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에 만난 새 선생 3제
서암. 기호민
1, 품에 든 꽃조개
'꽃조개'라는 조개가 있나 생물 도감을 찾아 볼 참이다. 있으면 됐고, 그런 조개가 없다면, 작은 따옴표를 달아 '꽃조개'라고 쓰고 내가 만든 조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엊그제 100 일 지낸 내 손자 놈 (8대 종손)이 이 할아비와 '눈맞춤'하는 순간이면 '꽃조개'를 보인다. 이가 안 난 빠알간 잇몸을 내보이며, 꽃잎같이 얄포롬하고(얇찍하고) 앙증스러운, 조개 윤곽선같은 입술을 환하게 열며 웃는 모습이라니..... .
요렇게 귀엽고 이쁜 모습을 일언지 폐지, '일필휘지 화법'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고 자작 퀴즈를 내 놓고 한참 뜸들이다 떠올린 낱말이 예의 '꽃조개'라는 이름인 것이다.
1주일 전에 내 손자가 반도 중부 청주에서 따뜻한 남쪽 광주로, 제 어미 아비가 모는 승용차에 의해 실려왔다.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현상의 묘사라 말도 설다) 말이 따뜻한 광주이지, 청주 제 집은 이 초 겨울에도 반팔 반바지로 사는 아파트지만, 30년 다되어가는 단독 주택인 이 할아비의 집은 온 집안이 온통 '외풍 놀이터'다.
실상 내 손자는 따뜻한 '북쪽'에서 추운 '남쪽'으로 찾아 온 것이다.
이리 된 사연은 길것도 없다. 청주에 직장을 가진 맞벌이 부부 아들, 며느리가 첫 애를 낳
았다. 3개월 출산 휴가 끝나고 다시 직장을 나가야 하는데, 텅 빈 아파
트에서 세상 나온 지 얼마 안된 내 손자가 집을 보기는 커녕 제 우유
도 챙겨 먹을 수 없다 이거다. 10 여일 전 며느리가 '어머님, 아버
님' 불러 놓고, 한 참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전화라, 보지는 못해
도 우는 게 뻔했다. 한 참 만에 '별 수 없을 것 같애요. 아기를 광주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낼 수 밖에요.... 주말마다 저희들이 내려가야
죠.' 했던 것이다.
내려온 토요일 오후와 밤 그리고 이튿날 일요일 오전을 붙어 있다가
오후에 떠나면서 어미는 눈이 붓게 울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가는데
그러는 걸 보는 속이 어디 좋았겠는가! 할머니 품에 인계되어 자고 있
는 어린 것을 보며 '이 모두 인생고 아니 현대고(現代苦)로다' 하였다.
어미 떨어진 손주놈의 첫 밤은 애처러웠다. 보채는 제 놈은 어쩐지 몰
라도 한 밤중에 유난히 높은 소리로 울어 쌓는데, '저 떨구고 간 어미
를 원망하는 듯, 살점 떨어지는 듯한 이 아픔을 어찌할 것이냐는 하소연
으로 들려, 어린 것과 함께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요놈과 붙어 살기 1 주일이 된 요즈음은 우리 '교재 속'이 상당히 달라
졌다. 보채는 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가 이 놈을 담쑥 안고 둥게질을 치
노라면, 이 할애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 맑은 동공을 통과
머리 깊숙히 '사람 반기는 뇌' 속에 입력시켰는지 예의 그 '꽃조개 웃
음'를 방실거리며 내 간장을 녹이는 것이다.
늙발에 웬 고생이냐고 여기저기서 걱정들 한다. 눈 찔끈 감고 '못한
다'고 '탁 털어버리는 것이 수다'고 '코치'하며 내 말 섣불리 듣지 말
라는 듯 제법 엄격한 표정 짓는 이웃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닌 내 요즈음이다. 요
녀석이 조금만 '킁!'한다 싶으면 '자원 입대 지원병'처럼 달려들어, 가
슴팍에 쓸어 안고 부르르 떨며 아양을(?) 떠는 건 오히려 이 할아비 내
쪽인 것이다. 그렇게 해 쌓면 버릇 나빠진다고 육아법 강의는 혼자 도맡
아 하던 나였지만, 그 건 남에게 하는 말일 경우인 것이다.
하기야, 늙발의 고생 탁 털어버릴려는 사람들 편에 서서 사안으로 치
면,그럴 만하기도 하다.
내 이 '꽃조개' 경우만 빼고... .
2, 수신(修身) 선생 내가 손자 놈에게 애교만 배운 게 아니다. 요놈이 또 내 수신 선생 노 릇을 톡톡히 한다. 이 녀석이 제 엄마 품 그리워 보채는가 싶으면, 나 는 하던 일-그 일이 고추 다루는 일 정도가 아니라면-을 내던지고 달려 가 냉큼, 놈의 양 겨드랑이를 치켜 들어 올렸다가 내 왼 쪽 어깨 쯤 살포시 내리고, 내 양 팔을 x자로 교차해 받쳐 안으면, 이 녀석의 연 한 뺨이 내 왼 쪽 뺨에 닿게 마련이다. 이 순간 가시에 찔린듯이 질겁 한 소리가 나며 이녀석의 몸체가 벌떡 뒤채인다. 아풀싸! 이 할애비의 유난히 쇠 솔같이 억센, 하루 자란 수염이 스쳤던 것이다. 이 할애비가 더 질겁했다. 아하, 면도를 그것도 아침 아니, 새벽 일찍 면도를 해야겠다. '대각'하 는 순간이다. 정 급할 때는 우선 왼 뺨 만이라도... .
