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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에서 피어나는 새벽

― 인생의 시그마를 계산하는 시간

砅涓 鄭承衍

 

나무 책상 위,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 한 모금,
저무는 노을처럼 짙고 기분 좋게 쌉싸름하구나.
한때 내가 추적하려 했던 시간의 미적분처럼,
내 젊은 날의 모든 미분된 조각들은 저마다의 흔적을 남겼네.
이제 내 모든 세월의 묵직한 총합, 거룩한 시그마(∑)가
지평선의 끝자락에서 나의 지친 이름을 부르네.

 

늙어감(老來)이란 참으로 다듬기 어려운 길이어라,
서툰 걸음과, 놓쳐버린 선택들과, 내어준 것들이 얽힌 길.
그러나 성모님의 자애로운 품, 거룩한 은총 아래에서
나는 이 고요한 곳에 놓인 '징검다리 돌(砅)' 하나를 발견하네.
비록 내 손은 느려지고 붓끝은 갈수록 흐려질지라도,
내 참된 영혼의 먹빛은 아름답게 깊어 가네.

 

성모님의 자애롭고 온화한 시선 아래,
나는 어린아이처럼 신뢰하며 이 어려운 늙어감의 길을 걷네.
깊은 물이 흐르는 후회의 시냇물 위로,
그분은 나를 인도할 '징검다리 돌(砅)' 하나를 살며시 놓아주시네.
비록 내 손은 느려지고 붓끝은 갈수록 흐려질지라도,
어머니의 다정한 품 안에서, 나의 마지막 기도는 아름답게 깊어 가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젊음이 사라지는 일일까. 몸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기억이 희미해지며, 한때는 어렵지 않았던 일들이 점점 힘겨워지는 일일까. 물론 그것도 늙어감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생의 황혼을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앞을 바라보느라 바쁘다.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무엇을 더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현재보다 중요하게 느껴지고, 지금의 부족함은 언젠가 이루게 될 성취로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촉한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멀리 가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자주 잊어버린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걸어온 길이 생각보다 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길에는 성취와 기쁨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잘못된 선택과 놓쳐 버린 기회, 끝내 전하지 못한 말, 조금 더 다정했어야 했던 순간들도 함께 놓여 있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기억,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 용기를 내지 못해 포기했던 꿈도 세월의 흔적 속에 남아 있다.

인생의 황혼은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라보게 되는 시간일 것이다.

 

한 편의 시에서 나는 이러한 인생의 여정을 미분과 시그마(∑)라는 수학적 개념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발상을 만났다.

젊은 날의 경험은 미분된 순간들로 남고, 그렇게 축적된 시간은 마침내 하나의 시그마, 곧 삶 전체의 총합을 이룬다는 생각이다. 수학의 언어가 인생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이다.

미분은 한순간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이고, 시그마는 여러 항을 하나로 모으는 기호다.

물론 수학적으로 미분과 합산은 서로 다른 연산이다.

그러나 인생을 비유하는 언어로 바라보면, 두 개념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순간순간의 변화에 집중하며 살아온 우리가 어느 날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면,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젊은 날의 우리는 삶의 미분값을 계산하듯 현재를 끊임없이 측정한다.

어제보다 나아졌는가. 다른 사람보다 앞서 있는가. 내가 선택한 길은 올바른가. 지금의 노력은 충분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우리는 순간의 성취와 실패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화가 더디면 불안해하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의 삶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게 분주하게 살아온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나의 삶 전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순간의 실패는 그 자체로 실패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가 훗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게 했다면, 그것은 삶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젊은 날의 잘못된 선택이 오랜 방황을 가져왔더라도, 그 경험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 시간은 단지 버려진 시간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인생의 총합은 성공과 실패를 단순히 더한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사건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젊은 날에는 개별적인 사건의 크기가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사건들을 연결하는 의미가 중요해진다. 한때는 인생을 뒤흔들 만큼 큰일이었던 것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작은 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깊은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인생의 시그마는 살아온 시간의 합이면서, 그 시간에 부여한 의미의 총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생을 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반드시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뜻일까. 남보다 더 높은 곳에 도달했다는 뜻일까. 어쩌면 자신의 삶에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마침내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이해한다는 일이 언제나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삶을 돌아볼수록 후회는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때 조금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사람,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더라면 좋았을 관계, 두려움 때문에 포기했던 기회, 사랑하면서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뀐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고, 어떤 잘못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구석에 남는다.

