1980년대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홍랑가비가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서있는데, 그 시비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로 만들어 세운 이 시비는 앞면이 고죽시비라 되어 있고, 뒷면이 홍랑가비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가비는 처음에는 마을 뒷편에 세워졌으나 나중에 묘역 옆으로 옮겨서 지금은 묘역 옆에 있다
이 비석은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함께 있으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성과 재치를 느끼게 하는 노래비가 아닐 수 없다.
가람 이병기가 시조와 한시가 진품임을 확인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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