생각난 김에 추가
사항도 새겨두자. 이 8대 종손 내 손자를 손댈 때는 사전에 반드시 손
을 씻고 양치질을 .....
또 옷도 화학 섬유 말고 면 제품으로 디자인보 다는 깨끗 유지.... . 군대 선임하사는 약과다. 이놈이 아주 내 '몸 닥달'을 철저히 '실시'시 키는 것이다. 아니, 이 녀석은 내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는 기술 좋 은 '수신 선생'인 것이다.
3, 증조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한 내 손자
내 '손자 보기'에서 가장 힘들 때가 있다. 그것은 초저녁 8시부터
오늘과 내일의 분기점인 밤 12시까지이다.
폭신한 자리에 뉘어 놓고 우유 젖꼭지 물려 주는 기본 동작은 이 놈에
게는 안 통한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은 뱃속에서 충분히 연습했다는 듯,
눈쌀 찌푸리고 입 비트는 품이 1급이다. 유모차에 적당한 각도로 눕히
고 섹시하게 생긴(?) 빈 젖꼭지를 물려주고 완급을 조절해 가며 밀고 당
겨 주어 본다.
제2동작이다. 역시다. 안 통한다. 낮에는 통했는
데... .
역시 제3 동작이라야 할 것 같다. 제 놈 왼 뺨과 내 왼 뺨이
슬쩍슬쩍 스치고, 내양 팔은 x자로 단단히 제 하체를 받쳐 주는- 저 편
으로는 쾌적, 내 편으로는 최고가장 고통이 따르는- 동작이다. 아니
나 다를까 조용하다. 문제가 이리 쉽게 해결된다면 인생이 뭣이 그리 고
달프랴! 젊었을 때도 체력면에서는 썩 나설 만하지 못한 나로서는 예
의 제3동작을 장시간 실시하지 못하는 처지다. 이 속내를 전혀 감안하
지 않는 이 놈이기에 문제다.
5분 10분이 경과 (자장가 한 곡에 1분 치
면 현재명, 슈베르트, 모짜르트를 세 번 쯤 섭렵하는 사이) 되
면, '더 이상은 어르신 체력에 무리일 것 같다'는 내 이두박근, 삼두
박근의 연이은 보고가 빗발친다. 가만 내려다본다. 놈도 염치라는 게
있는지 꼬박 잠이 들어 있다. 이제 복근력이 작동해야 할 때다. 난데없
이 왠 복근력이냐고?
내 8대 종손 같은 놈 잠 안 깨게, 가장 정숙한 동
작으로 눕혀서, 깊은 잠 속으로 빠져 가면서 방긋 웃으며, 안녕, 손
흔들고 꿈나라로 가기까지 '모셔 본' 사람 아니면 모를거다. 요점만 설
명하자면 잠든 요놈이 안긴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가슴을 그대로 밀
착시킨 채, 자리 앞에 경건한 자세로 무릍을 꿇고-일체의 흔들림 없이
정숙히 그리고 천천히 누우실 자리에 맞춰 ㄱ자로 상체를 숙여 낮춰 가
야 하는 것이다.
이 때에 중노동하게 되는 근육이 복근인 것이다.- 이
부분은 체육 전문가 소관이지만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각 분야 골고루
지실한 덕에 자신 있게 아는 사항이다- 매사는 마무리가 중요한 것. 이
모든 역경이 보상을 받는 데는 여기서도 마지막 손놀림에 달려 있다.
즉 요놈의 뒷꼭지를 밫쳐든 왼 손바닥을 얼마나 부드럽고 재빠르게 빼내
어 베게에 인계- 인수하느냐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 쉽
지 않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뒷꼭지가 벼게에 닿자마자(여기서 왜 나
는 에스 쑨 에스라는 영어 숙어가 나오지?) 엥!하는 싸이렌 소리가 나온
다. 나는 즉시 '알았습니다. 다시 실시!' 앞의 동작을 한치의 착오 없
이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내 할머니가 그랬다는 것이었다.
내가 저맘때 밤새 바닥에서 안 자고 할머니 등에서만 잤다고 한다. 영
락없이 내 손자가 할아버지 닮았단다. 며느리가 쓸데없는 걱정할까봐 내
가 '제 아비나 고모들은 없는 듯이 순하게 컷는데, 이 할아비가 저만한
때 밤새 잠을 안자고 울었다더라. 그래서 우리 할머니 소원이 밤에 꿈
한 번 꾸는 것이 소원이었단다.'고 '고해성사'를 한 것이 꼬투리가 되
어 급조된 여론이다. 또 내가 그랬었다는 건 내 고모님들께 들었다. '그러던 것이 저렇게 사람될 줄이야... .'라는 공치사랑 함께... .
잠든 내 손자를 안고 서서, 문득 반 세기 전에 돌아가신 내 할머니를 생각한다. 집안 사정이 어찌 어찌해서 다 자란 뒤에도 오랫 만에 만나뵈며 꾸벅 절 한 자리 드리면 곱게 처진 눈자위에 조용한 미소 벙그러지 시며 '내 새끼, 내 새끼!' 하시던 할머니... .
제삿날이면 훨씬, 뵙는 느낌이 날 것 같다. 기다려진다. 등뒤에서 맡았던 할머니 냄새가 난다. 그리고.... 그립다.
어느 새 찾아 든 눈물 너머로, 포근하게 웃으며 잠든 내 손자를 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할머니를 찾아 준 내 손자가 더욱 귀엽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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