젊은 날에는 후회를 미래의 노력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더 잘하면 되고, 다른 기회를 잡으면 되며,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에 이르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뒤늦게 사과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았던 과거를 되찾아 줄 수는 없다. 놓친 기회를 다른 기회로 대신할 수는 있어도,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것이 늙어감이 주는 쓰라린 깨달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회의 시냇물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시냇물을 없애 버릴 수도 없고,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 앞에 주저앉아 평생 자신을 탓할 수만도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건너가는 일이다.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 잘못이 자신의 삶 전체를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일이다. 지나간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에는 조금 더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이다.

 

어쩌면 용서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더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만으로 모든 후회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실은 너무 크고, 어떤 잘못은 너무 깊으며, 어떤 기억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게 기대고 싶어진다.

이 시에서 성모님의 은총은 그러한 의지처로 다가온다. 특히 후회의 시냇물을 건너도록 놓아 주는 징검다리의 이미지는 신앙이 지닌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징검다리는 시냇물을 없애지 않는다. 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지도 않는다. 다만 물속에 발을 디딜 곳을 마련해 준다. 건너야 할 물은 여전히 흐르고, 그 물을 건너는 일은 결국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건너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나는 이 이미지가 신앙의 한 본질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신앙은 반드시 고통이 사라지리라는 약속이 아니다. 지나온 삶의 잘못이 모두 없어지리라는 보장도 아니다. 오히려 고통과 후회가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다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힘에 가깝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자신의 발로 걸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사랑이 있었고, 용서가 있었으며, 말없이 곁을 지켜 준 사람이 있었다.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모든 도움 속에서 은총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조차 수많은 사람의 도움 위에 서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배려와 용서가 있었고, 내가 무너질 때 나를 붙들어 준 손길이 있었다. 인생의 황혼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많은 도움과 사랑에 기대어 있었는지 깨닫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깨달음은 감사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몸은 이전과 같지 않다. 손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시력은 흐려지며, 오랜 시간 공들여 해 오던 일도 예전만큼 수월하지 않다. 젊은 날의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늙어감은 분명 많은 것을 잃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를 신체적 능력과 생산성만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에는 빠르게 판단하고 능숙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다른 능력이 생겨날 수 있다. 쉽게 단정하지 않는 마음, 타인의 실수를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보는 시선, 말하지 않은 슬픔을 알아차리는 감수성, 그리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지혜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누구나 저절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세월은 경험을 쌓아 주지만, 경험이 반드시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찰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깊어질 수도 있고, 오히려 과거의 상처와 편견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을 배웠느냐일 것이다.

시에서 손이 느려지고 붓끝이 흐려져도 영혼의 먹빛은 깊어진다는 생각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신체의 능력은 쇠퇴할 수 있지만, 삶을 바라보는 눈은 더 깊어질 수 있다. 젊은 날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고통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고, 과거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자신의 부족함도 이제는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깊이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경험을 돌아보고,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마음을 열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조금씩 만들어진다.

 

그렇게 본다면 늙어감은 단순히 능력이 줄어드는 과정만은 아니다. 어떤 능력은 사라지지만 다른 능력은 자라날 수 있다.

삶의 폭은 좁아질지 몰라도 삶을 이해하는 깊이는 더해질 수 있다.

젊음이 삶의 가능성을 넓히는 시간이라면, 노년은 그 가능성들이 남긴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새벽을 시작의 시간으로, 황혼을 끝의 시간으로 생각한다.

새벽에는 가능성이 있고 황혼에는 회한이 있다고 여긴다.

새벽에는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황혼에는 이미 많은 것이 늦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

어떤 깨달음은 젊은 날에는 찾아오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살아 보고, 많은 것을 잃어 보고, 자신의 선택을 돌아본 뒤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용서의 의미도, 감사의 깊이도, 사랑의 무게도 그렇다.

황혼은 끝을 향해 가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그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의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실패가 남긴 의미는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상처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야만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한 사람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하는 일, 오래 미루었던 사과를 건네는 일,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일, 지나온 삶을 원망만 하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일. 그러한 작은 순간들이 모여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다.

 

황혼이 새벽을 피워 낸다는 말은 어쩌면 바로 그런 뜻일 것이다.

끝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향해 가는 시간 속에서도 새로운 이해와 감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삶의 마지막 장은 앞선 모든 장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새롭게 해석하고, 남은 시간을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작이다.

나는 이 시가 전하는 은총의 의미를 여기에서 발견한다.

은총은 지나온 삶을 완벽한 삶으로 바꾸어 주는 마법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했던 삶을 불완전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사랑과 용서와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힘에 가깝다.

젊은 날의 경험이 하나씩 쌓여 인생의 총합을 이루듯, 남은 날들의 작은 기도와 감사도 삶의 마지막 의미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나온 시간에 후회가 많다고 해서 삶 전체가 실패인 것은 아니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다고 해서 남은 삶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만으로 자신의 삶을 판결하지 않는 일이다.

삶은 끝나는 순간까지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시그마를 계산한다는 것은 지나온 모든 일을 합산하여 성공과 실패의 점수를 매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 성취와 좌절, 사랑과 상실을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에 감사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총합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삶의 총합에는 애초에 완성이라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경험이 더해지고, 지나온 사건의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 훗날에는 삶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가올 수 있고, 실패라고 여겼던 선택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새롭게 이해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나는 황혼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저무는 빛만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황혼에는 낮 동안의 빛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동시에 하루의 모든 빛이 한데 어우러지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아침의 빛이 새로운 하루의 약속이라면, 저녁의 빛은 지나온 하루가 남긴 흔적이다.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젊은 날의 새벽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황혼의 새벽에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있다. 전자의 희망이 가능성에서 비롯된다면, 후자의 희망은 받아들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젊음의 회복이 아니다. 오히려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에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다.

그러므로 황혼은 반드시 어둠으로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오랜 세월의 빛과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새벽을 피워 낸다.

그리고 그 새벽은 달콤하기만 하지도, 쌉싸름하기만 하지도 않을 것이다. 기쁨과 후회가 함께 있고, 상실과 감사가 함께 있으며, 끝을 향해 가는 슬픔과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이 함께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맛일 것이다.

이제 나는 삶의 총합을 묻는 질문 앞에서 조금 다른 답을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보다 무엇을 이해하게 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졌는가보다 그 시간을 통해 얼마나 깊어졌는가.

얼마나 많은 후회를 남겼는가보다 그 후회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누구를 용서하며, 누구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에 감사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지나온 삶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삶을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을 조금 더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질문이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삶의 아름다움은 끝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동안에도 마음이 깊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모든 후회를 없앨 수는 없지만 후회만으로 삶을 판단하지 않을 수 있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배워야 할 삶의 지혜인지도 모른다.

 

황혼은 젊음의 반대말이지만, 희망의 반대말은 아니다.

저물어 가는 시간에도 새로운 깨달음은 피어날 수 있고, 느려진 손끝에서도 깊어진 영혼은 자신의 빛을 드러낼 수 있다. 지나온 세월의 총합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다면, 아직 건너야 할 후회의 시냇물 앞에서도 은총의 징검다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의 황혼은 더 이상 단순한 끝이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새벽이 시작된다.

달고 쌉싸름한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황혼은 마지막 어둠이 아니라 가장 깊은 빛으로 나아가는 시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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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砅涓鄭承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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